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그들은 빠른 속도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설원 위에서 길을 찾는 일은 꽤나 힘들었고, 레온하르트는 오직 일직선으로만 길을 만들 수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이미 지나왔던 길과 다시 마주치기도 했다.
길이 만나는 지점은 눈이 녹는 수준이 아니라 땅이 깊게 파였기 때문에 말이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저게 뭐죠?”
겹쳐진 지점이 세 번째 생겼을 때, 무언가 땅에서 반짝거리는 걸 발견한 셀린느가 고개를 빼며 물었다.
거대한 보석 원석처럼 보이기도 하는 둥근 구체는 일부만 드러났는데도 눈부시게 빛났다.
레온하르트는 바로 말을 멈추었다.
“마력석이군.”
“저게요?”
셀린느는 깜짝 놀라 반쯤 소리치듯 외쳤다.
그녀가 여태까지 본 마력석들은 모두 작은 보석 크기였다. 이건…… 사람 머리통 크기였다.
“이렇게 큰 마력석이 있어요?”
“여태껏 본 마력석들은 마물의 뿔과 이빨을 정제해 만들기 때문에 작을 뿐이야. 자연 상태의 마력석은 이렇게 큰 게 많지.”
레온하르트는 말에서 뛰어내려 라쉬르로 마력석을 바로 파내 셀린느에게 건네주었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마력석은 전체가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아…….”
셀린느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석을 쥐자마자 기진맥진했던 그녀의 몸에 온기가 돌며 마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효과가 있으니 다행이군. 자연 상태의 마력석들은 맹탕이 많아서.”
그 말에 셀린느는 도움이 될 만한 마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렸다.
하지만 이 마력석만큼은 맹탕이 아닌 모양이었다. 크기만큼이나 많은 마력을 담고 있는지 아무리 흡수해도 끝이 없었다.
“마력이 엄청 많네요.”
“이상하군. 자연 상태의 마력석이 그렇게 많은 마력을 담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
한 시간쯤 지났을까.
마침내 셀린느는 마력석의 마력을 모두 흡수했다. 최상등품 마력석의 마력도 몇 분 만에 흡수하곤 했기에 그녀 스스로도 상당히 의아했다.
“다 끝났어요.”
셀린느는 마력석을 조심스레 땅에 떨어트렸다.
빠직!
“……?”
돌이 떨어질 때 으레 나는 소리가 아닌, 알의 껍데기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둘은 바싹 긴장한 채 마력석을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이미 라쉬르를 치켜든 상태였다.
마력석이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지더니, 가운데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용……?”
셀린느의 입에서 놀라움에 찬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조각난 마력석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손바닥만 한 동물은 언뜻 보기엔 황금색 도마뱀 같았지만, 그 형상은 분명 용이었다.
심지어 눈에 굉장히 익숙한.
눈앞의 용은 [셀린느의 악몽]의 상점에서, 포인트를 모아 살 수 있는 아이템 중 하나와 굉장히 닮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살 때도 용 자체를 사는 게 아니라 용의 알을 사서 부화시키는 콘셉트였지…….’
셀린느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유저들은 용을 예쁜 쓰레기라고 불렀다.
주인공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것 말고는 아무 능력도 없는 것만으로도 한심스러운데, 용이 유발하는 데드 엔딩까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용이 자신을 주인으로 각인하기까지 하면 일이 귀찮아졌다.
바로 그때, 용이 셀린느를 향해 날아들었다.
휙!
곧바로 라쉬르가 용을 향해 포물선을 그렸다. 하지만 용은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라쉬르를 피해 셀린느의 손에 안착했다.
“……설마.”
신음이 절로 나왔다. 설마 이 용은 벌써 자신을 주인으로 각인했다는 말인가?
셀린느는 있는 힘을 다해 용을 떼어 내려 했지만, 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레온하르트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지만, 얼빠진 얼굴만 보일 뿐이었다.
“이런 건 나도 처음 보는군. 사람에게 달라붙는 용이라…….”
레온하르트는 걱정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운 눈치였다.
“하지만 용이 사람에게 해를 끼쳤다는 말은 들은 적 없다.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계속 붙어 있으면 어떻게 해요!”
셀린느는 용을 귀여워하다가 죽어 버린 플레이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 칼 루테가 방법을 알긴 할 거야.”
칼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레온하르트의 얼굴은 어딘지 기분이 나빠 보였다.
그들은 서둘러 출발했다. 이제 마력도 채워졌으니 말의 전신에 온기를 둘러 주며 설원을 내달리면 된다.
셀린느는 어서 용을 몸에서 떼어 내고 싶어 안달이었다. 하지만 용은 온열 팔찌라도 된 것처럼 그녀의 손목에 돌돌 감긴 상태로 약간의 온기를 내뿜었다.
“금팔찌 같군.”
“차라리 금처럼 녹여 버릴 수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좋게 생각해. 남부에선 용을 신으로 경배하니, 가면 신처럼 대우를 받을지도 몰라.”
“제가 남부에 갈 이유가 없잖아요.”
“내가 남부에 임무를 수행하러 떠날 순 있지.”
레온하르트는 살짝 실망한 목소리였다.
“아……!”
셀린느는 방긋 웃었다.
“그렇네요. 하지만 그때까지 얘가 제게 붙어 있을까요?”
“그거야 모르지. 알에서 깨어난 것들은 가장 처음 보는 자를 어미로 각인한다고 하니까.”
“이게 제일 처음 본 건 라쉬르였을 걸요!”
그들은 성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용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용은 손바닥에서 손목으로 위치를 옮긴 뒤로는 꿈쩍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둘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칼을 찾아갔다. 레온하르트는 보고조차 미룬 채 셀린느를 따라갔다.
칼의 눈은 셀린느의 손목을 보자마자 휘둥그레졌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셀린느는 우연히 발견한 마력석과 그 안에서 깨어난 용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칼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말도 안 됩니다.”
“하지만 일어났는걸요.”
“직접 내 눈으로 보았다.”
레온하르트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용의 알이 깨지려면, 얼마나 많은 마력이 소비되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마력이 좀 많다 싶긴 했어요.”
“좀 많다고요?”
칼의 언성이 높아졌다.
“셀린느 루테, 전 당신의 마력량을 압니다. 대단하지요. 하지만 용의 알을 부화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해요! 혹시 라쉬르로 내리치기라도 했습니까?”
“……아.”
칼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의 레온하르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라쉬르로 눈을 녹였다. 일격이 두 번 겹친 곳에 이게 있더군.”
“역시.”
칼은 그제야 납득이 된다는 얼굴이었다.
“라쉬르를 두 번이나 얻어맞은 데다 셀린느 루테에게 마력 흡수까지 당했으니 부화할 만하군요. 축하드립니다.”
“네? 이게 축하할 만한 일인가요?”
셀린느는 칼도 남부의 신 운운한다면 앞으로 멀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칼의 대답은 진지했다.
“이것들의 먹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뇨.”
“마력석입니다.”
“……!”
셀린느의 눈이 동그래졌다.
“끝도 없이 먹을 수 있죠. 확인된 최고 기록은 201개입니다. 돈이 아까워서 더 먹이지 못했지만.”
“먹으면 다 사라지는 게 아닌가요?”
“그럴 리가.”
레온하르트가 대신 설명했다.
“이것은 널 주인으로 인식했다. 오직 너만 쓸 수 있는 살아 있는 마력석인 셈이지. 100개든, 200개든 먹으면 그만큼의 마력을 저장하고 있는.”
“공자님이 맞습니다.”
“…….”
셀린느는 할 말을 잃고 용을 들여다보았다. 예쁜 쓰레기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대단한 아이템이었다니!
더는 마력이 고갈되어 오늘 아침처럼 곤란해질 일이 없으리라.
‘하기야, 게임에선 마법을 못 썼으니까.’
아무리 대단해도 마법사만 쓸 수 있는 아이템이니 게임의 평범한 셀린느에겐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얘, 계속 붙어 있을까요?”
칼은 조금 머뭇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런 경우는 보고만 여럿 들어서…… 하지만 성장하면 절로 떨어질 겁니다.”
그는 셀린느에게 붉은 마력석 하나를 내밀었다.
“하루에 하나씩만 먹이십시오. 이렇게 어린 녀석한테 잔뜩 먹이다 마력 과다로 죽게 만든 경우도 있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마력석을 용에게 먹이자마자 손을 잡아끌었다.
“칼 루테, 고맙군. 셀린느, 어서 가서 쉬는 게 낫지 않겠나?”
“그래야겠어요.”
그렇잖아도 너무 큰 일을 겪었기 때문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이끌어 주는 대로 나타샤의 탑으로 들어갔다.
호위 시녀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십니다! 세상에, 옷이……!”
여태까지 줄곧 레온하르트의 외투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셀린느는 그제야 자신의 옷이 누더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돌아가셨군요!”
미리암이 조금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외치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요.”
셀린느는 자신의 이마에 와 닿는 미리암의 시원한 손이 기분이 좋아 살짝 웃었지만, 미리암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아니, 열도 있으신데?”
“정말인가?”
레온하르트가 덜컥 겁이 난 얼굴로 물었다. 엘이 그와 셀린느를 번갈아 보더니,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공자님, 혹시 오한이 들지는 않으셨습니까?”
“……? 그야, 눈을 헤치고 왔으니…….”
“지금도 드시는 것 같은데요.”
그제야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미세하게 떨고 있고, 그의 얼굴이 평상시보다 더욱 창백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엘이 레온하르트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웬 노랗게 마른 나뭇잎을 하나 꺼내 레온하르트의 이마에 찰싹 붙였다.
나뭇잎은 순식간에 붉게 변했다.
“심한데요? 브란체 선생을 부르겠습니다.”
레온하르트는 바로 얼굴을 굳혔다.
“그럴 필요 없다.”
“미리암, 공녀님을 모셔와.”
“알았어.”
미리암이 발걸음을 떼자마자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내 방으로 돌아가 치료받도록 하지.”
“레온! 셀린느!”
“공녀님!”
호위 시녀 중 자리에 유일하게 없던 아리아가 나타샤와 함께 나타났다. 나타샤는 발개진 눈으로 그들에게 달려왔다.
“아,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당연히 걱정이야 안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나타샤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레온하르트의 이마에 여전히 붙어 있던 붉은 나뭇잎을 떼어 냈다.
“……브란체 선생을 부를게.”
“하지 마라.”
레온하르트는 명백히 경고하는 어조였다.
셀린느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 레온하르트만 괜찮다면 같이 치료받고 싶은데…….”
팽팽하게 날이 서 있던 레온하르트의 표정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내가 같이 있길 원하나?”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좀 무섭네요. 의사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정확히는, 이 중세풍 게임에 등장할 법한 의사가 무서웠다.
갑자기 이게 다 나쁜 피 때문이니 빨아내야 한다고 거머리가 잔뜩 든 통을 가져오면 레온하르트의 권력의 힘을 빌려서 같이 도망칠 생각이었다.
“알았다.”
다행히, 브란체 선생은 청진기 대신 웬 대롱으로 셀린느의 숨소리를 들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매우 현대적인 의사였다.
“우선 열을 가라앉히는 약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하루 푹 쉬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레온하르트도 별다를 게 없는 진단을 받았지만, 매우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셀린느는 곧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열을 가라앉히는 약은…… 기포가 부글부글 올라오는 정체불명의 액체였다.
“이걸 먹느니 며칠 앓고 마는 게 낫지.”
레온하르트의 중얼거림이 옆에서 들려왔지만, 셀린느는 눈을 딱 감고 한 번에 마셔 버렸다.
“우웁……!”
사이다에 와사비를 섞으면 이런 맛이 나지 않을까 싶은 맛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탁월한 모양인지, 셀린느는 두통이 점차 가라앉는 걸 느꼈다.
“공자님, 드셔야 합니다.”
엘이 경고했다.
“먹지 않겠다.”
셀린느는 반쯤 쏟을 기세로 컵을 탁자에 올려놓는 레온하르트에게로 다가갔다.
“효과 좋은데…… 먹으면 안 되나요? 열이 엄청 심하다는데, 안 먹어서 큰일 나면…….”
“큰일은 안 나니, 걱정하지 말도록.”
셀린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까 그 나뭇잎이 체온계 역할을 한다면 엘의 반응을 볼 때 레온하르트는 보통 고열이 아닌 듯했다.
그녀는 살짝 웃었다.
“레온하르트가 고작 약을 겁낼 줄은 몰랐어요.”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이걸, 겁낸다고?”
“겁내는 거 아닌가요?”
“…….”
다음 순간, 레온하르트는 컵 안의 약을 모두 입 안에 쏟아부었다.
잘생긴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지만 약은 금세 목구멍을 넘어갔고, 셀린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됐나?”
“네.”
셀린느는 한결 안색이 좋아진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레온하르트의 몸이 많이 나아져서 기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