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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14화 (14/120)

14화.

“네, 네!”

셀린느는 익사하다 구명보트를 발견한 사람처럼 황급히 대답했다. 칼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럼 대공 각하께 말씀드려야겠군요. 임무를 조절한다면 당신을 가르칠 짬은 날 겁니다.”

칼이 대체 대공에게 무어라 보고했는지 셀린느는 알 수 없었지만, 하루 만에 성내가 그녀에 대한 얘기로 들썩였다.

“셀린느! 들었어, 그 애늙은이는 감당도 못 할 마력이라며!”

나타샤가 그녀의 두 손을 붙잡고 한 바퀴 돌았다.

“레온하르트의 꿈에 왜 자꾸 나타나는가 싶었는데, 대단한 사람들끼리 뭔가 연결되었나 봐. 안 그래?”

셀린느는 나타샤의 공상에 웃고 말았다.

“그럴 리가요. 마력이 뛰어난 마법사가 저 혼자일 리도 없고.”

“그건 그렇네. 어쨌든, 진짜 축하해!”

나타샤는 그녀를 꽉 껴안았고, 붉은 머리가 셀린느의 전신을 간질였다.

“좀 익숙해지면 나한테도 마법 보여 줘야 해, 알겠지? 칼 루테는 마법은 임무에 쓰는 거로 충분하다고 절대 안 보여 준단 말이야.”

“그럼요.”

나타샤의 두 눈은 선망과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아가씨, 칼 루테께서 부르십니다.”

“나, 구경해도 돼?”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과 같은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웠다.

“오늘 첫 수업이니, 좀 위험할 것 같아요. 안정되면 초대할 테니 와 주세요.”

“알았어. 잘 다녀와!”

셀린느는 초조한 심정으로 엘의 안내에 따랐다. 다시 탑 꼭대기로 갈 거라는 생각과 달리, 엘은 도리어 그녀를 지하로 안내했다.

의자 하나 없이 텅 빈 지하실에서 등불 하나를 든 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네.”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얘기해 주십시오.”

“알겠어요.”

셀린느는 가슴이 다시 쿵쾅거리는 걸 느꼈다. 처음, 마력석을 만졌을 때의 마력은 황홀했지만 두 번째로 느꼈던 마력은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겁에 질리셨군요.”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지만, 두려움은 마력이 저희의 제어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고삐 풀린 마력의 위험성은 겪어 보셨으니 아실 테고.”

셀린느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셀린느 루테 본인의 힘입니다. 자신의 팔이나 다리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똑같이 생각하십시오.”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셀린느는 자신에게 갑자기 손이 하나 더 돋아난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자신의 목을 졸라 버리는 손이.

“알겠습니다. 시작하죠.”

칼은 바로 등불을 껐다. 캄캄한 어둠이 그들을 내리눌렀다.

“주위를 관찰하십시오.”

“칼 루테, 눈을 안 감아도 되나요?”

셀린느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 인간의 지시는 잊어버리십시오.”

셀린느는 칼의 말에 따랐다.

그녀는 어둠 자체를 관찰했고, 아무리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도 이곳에서 불 없이 보이는 건 어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오로지 적막뿐.

“뭘 관찰하셨습니까?”

“여긴 정말…… 아무것도 없네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오직 어둠뿐.”

칼이 흡족해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이제,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보십시오.”

“뭘요?”

“다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건 불이 되겠지요.”

불.

셀린느의 전신이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그녀의 반응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칼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여긴 제가 있지 않습니까. 만약 잘못되면 제가 바로 해결하겠습니다.”

셀린느의 심장은 다시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어서요!”

칼이 재촉했다.

셀린느는 천천히 마력을 느끼려 노력했다. 이미 두 번이나 휩쓸려서 그런지 어렵지 않게 마력이 그녀의 몸에 차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셀린느의 머릿속에 다시금 떠오른 건, 라쉬르의 검날에서 타오르는 불이었다.

순간, 지하실 전체가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셀린느는 홀린 듯 지하실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환해 어디가 광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하…….”

칼의 놀라움에 겨운 감탄사가 들려왔다.

“이런 거였군요. 그 인간이 꽁무니를 내뺀 이유를 알겠습니다.”

셀린느는 열기에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저, 지금 괜찮은 건가요? 뜨, 뜨거운데…….”

“셀린느 루테, 이 열기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기만 하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합니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걸 거두어 보십시오.”

“어, 어떻게요?”

“쉽습니다. 다시 캄캄한 어둠을 떠올리십시오. 금방 될 겁니다.”

칼의 말이 맞았다.

셀린느가 조금 전 어두웠던 지하실을 떠올리자마자 푸른빛은 온데간데없고 어둠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이제 이걸 반복하시면 됩니다. 도저히 못 하겠다 싶을 때까지.”

셀린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쉽진 않을 겁니다.”

칼의 가르침은 대부분 옳았으나 그 말만큼은 틀린 말이었다.

쉬웠다!

***

셀린느가 기진맥진해져 바닥에 주저앉았을 땐, 이미 214번 반복한 뒤였다.

“세상에…….”

여태껏 숫자를 세었던 칼은 기가 질린 듯했다.

“마력량만큼은 여태껏 제가 보았던 마법사 중 손가락 안에 드시는군요.”

“저, 정말인가요?”

“저도 150번이 넘으면 힘겹습니다.”

“…….”

셀린느는 놀라 눈을 깜박였다가, 자신이 이곳에 있는 근본적인 원인을 자각했다.

“이제, 전 뭘 하면 되나요?”

“보십시오, 보통 마법사들은 그 정도 했으면 돌아가서 잘 생각밖에 없습니다.”

“잘 거예요. 저 혼자 어떻게 연습해야 하는지만 알려 주시면요.”

“반복하시면 됩니다. 딱 등불 하나 정도 밝기의 불꽃만 만드는 연습을 하십시오. 더 크게도, 더 작게도 안 됩니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칼은 지하실 문을 열었고,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엘이 반쯤 쓰러지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칼은 바로 다음 날 베르누이성을 떠났다. 셀린느는 하루 종일 지하실에 틀어박혀 연습했다.

작은 등불 정도 밝기의 불꽃만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작게 만들려 해도 순식간에 불이 사방에서 타올랐다.

이제 그것들을 끄는 방법은 안다는 게 다행이었다.

-쾅! 쾅! 쾅!

셀린느는 누군가가 큰 소리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문가로 달려갔다.

엘이 곤란한 표정으로 빼꼼 열린 문틈 사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놀래켜서 죄송합니다. 작게 두드리니 아무 반응이 없으셔서…….”

“아니에요. 무슨 일 있나요?”

“내가 부탁했어.”

레온하르트의 잘생긴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 며칠 동안 마법에 정신이 팔려 그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힘들어 보이군.”

“아니에요.”

셀린느는 방긋 웃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인걸요.”

“내가 방해한 건 아니겠지?”

“잠깐 쉴 시간은 저도 필요해요.”

셀린느는 바로 지하실의 불을 끄고 밖으로 완전히 나왔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셀린느의 눈이 번쩍 떠졌다. 상자 안엔 너무 예뻐서 먹기가 아까워 보이는 색색깔의 사탕이 담겨 있었다.

“이때쯤 단게 끌릴 것 같아서.”

“정말 고마워요!”

레온하르트는 함박웃음을 짓는 셀린느를 물끄러미 바라보였다.

셀린느는 사탕의 황홀한 단맛을 음미하면서도 레온하르트의 얼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근심이 어려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무슨 걱정 있어요?”

“……마법사가 아니라, 독심술사가 된 건가?”

“얼굴에 다 쓰여 있는걸요.”

레온하르트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흑마법사를 처리하러 떠나게 되었어. 사흘은 걸릴 거야. 길면 일주일도 걸릴 수 있고.”

“아…….”

셀린느의 표정이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레온하르트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곧 네 호위 시녀들이 도착할 테고 지금도 나 없이도 잘 지내지 않나.”

레온하르트는 한마디를 빠트렸지만, 엘을 포함한 셋 모두가 그 말뜻을 이해했다.

‘죽지 않고.’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알겠어요. 안 죽게 조심할 테니 레온하르트도 조심해서 다녀와요.”

레온하르트는 억지웃음을 짓다, 오직 그녀에게만 들릴락 말락 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밤이 두려워.”

“네?”

“떠나면 네 안위를 알 수 없지. 밤이 진실을 알려 줄 테니…….”

레온하르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강직한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떨리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하세요.”

조용한 셀린느의 목소리가 지하 복도에 울려 퍼졌다.

“레온하르트는 매일 밤 푹 잘 거예요. 그럼 제가 안전하게 잘 지낸다는 사실을 밤으로 확인하는 셈이죠.”

레온하르트는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눈앞의 셀린느를 품속에 가두는 것.

“……!”

셀린느는 조금 놀란 듯했으나, 곧바로 긴장을 풀고 레온하르트를 같이 안아 주었다.

잠시 후 레온하르트는 안정을 되찾고 셀린느의 귓가에 한마디 속삭일 힘을 얻었다.

“부디, 무사하도록.”

“약속할게요.”

셀린느가 레온하르트의 품속에서 중얼거렸다.

***

레온하르트는 전속력으로 말을 달렸다.

그의 애마, 블랙은 지난 일주일간 셀린느를 태우고 가벼운 도보만 한 덕에 초반에 조금 버거워했지만, 금세 적응했다.

레온하르트는 머릿속에 자꾸 떠오르는 가냘픈 여자의 형상을 무시하려 노력했다.

‘집중해라, 레온하르트.’

한시라도 빨리 베르누이성으로 돌아가려면 흑마법사를 신속히 처치해야 한다.

레온하르트는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꼬박 달린 끝에 흑마법사에 큰 피해를 받고 있는 오리온 백작령에 도달했다.

“레온하르트!”

“숙부님.”

레온하르트는 대공비의 동생인 오리온 백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리온 백작은 초조한 표정으로 손을 비볐다.

“와 줘서 고맙네. 부모님께선 안녕하신가?”

“예.”

레온하르트는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없습니다. 제 말은 지쳤으니, 가장 빠르고 영리한 말을 한 마리 내주십시오.”

오리온 백작은 그 흔한 걱정 한마디 하지 않고 바로 시종을 불러 말을 내주라 명했다.

레온하르트는 새로운 말 위로 뛰어올랐다.

“이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흑마법사의 불쾌한 기운이 그를 인도했다.

마물들은 오직 살육과 파괴만이 머릿속에 각인된 짐승에 불과했다.

하지만 흑마법사는…… 어둠 속에 삼켜진 별이었다.

한때는 찬란하게 빛났던.

레온하르트는 몇 년 전, 자신이 멀리 떨어진 곳의 흑마법사를 처치하느라 늦어 통째로 흑마법사에 침식되고 만 르누아성을 기억했다.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사람들은 기력이 다 빼앗긴 채, 의식만 남아 있는 상태로 바닥에서 미약하게 버둥거렸다.

그 무엇도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여기군.’

분명 하늘에 태양이 밝게 빛나는 대낮이었음에도 어둠이 안개처럼 숲에 넘실거렸다.

레온하르트는 말에서 내린 다음, 라쉬르를 빼내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었다,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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