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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23화 (23/120)

23화.

그들은 이틀 뒤 황도에 도착했다.

“공자님!”

예전과 다름없이 호들갑을 떠는 호텔 지배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은 셀린느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아이고, 북부의 새로운 루테 아니십니까. 어찌나 대단하신지 소문이 여기까지 다 퍼졌습지요.”

셀린느는 지배인과 악수하며 어색하게 웃은 뒤,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금 기분, 상했나?”

레온하르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뇨?”

“지배인 말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상했다면…….”

셀린느는 이마를 조금 찌푸렸다.

“제가 왜 그런 거로 기분이 상하겠어요?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죠.”

“…….”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셀린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서 출발해요. 내일 오후에 황태자 전하를 뵈어야 한다면서요.”

“알겠다.”

그들은 곧 저주받은 저택에 도착했다. 담쟁이와 곰팡이로 뒤덮인 외벽은 여전했고, 황량한 마당 역시 그녀가 떠났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휴…….”

셀린느는 씁쓸한 한숨을 토해 냈다. 정말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더더욱.

하지만 저주는 풀어야 인간답게 살 게 아닌가.

그들은 황폐한 마당을 지나 입구로 들어갔다.

“뭐지?”

레온하르트가 의문에 찬 한마디를 내뱉었다.

저택의 고풍스러운 문은 대못을 박은 널빤지와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었다.

그는 셀린느가 움직이기도 전에 라쉬르로 널빤지와 쇠사슬을 베어 내고 문을 밀었다.

문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레온하르트는 안을 조심스레 살피다 신음을 토해 냈다.

“뭐예요?”

“…….”

레온하르트는 뻣뻣하게 몸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셀린느는 그를 따라 저택 안으로 발을 한 발짝 들였다.

“……!”

입 안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핏자국이 있었다. 갈색으로 말라 있지만, 아직은 형태가 선명한 어린아이 모양의 핏자국이.

셀린느의 피가 식었다.

쫓아내는 사람이 없어졌으니, 아이들은 담력 시험을 한답시고 이곳에 당연히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한 아이가 죽었다.

아이를 찾다 시체를 발견한 마을 사람들이 저택의 문을 널빤지로 막았을 것이고.

레온하르트가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셀린느는 조금도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처참히 죽은 아이.

‘누굴까.’

이름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이곳에 들어오려던 천진난만한 얼굴 여럿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지만, 그들을 가까이하려는 시도 한 번 하지 않았기에.

갑자기,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잘못이 아니다.”

“네?”

셀린느는 소스라쳤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 당연히 여길 남아서 애들을 쫓아야 했다는 생각이 들겠지. 사람이면 당연한 생각이야.”

셀린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죄책감의 해일이 지속적으로 몰아쳤다.

“바로 떠나자고 재촉한 건 바로 나다. 네게 제대로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생각 없는 짓이었어요.”

“그래, 내가 생각이 없었지.”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지금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당시 저택의 위험성을 생각했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적어도 아이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이렇게 널빤지로 입구를 막는 시도라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죄책감을 덜어 주려는 레온하르트의 노력을 모르지는 않았기에, 셀린느는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늘, 일을 끝내고 이곳을 완전히 폐쇄해야겠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도록.’

셀린느는 침을 꿀꺽 삼키고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안정을 되찾았다고 생각했는지 한결 안도한 얼굴이었다.

‘말해야 해.’

작은 죄책감이 셀린느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동안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대체 이 저택에서 뭘 할 건지 물어올 때마다 일부러 대답을 피했다.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부탁, 하나 들어주실 수 있나요?”

“뭐든지.”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묵직한 무게와 함께 신뢰가 전달되는 듯했다.

“그날처럼 쫓아와 주세요.”

“뭐……?”

레온하르트는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멍하니 되물었다.

“절…… 흑마녀라고 생각하셨을 때처럼요. 죽이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전력으로 절 쫓아와 주시면 돼요. 따라잡지는 마시고요.”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저주를 풀 방법을 찾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닌가?”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들린다는 건 알아요. 레온하르트에게 힘든 일이라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저주를 풀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요.”

“만약 내가 안 된다고 하면?”

“혼자서라도 해야죠. 쫓기는 척하며. 보고 웃지만 말아 주세요.”

셀린느는 농담인 것처럼 가볍게 말하며 웃으려 했지만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실패하고 말았다.

“…….”

레온하르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셀린느의 요청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었고, 반대로 거절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심지어 셀린느조차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 또한 할 수 없었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녀의 목숨을 던져 가며.

그에 비해, 자신이 그녀에게 해 준 일이 뭐가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셀린느의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린다 해도 부탁을 들어주는 게 사람 된 도리였다.

“……알았다.”

셀린느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작은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고마워요.”

레온하르트는 그 미소에 만족하기로 했다.

잠시 후.

“시작해요.”

셀린느의 말이 들리자마자 레온하르트의 발이 땅을 박찼다.

“위험해!”

레온하르트가 채 몇 걸음 걷지도 않았을 때였다.

거대한 마물 박제가 뿔을 아래로 한 채 셀린느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라쉬르가 빛을 발하며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레온하르트는 마물 박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챙!

라쉬르는 셀린느가 만들어 낸 거대한 얼음벽에 부딪쳤다. 얼음벽은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마물 박제는 아무도 없는 맨바닥에 굉음을 내며 떨어졌다.

레온하르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닥에 너부러진 흉측한 박제를 바라보았다. 말라비틀어진 뿔이 본체로부터 떨어져 바닥을 또르르 굴렀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셀린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행히 바닥은 흙과 먼지로 가득했기에 어렵지 않게 셀린느의 발자국을 찾을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빠른 걸음으로 셀린느의 뒤를 쫓았다.

타다닥, 빈 복도에 쫓고 쫓기는 자의 발걸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생각보다 할 만하네.’

셀린느는 다섯 번째로 마주친 함정을 바람을 일으켜 건너뛰며 생각했다.

베르누이성에서 보낸 두어 달 동안 끔찍한 기억들은 흐릿해졌고, 예상치 못한 함정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만약 자신이 아무런 힘 없이 무작정 이곳으로 돌아왔더라면 몇 번이고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마법사였다.

“허억.”

발밑에서 거대한 쇠 덫이 불쑥 튀어나왔다. 셀린느는 덫이 자신의 다리를 으스러뜨리기 직전, 얼음덩어리를 덫에 밀어 넣었다.

-짤깍!

덫은 얼음을 동강 내며 꽉 닫혔다.

함정을 하나씩 피할수록 가슴 깊은 곳에서 스테이지 클리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움터 올랐다.

동시에 두려움도.

저택의 모든 층을 통과했다. 이제 남은 공간은 지붕뿐이었다. 발을 들이자마자 떨어져 죽어, 단 한 번도 지나가지 못한 이곳의 유일한 공간이.

셀린느는 다락방 문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경첩이 삐꺽대는 소리와 익숙한 먼지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그날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자신이 레온하르트를 만났던 날과.

셀린느는 먼지에 콜록대며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들이닥쳤다.

‘괜찮아.’

이제 셀린느는 바람을 제어할 수 있다. 추락하면 고드름을 만들어 잡고 기어 올라갈 수 있다.

셀린느는 천천히 지붕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토해 냈다.

미세하게 떨며 지붕에 발을 내딛는 셀린느의 뒷모습은 그날과 너무나 똑같았다.

자신이 셀린느를 죽인 날과.

레온하르트는 얼어붙은 채 셀린느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금발이 거센 바람에 휘날렸다. 어깨에 두른 하얀 케이프와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눈 토끼를 연상시켰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셀린느가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잡지 말라고.

둘 모두에게 영원처럼 느껴진 수 분이 지났다.

셀린느는 지붕 끄트머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한 땅바닥만 보일 뿐이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듯했지만, 그녀는 이 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음 순간, 셀린느는 지붕에서 떨어져 내렸다.

“셀린느!”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들리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지붕의 좁은 폭을 정확히 내디디며 몇 걸음 만에 셀린느가 서 있던 자리에 도달했다.

추락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지붕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레온하르트는 최악의 상황마저 각오한 채 지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지붕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셀린느도, 땅바닥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셀린느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분명히 보여야 할 저택 주위의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폭풍우 치는 하늘처럼 시커먼 구름만이 레온하르트의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의 목소리가 아득한 아래에서 들려왔다.

“뛰어내려요!”

레온하르트는 아무런 생각 없이 뛰어내렸다. 캄캄한 어둠이 그를 감쌌다.

잠시 후, 단단한 바닥이 그를 맞이했다.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빼내 불을 밝혔다. 기다란 통로가 그의 앞에 펼쳐졌다. 사방이 습기로 자욱했다.

‘……지하인가.’

지붕에서 떨어졌는데 지하 통로에 들어왔음에도 레온하르트는 놀라지 않았다. 이 저택에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행히 통로는 한 방향으로만 나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달리기 시작했다.

-챙!

라쉬르가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쇠창살들을 잘라 냈다.

-챙!

갑자기 천장에서 불덩이 수십 개가 레온하르트를 향해 떨어졌다. 불덩이들은 포물선을 그리는 라쉬르의 궤적에 모두 사그라들었다.

-챙!

땅 밑이 쩍 갈라졌다. 레온하르트는 심연으로 추락하다 라쉬르를 벽면에 박고 올라왔다.

“허억, 허억…….”

레온하르트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이 저택은 단순히 수상쩍은 구석이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돌아가면 보고해야겠어.’

이상하게도, 흑마법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거야 두고 볼 일이다.

저 멀리, 반짝이는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레온하르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끝이야……!’

셀린느는 소리 없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마침내 첫 번째 스테이지의 끝에 도달했다. 뒤를 흘낏 보니 레온하르트가 자신을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했다.

통로의 끝에는 자그마한 보석함이 놓여 있었다.

셀린느는 떨리는 손으로 보석함을 쥐었다. 함은 미미하게 진동하며 빛을 뿜어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보석함이 열렸다.

‘……!’

청회색 눈이 크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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