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미리암이 든 궤짝에는 보석이 한가득 들어 있었고, 엘이 든 궤짝에는 금화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이건 직접 여는 게 좋을 거야.”
나타샤는 아리아의 손에서 가장 화려하게 세공된 궤짝을 건네받아 셀린느에게 건넸다.
무엇이 들어 있을지 충분히 짐작 가능했으므로, 궤짝을 여는 셀린느의 손은 살짝 떨렸다.
딸깍.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보라…….
무지개색의 마력석들이 빛을 내뿜어 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셀린느는 문득 어지러워 궤짝을 바로 닫아 버렸다. 나타샤의 기대감 가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셀린느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이 말을 지금 하는 게 올바른 선택인지 알 수 없었지만, 미룬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셀린느는 나타샤를 향해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전, 대공 각하의 마법사가 될 수 없어요.”
“……고개 들어, 셀린느.”
셀린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레온하르트와 똑같은 사파이어 눈이 자신을 날카롭게 직시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그냥 선물이야. 우리 가문의 마법사가 되라는 건 아니야, 셀린느.”
“하지만…….”
“생각해 봐. 코르셋 입었다고 죽는 사람에게, 어떻게 위험한 임무를 맡으라고 할 수 있겠어?”
마법사라면 가능하죠.
셀린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법.
[셀린느의 악몽] 유저들 사이에서 칼 뷔일란트의 별명은 만능 키였다.
분명 주인공이 죽고도 남았을 상황에서 구해 주며, 다 죽어 가는 주인공을 살려 낸다. 그로도 모자라 난관을 돌파하는 키 아이템을 주기까지.
게임 내에서 칼의 전지전능함은 그가 강력한 마법사이기 때문이라고 묘사되었다.
당연히 자신도 그의 절반 수준으로나마 강력해질 수 있다면 죽으려야 죽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진엔딩으로 가는 분기가 칼과의 이른 만남이었지.’
칼은 본디 본게임이 진행되고도 한참 후에야 처음으로 등장하지만, 공략을 따르면 본게임 초기에 칼을 만날 수 있었다.
셀린느는 스포일러를 정말 싫어했기에 딱 그 부분까지만 공략을 보고, 그 뒤는 알아서 플레이하기로 했다.
허탈과 후회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진짜 왜 그랬나 나…….’
셀린느는 이마를 짚다가 나타샤가 자신 코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바르게 세웠다.
사실 그녀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선물을 거부한다면 대공 일가의 호의를 거절하게 되는 것이고,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는 그녀의 입장 자체가 난처해진다.
선물을 받아들인다면……그녀는 언젠가는 대공가의 마법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셀린느는 궤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것들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자신은 계속 대공가에 몸을 의탁해야 하고, 대공의 지원을 받아 마법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뇌리를 스친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타샤에게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제가 지나친 걱정을 했군요. 감사드립니다.”
“셀린느.”
나타샤는 셀린느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내가 셀린느를 본 지 며칠 안 됐지만, 참 걱정이 많아. 그럴 필요 없다니까?”
나타샤는 셀린느를 일으켜 세웠다.
“어서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를 뵈러 가자. 네가 정신을 차리면 바로 오라고 하셨어.”
곧바로 호위 시녀들이 그녀에게서 물에 젖은 옷들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반쯤 멍한 상태로 그들의 인도를 따랐다. 그녀의 머릿속은 오직 대공의 앞에서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고, 셀린느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대공과 단둘이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네.”
대공은 부드러운 말투로 대화를 시작했다.
“가문의 손님인 자네가 마법사라는 게 밝혀졌으니 환영할 만한 일이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직 해 준 것도 없는데, 뭘 그러나.”
대공은 살짝 웃더니, 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으로 그녀에게 양피지를 한 장 내밀었다.
“……!”
셀린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증서였다.
그녀가 북부의 손님이며, 북부와 우호 관계에 있는 영지라면 어디서든 환대를 받아야 함을 알리는 증서.
“레온하르트의 생각이네.”
셀린느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자네는 내 마법사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압박감에 시달릴 것이라고 하더군.”
“…….”
“자네는 이게 있으니 어디든 갈 수 있어. 마법사는 어디서든 환대받으니 안전할 것이고. 이제 여기에 머물지, 떠날지는 전적으로 자네의 손에 달려 있네.”
“……정, 정말…….”
셀린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베르누이성을 떠나면 레온하르트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레온하르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되네.”
“아뇨.”
셀린느의 목소리는 더는 떨리지 않았다.
“각하만 괜찮으시다면, 전 북부에 머물고 싶습니다.”
잠시 후, 셀린느는 대공의 집무실 문을 조심스레 닫고 밖으로 나왔다.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날렵하고 거대한, 그녀에게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익숙한 남자가.
“설마, 여기서 계속 기다렸어요?”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셀린느의 손에 들린 양피지 두루마리에 시선을 두었다.
“아, 들었어요. 레온하르트의 생각이라면서요.”
“……결정했나.”
셀린느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저, 남으려고요.”
레온하르트는 무심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흠칫하며 거두었다.
“잘 생각해. 후회할 수도 있어.”
셀린느의 생각은 오리무중에 빠져들었다.
증서는 단지 그녀에게 선택권을 쥐여 주기 위한 레온하르트의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는 오히려 그녀가 북부를 떠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셀린느의 눈이 천천히 레온하르트의 눈과 마주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살짝 돌렸지만, 따라붙는 셀린느의 시선에 굴복하고 말았다.
“제가 떠나시길 원하세요?”
“……그건 아니야.”
레온하르트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단지…… 네가 쓸데없는 부담감을 느낄까 싶어 걱정스럽다.”
“당연히 느끼죠! 왜 제가 안 느끼겠어요?”
셀린느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곳에 있기를 원하는 감정이 더 크니까 남아 있으려는 거라고요!”
“정말인가?”
“네.”
셀린느는 다시 차분해진 말투로 레온하르트를 안심시켰다.
레온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가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한 가문의 루테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머무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았다.
“그럼…… 다행이군.”
셀린느는 가슴속에 남아 있는 의문을 꺼냈다.
“제가 떠나면 계속 악몽을 꿀지도 몰라 불안하실 거잖아요.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셨어요?”
“같이 가려고 했다.”
“네?”
셀린느는 입을 벌린 채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저…… 제가 알기론…….”
레온하르트는 아주 작게 미소 지었다.
“북부의 후계자로서 너무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할 건가? 하지만 그 증서로 갈 수 있는 영지는 전부 북부 인근이지. 내 소임을 다하면서 널 충분히 지킬 수 있어.”
“대공 각하도 아시나요?”
“아니.”
레온하르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만약 아셨으면 결사반대하셨을 테니까.”
셀린느는 할 말을 잃고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방금 그의 말은 단순한 농이 아니었다.
“제가 남아서 다행이군요. 모두를 위해서.”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언제라도 떠나고 싶으면 말해. 같이 갈 테니.”
***
셀린느의 스승이 될 마법사는 이틀 만에 성에 도착했다.
자신을 단순히 ‘에밀’이라고 소개한 마법사는 주름살 없는 피부에 백발이 성성해 도저히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다.
그들의 첫 훈련은 재앙이었다.
“아악!”
셀린느는 에밀의 비명 소리에 어리둥절하며 눈을 떴다. 자신은 분명 에밀이 시키는 대로 했다.
눈을 꼭 감은 채 전신에 흘러넘치는 마력을 느끼며 작은 불꽃을 만들었다.
라쉬르의 검날에 화르르 타오르는, 푸른 불꽃을 떠올리며…….
하지만 눈을 떴을 때, 그녀가 상상했던 불꽃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운 여름날 아스팔트 도로 위 아지랑이처럼 공간 전체를 뒤덮는 열기 어린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에밀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그는 자신의 백발을 쥐어뜯으며 무어라 알 수 없는 단어만 중얼거렸다.
셀린느는 기겁해 자신이 일으킨 게 무엇이든 거두려 했으나 열기만 더욱 강해질 뿐이었다.
“에밀 루테! 정신 차려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에밀은 허겁지겁 성탑 꼭대기에서 내려가는 문으로 달려갔다.
셀린느는 절망 어린 비명을 내질렀지만, 에밀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일으킨 열기에 서서히 질식해갔다.
셀린느는 직감했다. 자신은 죽어 가고 있다.
“셀린느 루테!”
낯설지만, 아주 낯설지는 않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죽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열기는 사라졌고 싸늘한 겨울바람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셀린느는 자신이 차가운 돌바닥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칼 뷔일란트의 따스한 초록색 눈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마력이 느껴져 찾아왔더니……큰일 날 뻔했습니다. 저런 멍청이가 어떻게 셀린느 루테를 지도하겠다고……!”
칼은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며 셀린느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아, 아뇨.”
셀린느는 가쁘게 찬 공기를 들이쉬다, 머리가 어질어질해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 고마워요.”
칼은 코웃음 쳤다.
“제게 고마워해야 할 인간은 셀린느 루테를 내버리고 도망친 놈입니다. 당신이 잘못되었다면 목이 달아났을 테니.”
“대체 뭐였죠? 제가 뭔가 실수를…….”
“아닙니다.”
칼은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으로 마법을 시도한 마법사들에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저 바보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뿐.”
칼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니면 당신을 과소평가했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과, 과소평가요?”
“잘 들으십시오.”
셀린느는 돌바닥에 손을 짚으며 일어났다. 칼의 목소리엔 방금 죽을 뻔한 사람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셀린느 루테, 당신이 접촉한 마력석은 최상등품입니다. 그 마력을 모두 흡수하고도 별다른 부작용이 없었다는 건 당신의 잠재력이.”
칼은 표현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사람처럼 잠시 머뭇거렸다.
“그만큼…… 대단하다는 겁니다.”
“…….”
셀린느는 어안이 벙벙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가슴은 죽음 목전까지 간 충격 때문에 달음박질했고, 자신의 잠재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안겨다 주었다.
“위험하군요. 전.”
“맞습니다.”
예의상으로나마 부정해 줄 법도 했지만, 칼은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엔 걱정과 기대가 교차한 표정이 떠올랐다.
“셀린느 루테, 그때 가능하지 않다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제가 당신의 지도를 맡아도 괜찮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