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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21화 (21/120)

21화.

셀린느가 루를 발견한 날로부터 한 달 가량이 지난 어느 날.

꽝꽝 언 호수가 갈라지며 물기둥이 솟구쳤다. 호수를 건너 달려오던 마물들이 순식간에 물에 빠져들었다.

셀린느는 수면을 얼려 버렸다. 마물들은 물속에서 호흡할 수 없다. 하루쯤 놔두었다가 건지면 될 것이다.

그녀는 루라고 이름 붙인 손목의 용을 쓰다듬었다. 루가 없었다면 한 번에 마력석 다섯 개는 소모하는 이 마법을 쓰는 건 자살 행위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에게 피투성이 뿔 몇 개를 건넸다.

“우두머리의 뿔이야.”

셀린느는 뿔을 조심스레 감싸 쥔 채 그녀의 마력으로 마물의 마력을 정화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뿔들은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고, 보석 크기의 마력석들이 시커먼 부스러기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루는 그녀의 손목에서 벗어나 마력석들을 하나씩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딸꾹!”

루는 마력석을 먹을 때마다 딸꾹질했지만, 곧 만족스럽게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작은 불꽃을 내뿜었다.

그들은 레온하르트의 말에 올라타고 성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이제는 친숙해지기까지 한 성탑들이 눈에 들어왔다.

둘은 자연스럽게 레온하르트의 성탑으로 향했다.

레온하르트의 성탑에서 가장 크고 아늑한 방은 이제 셀린느를 위한 각종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푹신한 쿠션들, 바닥이 너무 딱딱하다고 해서 깐 카펫, 매일 교체되는 주전부리들까지…….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소파에 반절 드러누워 아주 잠깐 동안 천장을 노려보았다.

‘……기다려야 해.’

아직은 때가 일렀다.

봄이 오고, 얼음이 녹으면 그녀가 레온하르트에게 결코 쉽다 할 수 없는 부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레온하르트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고개를 조금 드니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레온하르트가 작은 상자를 들고 있었다.

“과자 맛있다는 생각요.”

“디저트를 잘 만든다는 요리사를 구한 보람이 있군.”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옆에 자연스레 앉았다.

셀린느는 도깨비불을 만들어 그의 코를 간질였고, 레온하르트의 손이 바로 도깨비불을 덮쳤다.

하지만 셀린느의 반응이 한 차례 더 빨랐다.

도깨비불은 어느샌가 레온하르트의 어깨에 가 있더니, 그의 허리춤을 뒤덮고 어느샌가 다시 그의 눈앞에 와 있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곧 도깨비불을 잡는 데 성공했다.

“실력이 늘었군.”

셀린느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처음 이 놀이를 했을 땐 레온하르트는 단 삼 초 만에 도깨비불을 잡았다. 지금은 수십 초는 걸리는 걸 보니, 자신이 늘기는 는 모양이었다.

셀린느는 다시금 도깨비불을 만들었다.

이번엔 천장 근처로.

레온하르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지간히 이기고 싶은 모양이군.”

“그럼요.”

다음 순간, 레온하르트가 번개처럼 뛰어올라 도깨비불을 손에 쥐었다.

“더 쉽…….”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소파에 누워 있는 셀린느 위로 엉거주춤 넘어진 형색이 되었기에.

레온하르트는 상기된 얼굴로 바로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목구멍까지 달음박질해 쿵쿵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정말 오랜만에, 둘 사이에 말을 어찌 꺼낼지 몰라 난감해하는 침묵이 흘렀다.

‘뭐, 뭐라 말해야 하지…….’

머리가 굳은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셀린느는 자신이 왜 눈조차 깜박이지 못하고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레온하르트가 무어라도 말해서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 주길 바라며 그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레온하르트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셀…….”

바로 그때, 레온하르트의 시종이 문을 두드리며 그를 불렀다.

“공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 들어와.”

시종은 여전히 굳은 몸으로 소파에 누워 있는 셀린느와 주먹을 괜스레 폈다 쥐었다 하는 레온하르트를 번갈아 보았지만 흔한 광경이었기에 예사로 여겼다.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지금 가지.”

레온하르트는 바로 자리를 나설 채비를 했다. 시종의 시선이 셀린느에 닿았다.

“셀린느 루테께서도 가셔야 합니다.”

“저를요?”

셀린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레온하르트와 시종을 따라나섰다. 둘 모두 가는 길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각자의 홧홧한 얼굴을 가라앉히는 데 급급했다.

대공의 집무실은 그날따라 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셀린느는 몸을 부르르 떠는 대신 자신과 레온하르트의 몸을 온기로 감쌌다.

대공을 본 순간, 불안감이 셀린느를 엄습했다. 대공은 그들을 등진 채 창문 바로 아래 낭떠러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대공은 그들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

셀린느는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평소의 멀끔하고 인자한 대공이 아니었다.

대공의 눈은 거칠게 충혈되었고 머리 또한 손질도 받지 않은 모양인지 산발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 무슨 일입니까?”

“폐하께서.”

대공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너에게 임무를 내리셨다.”

“폐하께서요?”

레온하르트는 이마를 찌푸렸다.

최근 몇 년간, 그에게 임무를 보내오는 건 황태자 리카르도였으며 황제가 직접 임무를 내리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리카르도 전하께선 모르십니까.”

“아니, 아신다. 단지 반대하셨을 뿐.”

대공의 목소리는 무척 피곤하게 들렸다. 그만큼 이번 명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무슨 명입니까?”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엿보였다. 황제는 찬성하고, 황태자는 반대한 임무라니. 그가 여태껏 해 왔던 임무와는 궤가 다를 것이다.

대공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잠입을 원하신다.”

“어디로요?”

레온하르트는 어리둥절한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얼굴을 모르는 귀족은 없다. 차라리 무작정 라쉬르로 찌르는 게 더 정보를 얻기 쉬울 것이다.

대공은 한숨과 함께 한마디를 토해 냈다.

“리카르도 전하 곁.”

“……!”

“태자 궁에서 흑마법사의 징표가 여럿 발견되었다.”

셀린느가 숨을 들이켰다.

여태껏 레온하르트에게서 들은 흑마법사는 자신의 근거지를 그 어느 생명도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드는 악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흑마법사의 징표가 다른 곳도 아닌, 태자 궁에서 발견되었다니!

“리카르도 전하께선 아십니까?”

“당연하겠지.”

대공은 성마르게 대답했다.

“리카르도 전하는 외부인의 침입이라고 주장하고 계신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리카르도 전하의 측근 중 한 명으로 의심하시는군요.”

“그래.”

대공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게 태자 궁에서 머물며 흑마법사를 추적하라고 하시는구나.”

“…….”

무거운 침묵이 그들을 내리찍었다. 레온하르트는 걱정스러운 물음을 입 밖으로 내놓았다.

“전 대외적으로도 리카르도 전하를 조사하게 됩니까?”

“그럴 리가.”

대공은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넌 겨울 동안만 임무를 수행하기 쉽게 황태자 전하의 호의로 태자 궁에 머물게 되었다고 공표될 것이다.”

“리카르도 전하께서 이를 가시겠군요.”

레온하르트는 사실을 얘기하듯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혼란과 불안을 숨길 순 없었다.

“기꺼워하진 않으시겠지. 당연히.”

대공은 혼란스러워하는 아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들아, 나도 거절하고 싶구나. 하지만 이건 황명이다. 내 선에서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길 역시 조용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탑에 도착해서야 힘겹게 말을 꺼냈다.

“이건, 나 혼자 가겠다.”

“레온하르트……!”

셀린느가 바로 반박하려 했으나 그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잠깐, 잠깐만……얘기를 들어다오.”

레온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리카르도 전하는 나쁜 분은 아니다. 하지만…… 화가 나면 종잡을 수 없는 분이 되지.”

레온하르트의 손이 셀린느의 손 쪽으로 움직이다 움찔하며 멈추었다.

“불똥이 네게 튈 수도 있어.”

“레온하르트에게는요?”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내게 리카르도 전하가 화를 내셔 봤자 본인 팔을 자르는 일밖에 더 되겠나?”

셀린느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현재 제국에서 유일무이한 인재. 황태자는 어떤 상황에 놓여도 레온하르트를 내치지 못할 것이다.

“잠은…….”

“문제없어.”

레온하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셀린느의 말을 낚아챘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 이제는 네 실력을 잘 알게 되었지. 걱정도 안 되는군.”

“정말인가요?”

청회색 눈빛이 새파란 눈빛과 얽혀 기묘한 긴장감이 둘 사이에 감돌았다.

셀린느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지난 한 달간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곁을 좀체 떠나지 않았다. 단순히 노닥거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셀린느를 철저히 훈련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아무리 열심히 연습해도 레온하르트는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듯 더 높은 경지를 제시하곤 했다.

레온하르트의 대답은 느리게 돌아왔다.

“……노력해 보지.”

“잠, 못 잘걸요. 아시잖아요.”

“상관없어.”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다소 거친 말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셀린느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상관이 없긴 왜 없어요? 애초에 잠을 못 주무셔서 저를 찾아오신 거잖아요.”

레온하르트는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어 버렸다.

“게다가, 황도에 가야겠다고 생각은 했었어요.”

“뭐?”

셀린느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공의 말을 듣는 내내, 지금이 바로 기회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칠 수가 없었다.

지난 한 달.

셀린느는 여섯 번 죽었다.

마물에게 두 번, 복도에서 미끄러져서 한 번, 승마를 배우다 두 번, 바람 마법을 시험하다가 한 번…….

레온하르트와 새로 온 호위 시녀, 대니가 아니었다면 그 배는 더 죽었을 것이다.

셀린느는 마법을 배우면 더는 한 번도 죽지 않는, 오히려 원할 때만 죽었다 되살아날 수 있는 몸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지나치게 희망적인 생각이었다.

데드 엔딩은 곳곳에 숨어 있었고 그녀가 짐승 수준의 순발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이상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셀린느는 이런 삶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복도에서 뛰지도 못하고 말에 오르지도 못하는 삶에서…….

‘그 저주받은 저택으로 되돌아가야 해.’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부터, 셀린느의 머릿속을 감도는 생각이 있었다.

모든 게임은 엔딩을 보는 순간 종료된다.

‘게임을 클리어하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즉, 그녀는 어떻게든 엔딩을 보아야 했다.

하지만 아직 첫 번째 스테이지인 저주받은 저택조차 클리어하지 못한 상태.

겨울이 지나면 레온하르트에게 부탁해 저주받은 저택으로 돌아가 첫 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생각이었다.

그곳에 갇혀 있던 시절엔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마법을 쓸 수 있는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레온하르트가 임무를 위해 황도로 떠나는 지금은 좋은 기회였다.

“그 집에 다시 가야 해요.”

“……대체 무슨 생각이지?”

레온하르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경악이었다. 셀린느는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그 집에서 저주가 시작되었으니까, 혹시 저주를 풀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며 이곳은 게임 속 세상에 불과하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

레온하르트는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셀린느는 성급히 말을 이었다.

당연히,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죽지 않을지 걱정하리라.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요. 솔직히 저도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할 수 없고요. 하지만 저주를 푸는 건, 제겐 정말 중요해요.”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말을 멈추었다.

레온하르트의 눈이 굳은 결심으로 일렁였다.

“알겠다. 최대한 도울 테니, 뭐든 말만 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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