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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17화 (17/120)

17화.

셀린느의 전신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졌다.

‘악몽인가?’

어쩌면 자신을 걱정해 잠 자체를 잘 수가 없었다는 레온하르트의 말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흔들어 깨우기 위해 손을 그의 몸 위에 얹었다가 멈칫했다.

레온하르트는 그간 그녀가 보아 왔던 악몽처럼 몸부림을 치지도, 고통의 신음을 흘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린느.”

이번엔 명백히 평화로운 부름이었다.

그녀의 귀가 붉어졌다. 레온하르트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평범한 꿈조차 내 꿈을 꾸다니.’

셀린느는 긴장이 풀린 몸을 안락의자에 기댔다. 레온하르트만큼은 아니었지만, 그간 그녀도 수련에 바빠 몸을 혹사하고 있었다.

과부하가 쌓인 몸은 화로와 담요의 온기에 스르르 녹아들었고, 셀린느는 달콤한 잠으로 빠져들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레온하르트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은 달콤한 숙면이었다.

“……!”

침대 곁, 안락의자에 셀린느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내가 잠들면 바로 돌아가라고 했는데…….’

레온하르트는 홀린 듯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윤기가 흐르는 금발이 몸통 위로 쏟아져 있었다.

그는 셀린느의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부드러운 금빛 머리채가 그의 손안에서 햇살을 받아 빛났다.

‘불편하겠군.’

돌아가지 않는 셀린느가 고마운 동시에 어이가 없었다. 하룻밤을 안락의자에서 자다니, 목이나 허리가 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그는 조심스레 셀린느를 들어 올려 자신의 침대 위에 눕혔다.

“……마.”

셀린느는 무어라 알 수 없는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퍽 평화로워 보여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얼굴만 한참 들여다보았다.

‘어차피 오늘은 쉬어야 하니.’

레온하르트는 곤히 잠든 셀린느의 얼굴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바라보았다.

-똑, 똑.

아침 9시마다 아침을 가져다주는 시종이 문을 두드릴 때까지.

레온하르트는 시종에게 방해하지 말라고 말하려 했으나 그 전에 셀린느가 잠에서 깨어났다.

“헉……!”

셀린느는 자신이 레온하르트의 침대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돌아가라고 했는데.”

레온하르트의 장난기 어린 말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피곤해서요. 그런데 저, 침대는 왜…… 신발도 신고 있잖아요!”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여자의 신발을 어떻게 내가 벗기겠나.”

“…….”

셀린느는 옷도 아니고 신발 정도는 벗길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시종이 든 은쟁반에서 풍겨 나오는 맛있는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고, 뱃속이 허기로 꿈틀댔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어서 들지.”

“좋아요.”

셀린느는 창가 옆 마련된 고풍스러운 테이블로 다가갔다. 신발을 신고 침대에서 내려오자니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은쟁반엔 모든 음식과 식기가 2인분씩 마련되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소시지부터 먹기 시작했고, 셀린느는 부드러운 빵을 집어 새콤달콤한 잼을 한껏 발랐다.

그들은 순식간에 은쟁반을 비웠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손도 대지 않은 신선한 우유 한 주전자까지 모두 마셨다.

“좀 더 내오라 할까?”

“아뇨. 이 정도면 충분해요.”

셀린느는 입가심을 위해 향이 강한 차를 홀짝였다. 레온하르트가 미소 지었다.

“잘 먹는 걸 보니, 이제야 안심이 되는군.”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은 따사로웠고 삭막한 방 안은 셀린느의 존재 덕에 반짝거렸다.

레온하르트는 잠시간 평화에 잠겨 있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가 진지한 목소리로 레온하르트를 불렀다. 청회색 눈빛과 짙은 푸른색 눈빛이 서로 얽혔다.

“왜 혼자 임무를 수행해요?”

레온하르트는 잠시간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그게 궁금한가?”

“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하면, 마법사가 레온하르트와 함께 마물이나 흑마법사에 맞설 수도 있잖아요.”

“…….”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곧바로 어두워졌다. 그는 잠시 멈칫거렸다.

“……나는 마법사와 함께 일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혹시 마법사가, 흑마법사나 마물의 마력에 휘말려 타락할 수도 있어서인가요?”

셀린느는 그동안 생각해 왔던 추측을 얘기했다.

칼은 정말 강력한 마법사였고, 그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하는 셀린느만 해도 마물에 효과적일 것 같은 마법을 한두 개 쓸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야. 칼 루테만 해도 마물을 처치한 적이 있지.”

“그럼 왜…….”

레온하르트는 자신에게 항상 안정과 불안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청회색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힌 망령에 대해 털어놓아야 할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다.

‘아직은, 일러.’

레온하르트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하얀 거짓말을 셀린느에게 쥐여 주었다.

“왠지 모르게 껄끄러워서 같이 임무를 수행하기가 힘들더군. 그게 전부야.”

다음 순간, 셀린느의 눈이 반짝 빛나며 입이 벌어졌다.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저는 어때요?”

“안 돼!”

레온하르트가 버럭 고함을 쳤지만 셀린느는 주눅 하나 들지 않고 당당히 그를 응시했다.

“왜 안 되나요? 제가 껄끄럽지는 않으실 거 아니에요.”

“그거야 그렇지만,”

“저, 생각보다 쓸모 있어요. 마물이 달려들면 불태워 버릴게요. 못 믿으시면 지금 보여 드릴 수도 있어요.”

“그런 게 아니라…….”

셀린느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알아요. 제가 죽을까 봐 그러시는 거죠?”

“……잘 아는군.”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지. 잠깐 농담한 걸로 알겠어.”

셀린느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다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한 신의 한 수를 내미는 덴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레온하르트, 제가 안 보이면 불안하죠?”

“……!”

레온하르트의 눈이 흔들렸다.

“오해 말아요. 악몽 때문인데, 레온하르트로선 어쩔 수 없죠.”

셀린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생각을 해 봤어요. 당신은 제 안위를 모르면 불안해할 수밖에 없어요. 즉, 임무 때문에 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요.”

레온하르트는 무어라 반박하러 입을 열었다. 셀린느는 싱긋 웃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레온하르트는 도저히 할 말이 없어 다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같이 가겠다는 거예요. 당신 마음의 평화를 위해.”

“……겨우 그걸 위해서?”

“뭐가 겨우 그거죠?”

셀린느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물과 흑마법사를 혼자 감당하는 것도 충분히 힘든 일이에요. 그런데 사흘간 잠 한숨 못 잘 정도로 힘든 짐을 계속 안고 가야만 하나요?”

“……난 상관없어. 언젠가는 이곳으로 돌아오니까.”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레온하르트, 제국은 넓고 흑마법사를 처치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당신뿐이에요. 한 달 동안 성을 떠나 있으면 한 달 내내 잠을 안 잘 건가요?”

레온하르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콱 조여 오는 듯했다.

“그건 그때 생각하면…….”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흔들리는 말에서 이미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만간 떠날 거잖아요. 사흘 동안 잠 한숨 못 잤다가 겨우 오늘 몇 시간 잤는데, 제 걱정에 또 밤새우시려고요?”

셀린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타샤가 그러더라고요. 마물 무리가 발견되었다고요. 혼자 갈 거죠?”

“……당장 내일 출발한다. 네 말에 따른다 해도 너무 일러.”

“흑마법사면 저도 가겠다고 안 해요. 마물이잖아요. 무려 악몽을 꾸면서도 저를 지켜 내셨던.”

레온하르트는 굳이 그가 셀린느를 지키는 데 실패했던 황도의 마물 무리를 상기시켜 주진 않았다.

그에게나 그녀에게나 괴로운 기억이었으므로.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다오.”

“알겠어요.”

수십여 분 후.

셀린느는 찻주전자의 차와 후식으로 나온 쿠키 역시 싹 비웠다.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좀 더 필요하세요? 생각할 시간?”

레온하르트는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토해 냈다.

“……알았다. 네 말대로 하지.”

셀린느는 방긋 웃었다. 이제 레온하르트는 그녀 때문에 멀쩡히 잘 수 있는 잠을 못 자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뭐죠?”

“아까, 생각보다 쓸모 있을 거라고 했지? 그걸 확인해야겠어.”

셀린느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뭘 보여 드리면 되죠? 속성만 얘기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마법을 보여 드릴 테니까.”

“아니.”

레온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더니, 라쉬르를 집어 들었다.

셀린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셀린느가 여태껏 들었던 목소리 중 가장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여기서 방어만 할 테니, 마음껏 공격해 봐.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서.”

셀린느의 등줄기를 소름이 타고 내달렸다.

“……괜찮겠어요? 방, 다 망가질 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셀린느는 숨을 들이켰다.

‘레온하르트는 내가 정말 죽지 않을 만한 힘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거야.’

셀린느는 눈을 잠시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곧 마력이 그녀의 온몸에 흘러넘쳤다.

“준비됐어요?”

“누가 할 소리.”

수 초 후.

대공자의 침실 밖에서 복도를 청소하던 하인이 갑작스레 느껴지는 열기와 굉음에 깜짝 놀라 양동이를 쏟았다.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전신에 느껴지는 마력은 모두 끌어다 썼다.

속성도 가리지 않았다.

빛, 물, 불, 바람…….

이 모든 마법을 그녀가 구현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레온하르트를 향해 퍼부었다.

칼은 항상 최소한도의 마력을 쓰는 훈련을 시켰기 때문에, 여태까지 이 정도 규모의 마력을 퍼부어 마법을 써 본 적은 없었다.

당연히 자기 같은 햇병아리 마법사의 마법에 레온하르트가 다치진 않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쓸 만하겠군.”

셀린느는 놀라 숨을 들이켰다.

레온하르트는 예상대로 조금 전, 테이블에서 일어나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셀린느를 놀라게 한 건 분명 어느 정도 난장판이 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던 방 안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쓴 마법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레온하르트의 손에 들린, 오늘따라 유난히 날이 번쩍이는 라쉬르만 있을 뿐.

레온하르트가 천천히 셀린느를 향해 다가왔다.

셀린느는 놀라 쿵쾅대는 심장을 다스렸다. 레온하르트가 대단한 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예상보다 더욱 대단하다고 지나치게 놀랄 필요는 없었다.

“이 정도면 마물에 찢겨 죽지는 않겠어.”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준비를 하러 갈까, 셀린느 루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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