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눈발은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마력을 좀 더 사용해 자신과 레온하르트는 물론 말까지 온기로 감쌌다.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추위에 지쳐 밤이 깊어지기 전에 성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더욱 큰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북부의 첫눈은 그들의 상황 따윈 봐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쏟아지기 시작했고, 레온하르트는 말의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사냥꾼들의 오두막이 있어. 누추한 곳이지만, 어쩔 수 없지.”
“전 좋아요.”
셀린느는 재빨리 대답했다.
레온하르트가 끝까지 달리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하던 차였다. 오늘 밤은 무척 힘든 밤이 될 터.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송두리째 뒤집어쓰는 말 위가 아닌, 그래도 눈을 막아 줄 벽이 있는 쉼터가 필요했다.
레온하르트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펑펑 쏟아지는 눈발 사이에서 말을 조심스레 몰았다.
“저기다.”
빗발치는 눈발 사이로 작은 통나무집과 비슷한 형상이 보였다.
“여기, 와 보셨어요?”
“옛날에.”
레온하르트가 짤막하게 대답하며 말을 마구간으로 몰았다. 그녀는 나무로 된 문을 잡아당겼다.
당연히, 온기가 확 끼쳐 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셀린느는 사방에 뒹구는 무기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모피와 낡아 빠진 모포, 타다 만 장작이 남아 있는 작은 난로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마력을 끌어모아 난로에 불을 피웠다. 작은 오두막이라 큰불이 필요 없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후…….”
장작이 따닥따닥 타들어 가는 소리에 긴장이 풀렸다.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마구간은 어떻던가요?”
“하룻밤 정도는 버틸 수 있는 수준.”
레온하르트가 딱딱하게 말했다.
셀린느는 가라앉은 그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했다.
“힘내요. 딱 하룻밤이니까.”
“…….”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서 오두막 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는 같이 치우려 하는 셀린느를 만류했다.
“다 위험한 무기들이야. 건드리지 말고 거기서 몸이나 녹이고 있도록.”
셀린느는 그 말에 따랐다. 마력을 지나치게 쓴 탓인지 몸이 노곤했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피로였다. 그녀의 눈은 어느새 스르르 감겼다.
레온하르트는 무기를 모두 한데 모은 다음, 모피를 모두 그러모아 바닥에 깔았다. 마지막으로 낡은 모포를 가장 위에 덮자 그럴듯한 이부자리가 완성되었다.
그는 난로 옆에서 고개를 꾸벅이는 셀린느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레온하르트?”
“자라.”
레온하르트는 비몽사몽으로 일어서는 셀린느를 조심스레 이부자리 위에 눕혔다.
“……레온하르트는요?”
“나는 원래 못 자지 않나.”
“그래도요…….”
셀린느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지만, 결국 수마의 힘에 굴복하고 말았다.
레온하르트는 잠든 셀린느의 평화로운 얼굴을 내려다보며 안도했다. 이 정도로 피곤해하는 걸 보니, 오늘 밤 자신이 그 어떤 추태를 보여도 깨어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레온하르트는 문가에 기댔다. 강제적인 수마가 덮쳐 온다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평온한 셀린느의 모습을 보며 악몽에 빠져들고 싶었다.
그래야 그것이 꿈일 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니까.
‘……이건 꿈이다, 꿈이다, 꿈이다.’
황무지에서 라쉬르를 치켜들고 있는 자신이 나타났을 때,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뒤틀리는 뱃속과 달음박질하는 심장은 어찌 제어할 수 없었다.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새하얗게 질린 셀린느가 끊임없이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쥔 레온하르트의 손바닥을 그의 손톱이 파고들었다. 눈을 감아 눈앞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꿈속의 그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계속해서 자신을 원망하며 전투를 지켜보았다. 그는 더 빠르고 더 강했어야 했다.
마침내, 알에 라쉬르를 꽂아 넣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레온하르트의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마물의 술수에 넘어가 틈을 보인 자신.
그때, 셀린느의 감정이 그에게로 쏟아져 들어왔다.
결코 그의 것이 아닌, 공포와 걱정과 격정이 뒤섞인 거대한 덩어리가 레온하르트를 집어삼켰고, 그는 비틀거리며 셀린느의 망설임 없는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셀린느가 우두머리 마물에 몸을 던지며 마력을 퍼부었을 때, 레온하르트는 이를 꽉 악물었다. 마물의 뿔 대여섯 개가 몸을 관통하는 고통이 그를 쥐고 흔들었다.
비통함과 죄책감이 그를 집어삼켰다. 셀린느의 것이 아닌, 그의 감정이.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헐떡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문가에 기대 몸을 뒤틀고 있었다. 흥건한 식은땀을 보니 악몽을 꾼 지 꽤 지난 듯했다.
“레온하르트!”
철이 자석에 반응하듯 레온하르트도 즉각 반응했다. 푸른 눈이 번쩍 떠져 눈앞의 셀린느에 시선을 두더니, 죄인처럼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공포와 죄책감.
셀린느가 레온하르트의 얼굴에서 읽어 낸 감정이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말이 튀어 나가자마자 후회했다. 당연히 레온하르트는 괜찮지 않을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고, 셀린느는 괜스레 바닥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전 괜찮아요.”
뜬금없는 말에 레온하르트의 눈이 커졌다.
“고통이 느껴져서 괴로운 건 당연해요. 사람이니까. 하지만 저 때문에 괴롭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셀린느가 그의 손을 잡아 오자, 레온하르트가 흠칫 놀라며 몸을 살짝 뒤로 뺐다.
“느껴지죠? 꿈은 꿈일 뿐이에요.”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지금, 전 살아 있잖아요. 그건 전부 지나간 일이에요.”
“과거라 해서, 네가 겪은 고통이 없던 일이 되나.”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두 손에 손을 잡힌 채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셀린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겪은 모든 죽음은 고통으로 기억되었고 절대 잊히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둘 중 누구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침묵을 먼저 깬 쪽은 셀린느였다. 그녀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진실을 퍼 올렸다.
“……저는 그저, 레온하르트가 덜 괴로웠으면 좋겠어요. 제가 고통스러운 게 지난 일이든 지금 일이든 레온하르트까지 괴로울 필요는 없잖아요.”
레온하르트가 반박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셀린느는 그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오늘 밤은 손을 잡아 줄게요.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자면서도 느낄 수 있게.”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네가 못 자지 않나. 그래도 누워 있으면 잠시라도 잘 텐데…….”
셀린느는 모포를 가리켰다.
“같이 누워 있으면 되죠.”
“…….”
순간,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붉게 달아올라 셀린느는 자신의 무신경함을 깨달았다. 게임 안이든, 게임 밖이든 남녀가 같은 이부자리에서 자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손, 손만 잡고 잘 거잖아요.”
“안 돼.”
레온하르트는 손을 내저었다.
“대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
갑자기, 그의 눈이 감기며 고개가 푹 숙어졌다. 셀린느는 곧바로 그를 흔들었다.
“레온하르트!”
번쩍 눈을 뜬 레온하르트에게선 고통의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조금 어리둥절해 보일 뿐이었다.
“왜 같이 누워 있는 게 나은지 알겠죠? 제가 여기까지 매번 달려오게 할 생각이에요?”
레온하르트는 망설였지만, 결국은 셀린느의 말에 굴복하고 말았다.
“……폐를 끼치겠군.”
셀린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도 더 편하게 자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레온하르트는 모포 가장자리에 눕다 못해 사실상 찬 바닥에 몸을 뉘었다. 셀린느가 얼굴을 찌푸리자 레온하르트가 바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난 더한 곳에서도 자 봤어.”
“저도요.”
셀린느는 죽음이 도사리는 침대를 떠올렸다. 오래된 매트리스와 죽은 벌레가 떨어져 있는 이불, 그녀의 것이 아닌 핏자국이 남아 있는 베개……. 낡은 모포 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곁에 있으므로.
셀린느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곁의 이성을 의식하며 뜬눈으로 지새우기에 밤은 길었고 셀린느는 정말 피곤했다.
그날 밤, 셀린느는 단 한 번도 잠에서 제대로 깨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의 몸부림과 신음은 그녀가 무심코 손에 힘을 주면 사라져 버렸기에.
다음 날 아침.
셀린느는 커튼 하나 없는 창문 사이로 쏟아지는 밝은 햇빛에 잠에서 깨어났다. 레온하르트의 듬직한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뭐예요?”
“식량.”
셀린느는 곧 그의 손에 들린 피 묻은 단검과 거의 다 손질된 고기를 볼 수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가죽을 보니 제법 커다란 토끼인 듯했다.
“언제 잡았어요?”
“아침에 나가 보니 있더군.”
레온하르트는 웬 레이피어에 고기를 꽂았다. 그가 잠깐 이마를 찌푸리자 레이피어가 푸르게 달아오르며 고기가 익기 시작했다.
“……라쉬르죠?”
“그래. 이럴 때 유용하지.”
문득 웃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마물과 흑마법사를 순식간에 베어 넘기는 라쉬르가 이런 식으로 쓰이다니!
고기는 몇 분 만에 익었고,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고기를 반 잘라 셀린느에게 건네주었다.
“맛은 없겠지만 먹어라. 눈을 헤치고 가려면 힘이 필요하니까.”
셀린느는 조심스레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토끼 고기를 물어뜯었다.
“맛있는데요!”
그녀는 순식간에 고기를 먹어 치웠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레온하르트가 조금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고기는 먹기 싫은 사람이 깨작깨작 먹은 듯 여기저기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군.”
“그것도 맞아요. 그런데 꽤 맛있는 것도 사실인걸요. 이게 맛없다면 입맛이 까다로운 거죠.”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통을 꺼냈다. 셀린느는 그가 뚜껑을 열기 전부터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았기에 눈을 반짝 빛냈다.
“조금 전 먹은 것보다는 맛있을 거야.”
레온하르트의 권유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조금 뒤, 셀린느는 사탕 두 개를, 레온하르트는 사탕 하나를 우물거리며 통나무집을 나섰다.
세상이 하얗게 빛났다.
눈 위에서 산란하는 햇빛은 셀린느의 눈을 어지럽혔고 그녀가 눈길을 돌리는 곳마다 오직 빛만이 존재했다.
레온하르트가 말을 데려왔다.
“미안하지만, 어제처럼 말을 온기로 감쌀 수 있나? 그냥 가다간 말이 네 다리 모두 동상을 입을 테니.”
그다지 어려울 게 없는 요청이었다. 셀린느는 정신을 집중하고 마력을 모았다.
“……?”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셀린느는 당황하며 마력을 끌어모았지만, 미약한 흐름조차 그녀의 몸에 흐르지 않았다.
“무슨 문제가 있나?”
“마, 마력이…….”
“바닥났나 보군.”
레온하르트는 단정 지었다가, 당황한 셀린느의 표정을 보고 황급히 설명했다.
“시간이 흐르면 돌아올 테니, 걱정할 것 없어. 하지만 지금은…….”
어느새 대검으로 돌아간 라쉬르가 푸르게 빛났다. 레온하르트는 무릎까지 쌓인 눈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다음 순간, 셀린느 눈앞의 눈들이 녹아내리더니 사람 서너 명이 함께 걸어갈 수 있을 만한 너비의 길이 생겼다.
“네 마법처럼 말을 보호하지는 못해. 내 힘은 오직 살상만을 위한 힘이니까.”
레온하르트의 말엔 묘한 씁쓸함이 감돌았다.
셀린느는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지난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