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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15화 (15/120)

15화.

순간, 흑마법사의 사념이 그를 덮쳤다.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에게 정신적인 공격을 시도한 흑마법사는 이자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소롭게 볼 수준도 아니었다.

라쉬르에서 푸른 불꽃이 튀며 번개처럼 지직거렸다. 레온하르트는 라쉬르에 정신을 집중했다.

생각이 없는 무기질은 사념을 몰아내고 그가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레온하르트는 인간보다는 검 한 자루에 가까운 태세로 흑마법사를 찾아냈다.

아니, 흑마법사가 레온하르트를 찾아낸 것에 가까웠다.

사방에서 직격한다면 몸을 꿰뚫을 얼음 창들이 수십 개씩 떨어졌고, 발밑에선 시시각각 그를 겨냥한 용암이 솟구쳤다.

레온하르트는 오직 감각 하나로 그 모든 위험들을 피했다. 라쉬르에는 얼음 하나, 불꽃 하나 튀지 않았다.

‘조무래기군. 아직 침식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이유가 있었어.’

그가 여태껏 봐 왔던 흑마법사는 민가까지 금세 침식해 사람들을 자신의 말에 따르는 꼭두각시나 기력을 모두 빨려 땅에서 꿈틀대는 몸뚱이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자는 아직 겨우 숲 하나를 자신 것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레온하르트의 예상대로 흑마법사의 공격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모든 공격이 사그라들자, 레온하르트의 시야에는 가쁜 숨을 내쉬는 흑마법사가 들어왔다.

“겨우 이 정도로 지쳤다니, 내가 올 필요도 없었던 것 같군.”

“……하! 네가 와서 다행이지.”

흑마법사의 목소리는 그의 입이 아닌 레온하르트의 바로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움켜잡고 흑마법사를 단칼에 벨 태세를 갖추었다.

그때, 발밑에서 거대한 바위가 그의 전신을 치고 올라왔다.

“허억!”

레온하르트는 신음을 뱉었다. 라쉬르를 놓치지는 않았지만 순간 허공으로 튕겨졌다가 땅덩어리에 내동댕이쳐진 충격은 상당했다.

“……!”

사방에서 불쾌한 마력이 꿈틀대는 게 느껴졌다.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포물선으로 휘둘러 생성 중인 결계를 깼다.

-휙!

결계가 깨짐과 동시에 볼품없는 창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레온하르트는 바로 라쉬르를 이용해 창을 쳐 냈다.

-챙!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창은 마치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그를 공격했다. 몇 년 만에 보는 술수였다.

‘젠장!’

골치가 아파 왔다. 그는 이 창을 파괴해야만 했다.

하지만 파괴한다면…… 황도 인근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창을 움직이는 구심인 마물의 핵이 터져 나와 수백 마리의 마물이 그를 뒤덮을 것이다.

그것들을 처리하는 것들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사이에 저놈이 도망치겠지.’

하루라도 빨리 셀린느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레온하르트는 두 손을 모으고 정신을 집중하는 흑마법사를 노려보았다.

흑마법사의 터전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더 허비할 시간은 없었다.

그가 무모하게 자신을 잡으러 와 준 바로 이 기회에 끝내야 한다.

-챙!

레온하르트는 창을 파괴할 만한 일격은 가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창은 때로는 머리 위를, 때로는 옆구리를, 때로는 복부를 노려 왔으며 레온하르트는 그 공격들을 가볍게 막아 냈다. 그러면서 그는 천천히 흑마법사를 향해 전진했다.

‘……윽.’

또다시 강력한 결계가 느껴졌다.

레온하르트는 혀를 잘근 씹었다.

이 흑마법사의 패턴은 읽기 쉬웠으나 강력했고, 사람을 피할 수 없는 함정에 몰아넣었다.

“까짓것, 해 주마.”

레온하르트는 결계를 다시 깼다.

-챙!

창은 두 개가 되었다.

레온하르트가 흑마법사에 가까이 다가갔을 땐 결계를 열 개를 깬 상태였고, 열 개의 창은 사방에서 그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이제 라쉬르로 창들을 쳐 내려 하지 않았다. 오직 온몸을 잽싸게 놀려 창을 아슬아슬하게 비켜 나가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흑마법사를 향해 전진하며.

레온하르트는 반쯤 무아지경 상태로 라쉬르를 들어 올렸다. 창 몇 개가 라쉬르에 부딪쳐 튕겨 나갔다.

흑마법사의 눈이 번쩍 떠졌다.

둘의 눈이 마주친 그 찰나, 레온하르트는 흑마법사의 심장을 향해 라쉬르를 꽂아 넣었으며 흑마법사는 레온하르트의 가슴을 부여잡았다.

“하, 하, 하, 하…….”

흑마법사는 라쉬르에 꿰뚫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

레온하르트는 놀라지 않았다.

흑마법사는 인간이라기보단 욕망 그 자체에 가까웠다. 그들은 심장이 파괴되고 나서도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을 이성을 잠시간 유지할 수 있었다.

“약해졌구나, 늑대여.”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집어넣었다.

이자들이 무어라 지껄이든 그는 무표정한 상태로 그들의 소멸을 바라보았다.

“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군.”

“…….”

흑마법사는 검은 피를 토해 내며 킬킬 웃었다.

“나는 힘이 미약해 사라지지만 내 동족들은 다르지…… 네 파멸도 멀지 않았다!”

흑마법사는 단말마를 마지막으로 순식간에 전신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떨어져 나가고 살덩이가 녹아 나가는 광경은 끔찍했지만, 레온하르트에겐 열다섯부터 봐 온 당연한 결과에 불과했다.

그는 바닥에 남은 백골을 그러모았다.

아직 인간의 골격을 유지한 걸 보니 흑마법사가 된 지 십 년이 채 되지 않은 애송이인 모양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철제 함에 백골을 담고, 말이 기다리는 숲 밖으로 걸어 나갔다.

“……멍청한 말 같으니.”

마물과 흑마법사의 사악한 기운에 익숙해진 레온하르트의 애마, 블랙과 달리 백작가의 평범한 말은 놀라 달아나고 말았다.

레온하르트는 네 시간을 꼬박 걸은 뒤에야 오리온 백작의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신이 욱신거렸지만 한시라도 빨리 베르누이성으로 돌아가고 싶었기에 날래게 걸음을 옮겼다.

집사의 보고를 받고 당황한 표정의 오리온 백작이 달려 나왔을 땐, 이미 해 질 녘이 되어 하늘엔 남빛이 깔린 뒤였다.

“레온하르트, 왜 이렇게 늦었…… 레온하르트!”

“허억, 제 말을, 내, 주십시오.”

레온하르트는 가쁜 숨을 내쉬며 자신의 말을 요구했다. 하지만 오리온 백작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상태로 돌아가겠다는 말인가? 맙소사, 자네 어머니께 내가 무슨 말을 듣게 하려고…… 오늘 하룻밤은 성에서 쉬게.”

“안 됩니다.”

“왜 안 되지?”

레온하르트의 말문이 턱 막혔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그 정도로 이곳에 머물기가 싫은가?”

“아닙니다. 단지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오리온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하지만 자네의 불쌍한 말은 좀 더 휴식이 필요해 보이네. 다른 말을 내줄 테니 그걸 타고 돌아가게.”

“…….”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애마인 블랙을 대신할 수 있는 말은 그 무엇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동이 트자마자 떠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오리온 백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누이는 상당히 무서웠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을 잘못 대우했다 싶으면 백작령에 압박을 가해 올 것이다.

“대공자께서 오늘 밤 머무신다!”

잠시 후, 레온하르트는 성에서 가장 호화로운 침실로 안내받았다.

그는 쟁반을 집어삼킬 기세로 식사한 후 침대에 지친 몸을 뉘었다.

천장의 쓸데없이 화려한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금발에 청회색 눈을 가진 미의 여신이 자신의 아이를 쓰다듬는 벽화가…….

순간, 벽화를 닮은 여인이 방긋 웃는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빌어먹을.’

성에서 떠난 지 겨우 이틀.

그동안 셀린느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늘, 죽지 않았겠지.”

레온하르트는 벽화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생각만 해도 심장이 달음박질했다.

그 가능성을 확인할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온다는 사실도 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레온하르트는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셀린느의 안위를 지금 당장 확인하고 싶고, 끌어안아 박동하는 심장과 따뜻한 체온을 확인해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싶었다.

‘이런 면에선 약해진 게 맞는군.’

그는 쓴웃음을 흘렸다.

흑마법사가 그에게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몰라도 레온하르트는 더는 예전의 날 서게 벼려진 칼이 아니었다.

셀린느 헌트를 만난 지 겨우 일주일 남짓 지났는데도!

하지만 왜인지, 그의 냉철한 이성조차도 그가 셀린느 헌트를 끊어 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말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레온하르트는 매일 밤 푹 잘 거예요. 그럼 제가 안전하게 잘 지낸다는 사실을 밤으로 확인하는 셈이죠.>

하지만, 그는 셀린느의 말에 따를 수 없었다.

강제적인 수마가 그를 덮치는 것 자체가 셀린느의 죽음을 의미했기에 눈을 감는 것 자체가 불안했다.

레온하르트는 밤 내내 천장의 벽화를 바라보며 잠을 강제로 쫓았다. 사실, 긴장으로 쿵쾅대는 심장 탓에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마침내 태양이 장밋빛으로 하늘을 물들이며 떠올랐고, 레온하르트의 가슴에 희열이 차올랐다.

셀린느는 무사했다!

***

베르누이성으로 돌아온 레온하르트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셀린느였다.

그녀는 성탑 꼭대기에서 성의 정문을 응시한 채 수련하고 있었고, 꼭대기 층에선 밤톨만 한 크기로 보이는 기진맥진한 말 한 마리와 위풍당당한 기수를 바로 알아보았다.

“레온하르트!”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향해 달려 나오는 인영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의 눈은 번쩍 뜨였으며 귀는 셀린느가 하는 말을 듣기 위해 트였고 팔은 셀린느가 내민 두 손을 맞잡기 위해 뻗어졌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 그동안 자신은 레온하르트에게 피해가 될까 싶어 물조차 조심히 마셨다. 그래서인지 죽음은커녕 상처 하나 입은 적 없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핏발이 역력한 눈과 짙은 다크서클, 거칠어진 피부는 그가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설마, 악몽 꾼 거예요? 제가 죽는? 저, 멀쩡했어요. 안 죽었다고요……. 제가 죽는 걸 보셨다면 흑마법사 술수예요!”

레온하르트는 당황해서 말을 쏟아 내는 셀린느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지난 며칠간 그렇게 그리웠던 온기가 느껴졌다.

“걱정이 되어서, 잘 수가 없었다.”

“……뭐라고요?”

레온하르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셀린느가 온전히 자신 앞에 있다는 걸 확인하려는 듯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의 입에서 알아듣기 힘든 횡설수설이 흘러나왔다.

“네가…… 네가 무사하지 않으면, 잠이 강제로 쏟아질 테니까. 네가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느라…… 한숨도 잘 수가 없었어.”

순간, 셀린느의 가슴속에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서로 뒤섞여 꿈틀댔다.

분노, 당황, 슬픔, 연민, 그리고…….

그 모든 감정에 셀린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레온하르트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나?”

“네?”

셀린느는 자신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댄 다음에야 물기가 서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나 때문에 울 것 없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레온하르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셀린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를 원망하는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제가 숙면으로 확인하라고 했잖아요! 제가 무사한지 아닌지는!”

“……깨어날 때까지 확인할 수가 없으니까. 그걸 견딜 수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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