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셀린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음에도.
분명 그녀의 것이 아닌 것처럼 뛰어대는 심장 때문이리라.
레온하르트 역시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그 자리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가만히 서 있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칼이 불쑥 나타나기 전까지.
레온하르트는 황급히 셀린느에게서 자신의 몸을 뗐다.
“두 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이셔서…….”
셀린느는 반색하며 칼에게 동의했다.
“그렇죠? 며칠 밤을 새우셨대요. 의사를 불러와야 하지 않을까요?”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의사가 나에게 해 줄 게 뭐가 있겠나. 잠이나 푹 자라고 하겠지.”
“알았어요.”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이곳의 의사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 처치를 안 받는 것보단 나을 터.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의사들을 이상할 정도로 싫어했다.
칼이 레온하르트에게 작은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이게 뭔가?”
“숙면을 도와주는 향초입니다. 마법과 관련된 건 아니고, 제 어머니가 자주 쓰시던 방법이죠.”
“고맙군.”
레온하르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칼에게서 향초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셋은 자연스레 중앙탑 안으로 함께 들어섰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곁에서 셀린느가 떨어지게 하지 않았으며, 칼은 셀린느의 곁에 졸졸 따라붙었다.
“셀린느 루테, 다음 수련은 다음 주에나 가능할 텐데 언제가 괜찮으시겠습니까?”
“칼 루테 시간에 맞출게요. 저야 한가하니까요.”
셀린느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레온하르트에게 웃으며 말했다.
“저, 실력이 많이 늘었거든요. 깜짝 놀라실 거예요.”
“저도 셀린느 루테가 단기간에 이렇게 늘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가?”
칼은 대공 후계자의 물음에 순식간에 보고할 태세를 취했다.
“셀린느 루테는 이제 불, 물, 바람, 빛을 다룰 수 있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어딜 가든 마법사 대우는 받습니다.”
“전부 레벨이 낮은 마법만 구사할 수 있지만요. 게다가 마력 조절이 너무 어려워요. 별거 아닌 거에 힘을 다 쏟아 버리거든요.”
셀린느가 들뜬 기색을 내보이며 재잘거렸다.
“그래도 기뻐요. 마력만 좀 있는 수준이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셋은 대공의 집무실 문 앞에 도착했고, 레온하르트는 그들을 뒤에 남겨 둔 채 안으로 들어섰다.
대공은 초췌해진 아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정보원들이 알려 줬겠지.’
레온하르트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숙부님의 영지는 이제 안전합니다. 조무래기더군요. 여기 잔재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흑마법사의 뼈를 담은 함을 대공에게 건네주었다.
“수고 많았다.”
대공은 인자하게 웃으며 책상 앞의 안락의자를 가리켰다. 그들은 잠시간 영지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로운 마물 무리가 셋이나 발견되었다. 다행히 우두머리가 변태하려면 아직 시간깨나 남은 무리들이야.”
“설마, 사냥을 나가셨습니까?”
“아니.”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발달은 덜 되었지만 규모는 엄청나. 내가 어떻게 해 볼 수준이 아니었다. 가는 데 한나절은 걸리기도 하고.”
“잘하셨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은 무모한 구석이 있었고, 레온하르트는 언젠가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참사로 치달을까 봐 두려웠다.
“알겠습니다.”
레온하르트의 대답에는 당연히 혼자 해결하겠다는 말이 함축되어 있었다.
북부는 황도와 달랐다. 레온하르트라는 천재의 존재는 다른 영지에는 필수인 마물 기사단이 북부엔 존재조차 하지 않게 만들었다.
“……내일까지는, 쉬거라.”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고, 자신의 체력이 한계치에 달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모레 새벽엔 출발해야겠군요.”
대공은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비비며 자신의 후계자를 바라보았다. 방금 흑마법사를 베고 돌아온 데다 잠을 며칠간 설친 나머지 사람 꼴이 아닌 후계자를.
하지만 타이밍을 놓쳐 우두머리가 변태하면 그때야말로 레온하르트는 힘들어진다.
게다가 그동안 레온하르트가 숨돌릴 틈 한번 없이 다른 임무로 직행한 적도 얼마나 많았던가.
내일 하루만이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알았다. 네 판단을 믿으마.”
“감사드립니다.”
레온하르트가 밖으로 나왔을 때, 셀린느와 칼은 마법에 대해 열을 올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유 모를 짜증이 레온하르트의 깊은 가슴속 치밀어 올랐다.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리 사흘간 선잠조차 자지 않았다 해도, 원인도 모를 감정이 불쑥 치솟는 건 자신의 정신력이 그만큼 약하다는 뜻이리라.
셀린느가 걱정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온하르트, 보고가 끝났으면 바로 가서 자는 게 낫지 않을까요? 봐요, 전 멀쩡하잖아요. 안심하세요.”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그러겠다는 대답을 기다렸지만, 레온하르트는 입술만 달싹거릴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
셀린느가 재차 묻자, 레온하르트는 침을 꿀꺽 삼키고 크게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겠나?”
“뭔데요? 불가능한 것만 아니면 뭐든 들어줄게요.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몇 개 없잖아요.”
셀린느는 농담조로 말했지만 사실이었다.
그녀가 레온하르트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정말 몇 가지 없었으며 그 어느 것 하나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미안하지만…….”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가 무슨 부탁을 하든 들어줄 수 있었다.
게다가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에게 해를 끼칠 부탁을 할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레온하르트는 잠시 움찔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부탁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잘 때까지만 옆에 있어 줄 순 없을까. 잠이 들면 바로 떠나 줘. 그냥, 잘 때까지만…….”
순간, 칼이 기겁하며 숨을 들이켰다.
레온하르트와 셀린느는 각기 다른 이유로 그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셀린느의 가슴 한편이 저릿해졌다.
혼자 흑마법사와 대적하고 돌아온 탓인지 레온하르트는 정신적으로 한계에 부딪힌 듯했다.
몸이 산산조각 나는 고통을 버텨 내야 했던 밤엔 셀린느의 도움을 거부했던 그가, 지금은 셀린느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것도 무척 미안해하며.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엄청 고민하며 말한다 했더니, 겨우 그거예요? 알았어요.”
“……고맙다.”
“어차피 여기 도착하기 전엔 같이 잤잖아요. 새삼스럽지도 않은데.”
둘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칼 루테를 내버려 두고 빠른 걸음으로 중앙탑을 빠져나갔다.
갑자기 셀린느가 별안간 한 방 먹은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아, 칼 루테!”
“왜 그 이름이 나오지?”
“아까 인사도 제대로 못 해서…… 이런, 스승님께 자꾸 결례를 범하게 되네요.”
“그 정도로 기분이 상한다면 칼 루테가 속 좁은 인간이라는 소리밖에 더 되나.”
레온하르트는 언짢게 대답했다. 스승님이라는 호칭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로 알게 된 지 얼마나 된다고, 그런 극존칭을 붙인단 말인가?
“그럴 수도 있죠, 뭐.”
셀린느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얘기했다.
“어쨌든 칼 루테는 정말 고마운 사람이에요. 아, 아시죠? 레온하르트도 칼 루테에게 고마워해야 하잖아요.”
“뭐?”
“몰랐어요?”
셀린느는 에밀 루테와의 첫 수업에 대해 자세히 들려 주었다.
“레온하르트가 겪지 않아도 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졌다.
셀린느의 마력이 폭주해서, 칼 루테가 해결했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그녀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 멍청이를 라쉬르로 조각냈어야 하는 건데.”
셀린느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잠을 며칠간 못 잔 게 타격이 컸는지 레온하르트는 평소보다 공격적이었다.
“그럴 필요까지야 있나요. 어차피 제 스승이라는 좋은 일자리도 잃었는데.”
“넌, 널 죽을 뻔하게 한 겁쟁이가 원망스럽지도 않나?”
“왜 원망해야 하죠?”
셀린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차피 죽지도 않았잖아요. 죽었어도 살아났을 테지만. 레온하르트가 저를 쫓아왔었을 때처럼요.”
“…….”
레온하르트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때의 일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대체 무슨 낯짝으로 에밀 루테를 원망하지 않느냐고 물었다는 말인가!
자신은 그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악질이었다.
“……정말, 미안하다.”
“뭐, 다 오해였잖아요.”
셀린느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요새 죽지 않는 것도 레온하르트 덕분이기도 하고. 신경 쓰지 말아요.”
둘은 레온하르트의 침실에 도착했다. 셀린느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한마디는 ‘삭막함’이었다.
거대하고 고풍스러운 가구 몇 개가 전부일 뿐, 웬만한 아파트 크기의 침실엔 그 흔한 장식품 하나 없었으며 카펫조차 깔려 있지 않았다.
“안 추워요, 여기?”
레온하르트는 혀를 깨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추울 것 같나? 그 생각을 못 했군. 어서 네가 여기 있을 채비를 하라고 해야겠어.”
“아니, 저야 여기서 매일 자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죠. 레온하르트가 춥지 않은지 묻는 거예요.”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듯했다.
“따뜻하면 침대에서 나오기 힘들지. 언제라도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니까.”
“……여태껏 제대로 자 본 적이 있긴 해요? 악몽 이전에도?”
“잠이야 늘 잤지.”
레온하르트가 뭔 황당한 소리를 하냐는 듯 대답했기에, 셀린느는 더는 물을 수 없었다.
그는 벨을 울려 시종을 불렀다. 시종은 휘둥그레한 눈으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셀린느 루테가 이곳에 잠시 계시다 갈 터이니, 화로와 담요, 무릎 덮개를 가져다 다오.”
시종이 물건들을 가지러 간 사이, 레온하르트는 잠시 드레스 룸으로 사라져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그의 몸을 시종일관 지배하던 긴장이 순식간에 사라져 있었다.
셀린느는 살짝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동안 레온하르트와 함께 보낸 밤은 항상 그가 경계 태세로 보초를 섰다. 이렇게 무방비하게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침대 옆으로 안락의자를 끌어다 놓았다.
“잘 자요.”
“……미안하군.”
레온하르트는 잠꼬대처럼 들리는 한마디를 중얼거리며 바로 정신을 잃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짙은 다크서클은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셀린느에게 알려 주었다.
그녀는 안쓰러운 시선으로 레온하르트를 내려다보았다.
‘잠이라도 편히 잘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단순히 자신이 죽지만 않으면 레온하르트는 잠만큼은 편안히 잘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어쩌지…….’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레온하르트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나지막하게 신음했다.
“셀린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