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겨우 하루 사이에 날씨는 급속도로 추워졌다. 셀린느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수준의 추위였다.
그래서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온갖 모피를 직접 가져다주는 나타샤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대체 그 고집불통을 어떻게 꺾은 거야?”
“좀 고생하긴 했어요.”
셀린느는 살포시 웃었다. 나타샤는 그녀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무사해야 해.”
“평범한 마물들인 걸요. 저 혼자 가도 죽지는 않을 자신 있어요.”
“그래도 만에 하나 죽는다면 레온이…….”
나타샤는 순간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셀린느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자신이 죽으면 레온하르트는 잠을 자지 못해 괴로워할 것이다. 나타샤가 마치 못할 말을 한 것처럼 입을 다물 필요는 없다.
“네, 못 주무시겠죠. 그런 일은 없도록 할게요.”
나타샤가 셀린느를 빤히 쳐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직스러운데? 자, 받아.”
나타샤는 작은 주머니를 열어 보였다. 초록빛 마력석이 어두운 벨벳 속에서 반짝였다.
“전에 받은 게 있어서 괜찮아요.”
“그건 선물이고, 이건 레온과 함께 떠나는 공식 임무를 위해 대공가에서 지원하는 거니 받아 둬.”
셀린느는 더는 거부하지 않고 주머니를 받았다.
잠시 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엘이니?”
“나다.”
묵직한 저음이 들렸다. 나타샤는 얼굴을 찌푸렸다.
“들어와.”
셀린느에 못지않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피를 감은 레온하르트가 나타났다.
“왜, 잠시도 못 기다리겠던?”
“…….”
레온하르트는 동생의 놀림에 대꾸하지 않고 눈앞의 여자에 시선을 집중했다.
“출발할 준비는 다 되었나?”
“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온하르트가 내민 손을 자연스레 잡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조심해.”
나타샤의 마지막 말은 잘 다녀오라는 인사도, 힘내라는 격려도 아닌 경고였다.
둘은 곧바로 성탑을 내려가 출발했다.
당연히 그동안 셀린느가 승마를 배울 시간이 없었으므로, 그녀와 레온하르트는 또다시 한 말을 타야 했다.
셀린느는 말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몸을 꼿꼿이 곧추세우며 말했다.
“어서 승마를 배워야겠어요.”
레온하르트의 탐탁지 않아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명체 아닌가. 너무 위험하다고 보는데.”
셀린느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게임에서 주인공은 말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었고, 너무 신을 내 빨리 달리지만 않는다면 죽지 않았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에게 진실을 얘기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셀린느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승마 선생님도 있을 거고, 호위 시녀분들이 지켜 줄 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폐 안 끼치도록 할게요.”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하지만 배울 땐 날 불러라.”
“바쁘잖아요.”
“널 지킬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쁘지는 않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너무 걱정이 많다고 말하려 했으나 그가 목격한 자신의 어이없는 죽음들을 떠올리고 입을 닫았다.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대답을 채근했다.
“알겠나?”
“네, 꼭 부를 테니 안심하세요.”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안심한 모양인지 몸의 긴장을 풀었다.
그들은 한나절이 조금 넘게 말을 달려 생명이라곤 오직 가시덤불뿐인 황무지에 도착했다.
바닥에 잔잔하게 깔려 있어 도저히 말을 타고는 들어갈 수가 없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말을 멈추고 뛰어내려 라쉬르를 빼 들더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라쉬르의 검날이 검게 변했다.
“근처에 있군.”
셀린느는 정신을 바짝 차리며 레온하르트의 뒤를 따랐다. 레온하르트는 마치 자신의 눈이 검에 달린 것처럼 라쉬르에 의지하며 나아갔는데, 우스꽝스럽기는커녕 비장해 보였다.
“……여기야.”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반쯤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셀린느의 전신에 소름이 우수수 돋아났다.
이미 두 번이나 겪었지만 절대 익숙해질 수가 없는 불쾌한 기운이 셀린느를 엄습했다.
“두려운가?”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선 책망이 아닌 걱정만이 느껴졌다.
“아뇨.”
셀린느는 앞으로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지 이제 이 기운에 익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나도 익숙하지 않아.”
“네……?”
셀린느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간 수도 없이 많은 마물을 벤 레온하르트 아닌가!
“이게 익숙해지면, 그땐 마물들에 넘어갔다는 뜻이다.”
레온하르트는 단단히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니 조심하도록.”
“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불쾌한 기운에 익숙해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순간, 불쾌한 기운이 강렬하게 그들을 엄습했다.
셀린느는 곧바로 마력을 전신에 불러일으켰다.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등에 손을 얹었다.
“처음부터 쏟아붓지 마라. 신호를 주겠다. 라쉬르가 붉게 변하면, 그때 전력을 다해.”
“알겠어요.”
그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마물들을 기다렸다.
얼마간 후.
“……!”
셀린느는 너무 놀라 덜덜 떨리는 다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두려움과 혐오감이 그녀를 지배했다.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마물들은 여태까지 보아 왔던 짐승들의 무리 같은 행태가 아니었다.
마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밟고 올라서 집채만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였다.
레온하르트가 신음을 내뱉었다.
“세 무리나 있다고 했을 때 이상하다 싶었더니……!”
“저, 저게 뭐죠?”
“군락.”
라쉬르의 날이 푸르게 불타올랐다.
“변태한 우두머리가 새끼까지 치면 저 꼴이지. 마지막으로 본 게…… 삼 년 전이군.”
셀린느의 머릿속에 몇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에 정신을 집중하기로 했다.
신호가 올 때까지 마력을 최대한도로 끌어모으는 것.
순간, 레온하르트의 손이 그녀의 등에서 떼어졌다. 그는 라쉬르를 치켜들고 군락으로 뛰어올랐다.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라쉬르의 궤적이 빛나는 포물선처럼 보일 정도로 레온하르트는 날래고 정확하게 움직여 군락의 중심부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송골송골 맺히는 식은땀을 느끼며 레온하르트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눈으로 좇았다.
영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가고, 레온하르트가 파고든 지점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나 기다리던 신호였다.
셀린느는 가장 파괴력 있는 속성을 선택했다.
푸른 불길이 군락 전체에서 치솟았다. 레온하르트의 모습조차 지워 버릴 정도로 거대한 불이.
“허억, 허억…….”
셀린느는 주머니에서 마지막 남은 마력석을 꺼내 손에 꼭 쥐었다. 이렇게나 마력석을 한꺼번에 많이 사용한 건 처음이었다.
그녀 본연의 마력과 최상등품 마력석 세 개를 쏟아부었음에도 군락은 그 규모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중심부에서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락은 그녀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셀린느가 뒷걸음치는 속도보다도 더욱 빨리.
셀린느가 마지막 남은 마력석의 마력을 절반 정도 남겨 두었을 때, 군락은 그녀의 코앞에 도달했다.
“나와라, 나오라고……!”
레온하르트의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는 미친 듯이 마물들을 베고 넘겼지만 도저히 우두머리가 쉴 새 없이 새끼를 치고 있을 핵에 접근할 수 없었다.
삼 년 전, 그는 군락을 처치하고 나서 한 달 동안 앓아누웠다.
본디의 상태로 회복하기까지는 반년이 걸렸다.
‘그나마 그땐 군락이라는 건 알았으니 준비라도 할 수 있었지.’
문득 셀린느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마물에 짓눌리며 핵을 찾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입가에 쓴웃음이 흘렀다.
“악……!”
전신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극심한 통증이 엄습했다. 레온하르트는 환희에 차올랐다.
그는 드디어 핵을 찾았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그녀에게 마수를 뻗는 마물들을 태워 버리며 레온하르트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이제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을 완전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처음 라쉬르를 휘둘렀던 속도 그대로 마물들을 베어 나가고 있었다.
조금 전 비명엔 모골이 송연했지만, 흔들림 없이 라쉬르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니 별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우두머리에게 일격을 가할 마력을 비축하며 레온하르트가 조금이라도 다치지 않기를 기원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핵에 접근하는 걸 방해하는 마물들을 단칼에 베어 넘겼다.
고지가 눈앞이었다.
‘드디어!’
마침내 붉게 빛나는 사람 크기만 한 알이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레온하르트는 바로 알에 라쉬르를 찔러 넣었다.
바로 그 순간, 아직 서로 엉겨 붙어 덩어리를 유지하던 마물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셀린느는 안전하겠군.’
레온하르트는 미친 듯이 진동하는 알에 더욱더 깊이 라쉬르를 찔러 넣으며 생각했다.
이젠 그와 우두머리 마물 사이의 싸움이다.
-파직!
알이 완전히 깨어졌다.
레온하르트의 눈이 흔들렸다.
너저분하게 흩어진 알껍데기 사이에 인간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누워 있었다.
아니, 갓난아기였다.
당연히 레온하르트는 망설임 없이 라쉬르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의 손놀림은 평상시보다 아주 조금 느렸고 우두머리 마물에겐 충분한 시간을 벌어다 주었다.
갓난아기는 곧바로 사방에 뿔이 자라난 흉측한 구더기로 팽창해 레온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찰나의 순간.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크게 다치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가 다치면, 셀린느는 대체 누가 보호한다는 말인가?
가슴 아픈 물음도 잠시, 셀린느가 불러일으킨 섬광이 그를 집어삼켰다.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는 동시에 레온하르트의 정신은 잠시간의 공백기를 겪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우두머리 마물의 중심부에 이미 라쉬르를 완전히 꽂아 넣고 있었다.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채로.
레온하르트는 우두머리 마물이 축 늘어지자마자 바로 셀린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셀린느……!”
그의 입에서 짐승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러진 뿔 대여섯 개가 그녀의 전신을 관통하고 있었다.
깨달음에 그의 심장이 멈추었다.
그 정도 마력의 흐름은 마법사 바로 곁에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분명 크게 다칠 줄 알았던 자신이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이유는…….
-쿵!
라쉬르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이미 무너져 있는 셀린느의 몸에서 뿔들을 잡아 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불행히도, 셀린느의 의식은 아직 몸을 떠나지 않았다.
“왜…… 왜!”
셀린느가 입을 벌렸다. 들릴락 말락 한 속삭임이 레온하르트의 귓가에 들려왔다.
“……잘생겼는데…… 흉 지면 아까우니까…….”
그녀의 목숨이 저물고, 다시 살아날 때까지의 몇 분은 레온하르트의 인생에서 가장 긴 기다림이었다.
셀린느의 청회색 눈이 깜박거렸다.
“셀…….”
“저, 생각보다 쓸모 있죠?”
“…….”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어떤 말도 그의 심정을 설명하지 못했기에.
***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외투에 폭 쌓인 채 말 위에서 흔들렸다.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환상통이 사라진 다음에 출발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기에 이미 해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있었다.
“……안 추워요?”
레온하르트는 그녀에게 모자까지 벗어 주었다. 그가 자신을 반절 안은 상태로 말을 몰았기에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분명 이 추위에 얼어붙고 있을 것이다.
“네가 추워서 얼어 죽는 것보다는 낫지.”
레온하르트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다, 자그마한 온기가 그를 덥히자 소스라쳤다.
“뭘 그렇게 놀라요?”
셀린느는 작게 웃었다.
“전 마법사잖아요.”
“힘들지 않나. 마력이…….”
“차라리 숨 쉬는 게 힘든지 물어보세요. 그 정도 열기는 마력을 거의 소비하지도 않는다고요.”
“……고맙다.”
“뭘요.”
셀린느는 어깨를 으쓱하다, 눈앞을 스쳐 지나간 한기에 놀라 눈을 깜박였다.
“레온하르트, 눈이에요!”
눈송이가 천천히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첫눈이군.”
그녀는 하필 지금이냐는 레온하르트의 나직한 중얼거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끔찍한 저택에 홀로 매일 죽어 나갈 때, 셀린느는 첫눈이 오면 그나마 가장 덜 고통스러운 동사를 수없이 반복하겠노라고 맹세했다.
하지만 지금은 따뜻한 옷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으며 마법으로 몸을 덥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셀린느는 더는 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