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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22화 (22/120)

22화.

셀린느는 새로운 호위 시녀, 대니가 갑작스러운 여행을 꺼리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기우였다. 대니는 비수를 몇 개 더 품속에 챙기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황도라니, 제 실력을 보여 드릴 무대가 더욱 커졌군요.”

“대니는 정말 믿음직스러워요.”

셀린느는 보름 전, 처음으로 대니를 만났던 날을 잊지 못했다. 그녀는 셀린느를 만나자마자 당당하게 선언했다.

“셀린느 루테, 사정은 모두 들었습니다. 앞으로 셀린느 루테께서 단 한 번이라도 돌아가신다면 제 목을 스스로 치겠습니다!”

셀린느와 나타샤, 세 호위 시녀가 기겁하며 셀린느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알렸지만 대니는 자신이 왔으니 이제 걱정하지 말라며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 셀린느는 왁스를 지나치게 바른 복도를 달리다 미끄러져 죽어 버렸다.

대니는 정말 자신의 목에 단검을 박아 넣으려 했다.

대공비가 찬 바람 쌩쌩 부는 표정으로 이렇게 단언하지 않았다면.

“죽는 걸 허락하마. 단, 넌 대공가의 명을 따르지 않은 죄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다행히 자살 소동을 벌이지 않게 된 대니는 셀린느를 더욱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죽을 뻔한 위기에서 여러 차례 구해 주었다.

……본인이 죽을 위험까지 무릅써 가며.

그때마다 셀린느는 자신은 다시 살아나니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기겁했지만, 대니는 자신의 목숨 역시 아홉 개라며 웃곤 했다.

“전 고양이별의 가호를 받아서 목숨이 아홉 개랍니다. 방금 하나 썼으니 이제 여섯 개 남았네요.”

결국 셀린느는 두 손 두 발 다 들며 그녀 본인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대니가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이게 전부군요.”

대니는 하인이나 하녀를 따로 부르지 않고 커다란 짐가방 두 개를 들어 올렸다.

셀린느의 물건은 몇 없었고, 웬만한 건 다 황도에 있을 터이기에 짐은 단출했다.

레온하르트 역시 시종 한 명 없이 혼자였다.

최대한 빨리 황도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마차는 총 세 대에 불과했다.

셀린느와 레온하르트가 탈 마차와 나머지 인원이 탈 마차, 짐과 황태자에게 올릴 진상품을 실은 마차까지.

“황도에만 도착하면 상황은 다를 거야. 약속하지.”

셀린느는 하인들이 마차로 하나씩 집어넣는 사치품들을 조금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충분히 좋은 상황인걸요.”

“그럼 다행이군.”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친절한 목소리에 묘한 기분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레온하르트는 평소처럼 자신을 대할 뿐인데, 갑자기 왜 오늘따라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지 알 수 없었다.

셀린느는 내일, 그녀가 레온하르트에게 부탁할 일 때문이라고 결론 내리고 마차에 올랐다.

한나절 후.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몸을 숨겼다.

마차들은 모두 멈춰 섰고 하인들은 모두 마차에서 내려 모닥불을 피웠다.

그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오늘따라 하늘이 청량했기 때문에 눈은 내리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출발을 서두른 것도 날씨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차 세 대가 이동하는 와중에, 이런 함박눈이 쏟아지다니.

오늘 밤 하루 야영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하더라도 다음 날 바퀴가 얼어붙으면…….

“다들 일어나라. 당장 출발한다!”

“레온하르트?”

고개를 돌리니 셀린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도 졌고, 눈까지 오는데 계속 간다고요?”

“계속 있다면 바퀴가 다 얼어붙을 거야.”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바로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쉬게 하세요. 말들도, 사람들도.”

“셀린느, 이건…….”

“제가 녹일게요.”

살짝 떨리는 셀린느의 목소리는 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되려 불안이 엿보이기까지 했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힘 조절에 서투르지 않나. 밤새 언 바퀴를 녹이다가 되려 마차를 상하게 할 수도 있어.”

“밤 내내 온기로 덥히면 돼요. 애초에 얼지 않게요.”

레온하르트는 미심쩍은 눈길로 셀린느를 내려다보았다. 마법을 쓰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건 상식이다.

셀린느는 집요하게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녀는 혀로 메말라 가는 입술을 적셨다. 어쩌면 괜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내일 레온하르트에게 커다란 부탁을 할 터이다. 그 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라도.

“아침에 자면 되잖아요. 아시다시피, 하루 못 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레온하르트는 더는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새벽.”

“네?”

“새벽에 출발한다. 그때까지만 부탁하지.”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고, 레온하르트는 출발 명령을 바로 거두었다.

하인들은 조금 투덜거리는 기색이 보이긴 했으나 꾸리던 짐을 풀고 야영할 채비를 능숙하게 시작했다.

셀린느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후, 모든 마차와 말들은 따스한 온기로 감싸였다.

눈을 떠 보니, 대니가 그녀의 코앞에 서 있었다.

“셀린느 루테, 저녁 드시지요.”

저녁은 따뜻한 감자 스튜와 부드러운 흰 빵, 베이컨이었다.

성에서 먹던 음식들과 비교하면 다소 초라한 저녁상이었지만, 셀린느는 정신없이 스튜를 떠먹고 빵과 베이컨을 베어 물었다.

상당한 규모의 마법을 일회성으로 사용하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건 상당히 피로한 일이었다.

“괜찮은가?”

레온하르트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뭐가요?”

셀린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지만,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말들과 마차에 마법을 걸자마자 순식간에 추위로 발개진 코와 시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눈, 추위로 달달 떨리는 몸은 누가 보아도 정상이 아니었다.

“추워 보이는데, 마차 안으로 들어가지.”

“괜찮아요.”

“안에서도 마법을 쓸 수 있잖나.”

“갑갑해서요. 잠이 올 것 같기도 하고. 아, 만약 제가 깜박 잠들면 꼭! 깨워 주셔야 해요.”

하얀 눈송이가 셀린느의 속눈썹에 맺혀 파르르 떨렸다. 레온하르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흥미 있을 만할 걸 보여 주지.”

“……?”

레온하르트는 안락한 마차를 가리켰다.

“흑마법사를 좇을 때 저런 사치를 누릴 수 있나. 설원에서 흑마법사를 추적할 때면 집을 지어야 해.”

레온하르트는 성큼 걷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아무 의문 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그가 멈춘 곳은 발자국 하나 없이 눈이 소복이 쌓인 둔덕이었다. 지난 한 달간 내린 눈이 한 번도 녹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는 듯했다.

갑자기, 라쉬르가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셀린느는 바짝 긴장했다. 마물이 이 근처에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라쉬르는 보이지 않는 마물을 베는 대신 눈을 갈랐다.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로 눈을 베어 벽돌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땅에 쌓는 모습이, 마치…….

“이글루.”

“뭐라고 했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레온하르트는 붉어진 그녀의 눈시울을 눈치채지 못하고 다시금 작업에 집중했다.

완성된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자그마한 이글루였다. 레온하르트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눈집이야. 탐트보 공국 사람한테서 배웠어. 이걸 알기 전까진 라쉬르를 껴안고 눈밭에서 그냥 잤지.”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평이했지만 좋은 추억을 떠올리는 투는 아니었다. 셀린느의 목이 조금 메었다.

“다행이네요.”

셀린느는 조금 기어서 이글루 안에 들어갔다.

냉기라기엔 너무 따뜻하고 온기라기엔 부족한 무언가가 그녀를 감쌌다.

잠시 후 레온하르트가 들어왔다. 무심코 머리를 천장에 부딪힌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 생각이 짧았군.”

셀린느는 바로 이유를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 이글루는 딱 한 명이 넉넉히 잘 만한 크기였기에 두 명에게는 너무 좁았다.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옆에 조심스레 앉으니 두 사람 모두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셀린느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레온하르트가 너무 가까웠다.

잘생긴 얼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옆에서 보니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조각 같아 심장이 조금씩 멈추는 것만 같았다.

“…….”

둘 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아둔한 판단을 다섯 번째로 저주했다. 대체 왜 자신 혼자 겨우 잘 수 있는 크기의 눈집을 만들었을까?

셀린느의 얼굴과 숨결이 너무 가까이서 느껴졌다!

더욱 난감한 것은, 레온하르트는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이걸 파렴치한이 아니라면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레온하르트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너무 작아. 나가는 게 좋겠군.”

“아뇨.”

“……?”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여기, 좋네요. 이렇게 보는 지붕도 신기하고…….”

“답답하지 않나.”

“마차는 지겨워서 답답했나 봐요. 여긴 신선하잖아요. 이글…… 눈집은 처음이니까요.”

“그런가.”

어차피 셀린느의 기분전환을 위해 만든 눈집이다. 그녀가 좋다면 자신 역시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에 레온하르트는 가만히 있었다.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레온하르트가 꼼짝 않고 셀린느의 숨소리에만 집중하고 있을 때, 갑자기 어깨 쪽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셀린느?”

셀린느가 자신에게 머리를 기댄 채 곯아떨어져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갈등했다.

깨워서 마법을 쓰게 할 것인가, 아니면…….

잠에 푹 든 채 숨을 쌕쌕 몰아쉬는 셀린느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했다. 그 상태를 깨트리는 게 죄짓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자신을 꼭 깨워 달라는 셀린느의 말이 레온하르트의 귓가에 감돌았다.

길게 느껴졌으나 실제로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은 갈등을 마친 후,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깨웠다.

“셀린느!”

순식간에 그녀의 큰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헉……!”

경악과 걱정에 질려 가는 눈에 레온하르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잠들자마자 깨웠다. 걱정 마라. 아직 얼어붙지 않았을 테니.”

“고, 고마워요…….”

셀린느는 잘 들리지도 않는 감사 인사를 웅얼거리고 눈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조금 그쳤나 싶었던 눈이 다시금 펑펑 내리고 있었다.

“허억, 허억.”

셀린느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사이에 다 얼어붙기라도 한다면……!

아니나 다를까, 말들은 발이 시린지 연신 발을 구르며 히잉거리며 울고 있었다.

“미, 미안해.”

손목의 루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셀린느 자신의 마력은 이미 바닥이 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정신을 집중하고 루에게서 마력을 빨아들였다.

“……휴.”

마력이 전신을 감돌았다.

셀린느는 정신을 집중에 다시금 말과 마차를 온기로 덮었다.

이미 얼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마력을 최대한도로 소모해 훈풍으로 느껴질 정도의 온기를 만들어 냈다.

“악……!”

갑자기, 머리가 팽글 돌아 셀린느는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안 돼, 안 돼, 안 돼.’

무리하게 마법을 썼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셀린느는 눈 바닥에 웅크리고 주저앉았다. 저번에 이런 증상을 느꼈을 땐 순식간에 죽어 버리고 말았다.

칼도, 레온하르트도 없이 오직 대니만을 옆에 둔 채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녀를 돕지 못했다.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셀린느는 죽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죽으면…….

레온하르트가 밤새 괴로워하게 된다.

셀린느는 입술이 하얗게 될 정도로 꽉 깨물었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니 버틸 수 있다.

아니, 버텨야만 한다.

“……셀린느.”

타인의 마력이 느껴졌다.

차가운 동시에 열정이 느껴지는, 셀린느가 너무나 잘 아는 마력이.

셀린느는 그동안 뜰 수가 없어 뜨지 못했던 눈을 살포시 떴다. 몸이 눈밭 위로 들려 있었고, 등은 듬직한 사내의 몸에 반쯤 안겨져 있었다.

라쉬르의 푸른 섬광이 그녀를 안정시켰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헐떡이며 검의 주인을 불렀다.

“레온하르트, 레온하르트…….”

마침내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셀린느.”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목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저, 안 죽었죠?”

“전혀.”

레온하르트는 시커먼 어둠 속, 빗발치는 눈발을 헤치고 온기가 기다리는 마차로 성큼 걸어갔다.

셀린느를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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