24화.
레온하르트는 숨을 들이켰다. 통로 저편에서 빛이 발광했다.
정확히 셀린느가 있는 곳에서.
‘뭐지?’
다음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셀린느가 마법으로 밝힌 은은한 빛도, 그 빛에 반짝이는 금발도, 잠시 번쩍였던 정체불명의 빛도…… 모두 사라졌다.
무거운 적막이 레온하르트를 내리눌렀다. 그가 들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거친 숨소리와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하는 소리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방금 셀린느가 보이던 자리까지 허겁지겁 뛰어갔다.
“셀린느!”
다행히 셀린느는 그곳에 있었다.
마치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
보석함 안에는…… 열쇠 하나 달랑 들어 있었다.
셀린느는 어둠 속에서도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는 손바닥만 한 열쇠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첫 번째 스테이지 클리어 보상은 체력을 최대치로 회복시켜 주는 포션 몇 개와 다음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 위해 사용하는 펜던트였다.
그런데 어디다 쓸지도 모르는 열쇠라니.
‘뭐를 열라는 걸까? 이 앞에 뭔가가 있다거나?’
하지만 이 앞은 분명 꽉 막힌 통로였다.
-툭.
보석함이 셀린느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부딪치며 닫혔다.
별안간 절망감이 셀린느를 엄습한 탓이었다.
아무리 마법을 잘 쓴다 한들 게임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면 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붕 끄트머리에서 뛰어내린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까.
당연히 남은 스테이지들도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다 보면 저주가 풀리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 생뚱맞은 클리어 보상을 본 순간, 셀린느의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당장 다음 스테이지를 펜던트 없이 어떻게 클리어하라는 말인가?
셀린느는 더는 이 게임이 자신이 실제로 했던 [셀린느 악몽]이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가까이 가도 되나?”
셀린느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렸다.
라쉬르의 불빛에 어슴푸레 빛나는 레온하르트의 조각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가에 물기가 느껴졌다.
‘그래, 나한텐 레온하르트가 있어.’
[셀린느의 악몽]의 악역이.
그가 있는 한, 이곳은 셀린느가 아는 게임 안이 맞다.
“어디 안 좋은가?”
레온하르트가 걱정스레 물었다. 셀린느는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감추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방금 그 빛은 뭐지?”
셀린느는 자그마한 불빛을 만들어 내 바닥을 비추었다. 입을 꽉 다문 채 바닥에 엎어진 보석함이 보였다.
딸깍.
다시금 함이 열리며 열쇠가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셀린느는 열쇠를 집어 들었다.
지금 당장은 필요 없어 보여도 아주 의미 없는 아이템은 아닐 것이다.
-쾅!
굉음이 울리며 천지가 진동했다. 즉각 레온하르트가 셀린느의 몸을 감쌌다.
잠시 후, 그들은 지상에 너부러져 있었다. 셀린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택은 그들이 들어가기 전과 달라진 점 하나 없었지만 셀린느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스테이지 클리어.
마침내 첫 번째 스테이지가 끝났다.
그녀에게 커다란 수수께끼를 남기고.
셀린느가 손바닥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꾹 쥔 열쇠를 들여다볼 때,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레온하르트였다.
“이게…… 뭐지?”
레온하르트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열쇠를 건네받아 이리저리 뒤집었다.
“모르겠어요.”
“이게 여기에 온 목적 아니었나?”
레온하르트가 열쇠를 돌려주며 셀린느의 어두운 안색을 살폈다.
“꿈에서…… 꿈에서 봐서 왔는데, 꿈이랑 달라요. 원랜 이게 아니라, 다른 게 나와야 하는데…….”
“풉.”
“……?”
셀린느는 느닷없이 터져 나온 레온하르트의 웃음에 놀라 아직 눈가에 머물던 눈물마저 쏙 들어가 버렸다.
레온하르트는 조금 전까지의 웃음은 실수였다는 듯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그날 말하지 않았나. 예언은 믿을 게 못 된다고.”
셀린느는 예언과 다르다고 항변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꿈과 다르다고 당황하는 건, 그 꿈이 실제로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닌가? 그럼 예언이지.”
“…….”
“내가 왜 예언을 안 믿는지 아나?”
“아뇨?”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의도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전 제국의 예언자들이 북부로 몰려왔지. 갓 태어난 나를 죽여야 한다면서.”
셀린느의 눈이 경악에 질렸다.
“하나같이 내가 우리 가문을 무너뜨리고 제국에 큰 화를 불러온다고 했다더군.”
레온하르트는 남 얘기를 하는 듯한 투였다.
“다행히 다들 매타작을 받으며 쫓겨났지. 그리고 날 봐. 예언이 이루어질 것 같아?”
셀린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예언이 올바른 예언이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동시에, 여태껏 피하려고 애썼던 진실이 그녀를 강타했다.
그간 수없이 죽는 저주에서 탈피하는 것만 생각하느라 직시하지 못했던 진실이.
이곳은 분명 [셀린느의 악몽]이다. 레온하르트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레온하르트는…… 5년 뒤, 셀린느를 죽이려 드는 미치광이가 된다.
그동안 셀린느는 단순히 레온하르트와 베르누이성이 게임과는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하!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
어쩌면 그동안 자신은 단순히 현실을 회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5년, 어쩌면 그보다도 빨리 레온하르트는 광기 어린 괴물이 되며 베르누이성은 유령성이 된다는 현실을…….
레온하르트는 반쯤 넋이 나간 셀린느를 부드럽게 붙잡았다.
“셀린느, 미래는 항상 바뀐다. 예지에 의지하지 마.”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푸른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오직 그녀를 위한 염려만이 담겨 있을 뿐 그 어떤 광기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레온하르트는 틀렸다. 그의 존재는 ‘예지’가 맞는다는 사실만을 알려 줄 뿐이다.
오히려 ‘예지’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건…….
셀린느는 열쇠를 꽉 쥐었다. 레온하르트가 자신의 운명을 맞이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절망을 안겨다 주었고 무의미해 보였던 열쇠가, 희망으로 빛났다.
셀린느는 이 열쇠의 인도를 따라 미래를 바꿀 것이다.
레온하르트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지. 여긴 사악한 곳이다.”
“잠깐만요.”
레온하르트는 저택의 정문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아무 말 없이 따랐다.
셀린느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녀를 수십 번 죽이고 어린아이의 목숨을 영영 빼앗아 버린 저택은 여전히 사악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괜찮겠나? 마력이…….”
“루가 있으니까요.”
그녀는 저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거대한 빙벽이 저택의 벽면을 따라 자라나기 시작했다.
단지 사람을 막으려면 입구만 틀어막아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창문이나 작은 틈새로 들어와 목숨을 잃었을 동물들의 사체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셀린느는 더는 이 끔찍한 저택이 생명을 집어삼키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생명이라도.
그래서 다소 무리하면서까지 거대한 돔 모양의 빙벽을 만들어 저택을 둘러쌌다.
겨울이니 봄이 될 때까지 녹지 않을 것이고, 그동안 이 저택을 완전히 폐쇄할 방법을 생각해두면 된다.
“하아…….”
셀린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레온하르트가 다가와 셀린느의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 주었다.
“고생했다.”
“진작 이랬어야 했어요.”
“…….”
레온하르트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그들은 황족이 기거하는 리브론성에 도착했다.
리브론성은 첫인상이 다소 기괴했던 베르누이성과 달리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셀린느의 눈이 잠시도 쉬지 않고 사방으로 움직였다.
거대한 대리석 분수대, 금박으로 장식한 수많은 조각상들, 바닥에 깔린 화려한 모자이크까지…….
“마음에 드나?”
셀린느는 솔직하게 자신이 여태까지 본 그 어떤 건물보다도 아름답다고 대답하려다, 상대가 베르누이성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둘러댔다.
“황성엔 처음이라서요.”
“흠.”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속마음을 다 안다는 듯한 시선을 던지다가, 다가온 관료에게 인사했다.
관료는 레온하르트와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다 셀린느를 향해 돌아섰다.
“셀린느 루테, 리카르도 전하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다니 반갑군요.”
“반, 반가워요…….”
셀린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황태자와 친분은커녕, 만난 적조차 없다.
대체 황태자가 일면식도 없는 그녀에 대해 뭐라고 얘기했단 말인가?
셀린느의 의문은 그들이 황태자의 집무실에 들어선 지 몇 분 만에 풀렸다.
일어선 채 그들을 맞이한 리카르도 황태자는 마흔 남짓 되어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는데, 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쩍 갈라진 빙판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리카르도 전하.”
셀린느는 대니가 일러 준 인사말을 얌전히 읊었다.
그녀는 대니에게 자신이 귀족의 예법을 배운 적 없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대니는 좋은 스승이 되어 주었다.
황태자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대가 바로 그 북부의 레이디로군. 레온하르트가 나를 협박해 가며 임무에 데려갔던.”
“전하!”
레온하르트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소리쳤다.
“전 단지 청을 드렸을 뿐입니다.”
“농담이네.”
황태자는 피식 웃음을 내뱉었지만, 눈은 여전히 웃고 있지 않았다.
셀린느는 황태자가 자신을 들쑤시는 이유를 직감했다. 그녀를 레온하르트를 자극할 좋을 카드였다.
셀린느는 이를 꽉 악물었다. 자신이 여기서 나서 봤자 레온하르트의 상황만 더욱 악화될 뿐이다.
‘약점이 될 순 없어.’
황태자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내 궁에서 흑마법의 징표가 여럿 나타났고, 황제 폐하께선 내 사람들을 의심하신다. 하지만 나는…… 이건 편을 드는 게 아니니 선입견 없이 들어 주게.”
“뭐든 말씀하십시오.”
“범인은 내 사람이 아니야.”
황태자는 할 말이 다 끝났다는 듯 입을 다물고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셀린느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본인 측근들 중 흑마법사가 있다고 생각하기 싫은 거야 당연하다. 하지만 주장을 하려면 근거를 내놓아야 할 게 아닌가?
레온하르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전하, 언짢으신 건 압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명을 내리셨기에…….”
“내가 뭐라나? 조사해. 단지 난 그대가 헛수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를 바랄 뿐이야.”
“…….”
“어쨌든, 그대의 일을 줄여 주지. 라쉬르를 써도 좋다.”
“……!”
레온하르트의 눈이 경악을 머금었다.
“전하, 그 말씀은…….”
“라쉬르가 흑마법사를 베면 본디의 시커먼 피가 흐른다지?”
“예, 하오나…….”
황태자는 레온하르트의 말을 끊었다.
“라쉬르로 낸 작은 상처 하나면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하겠지. 그대로서도 겨울 내내 기약 없는 조사를 하는 것보단 그게 좋지 않겠나?”
“대부분이 대귀족 아닙니까. 상처를 내는 걸 끔찍이도 거부할 겁니다. 그리고 라쉬르는, 전하도 아시잖습니까.”
셀린느는 그제야 황태자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그 요구가 얼마나 충격적인지 깨달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검집에 든 라쉬르조차 만지지 못하게 했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안겨다 준다면서.
황태자는 자신의 측근들을 그런 고통 속으로 집어넣으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 명에 따를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