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크고 단단한 손 위에 올려진 마력석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예쁘다……!”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붉은 마력석은 그녀가 실제로 보았던 루비나 산호, 가넷보다도 아름다웠다.
그의 말대로 보석만큼 아름다웠고, 보석보다도 더욱 반짝였다.
셀린느는 홀린 듯 마력석을 손 위에 올려다보았다. 체온 때문인지 마력석은 본디 감추고 있었던 영롱함이 차차 풀리기라도 한 듯 더욱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셀린느는 붉은빛을 보며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빙긋 웃다가 레온하르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왜 저러지?’
이유 모를 소름이 돋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창백해진 레온하르트가 얼어붙은 채 마력석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셀린느의 의문은 그녀가 레온하르트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가자마자 풀렸다.
작은 마력석은 형광등 수십 개가 한 번에 켜진 것처럼 밝은 빛을 토해 내며 방 안을 붉은빛으로 꽉 채웠다.
놀란 셀린느는 마력석을 함에 다시 집어넣었다.
아니, 집어넣으려고 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손 위에 있었던 마력석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걸 알기 전까진.
“셀린느.”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불렀다.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온통 붉은빛으로 가득할 뿐,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셀린느!”
“안…… 안 보여요. 아무것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셀린느의 머릿속에 피가 식는 생각이 떠올랐다.
‘또 죽는구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의식이 가물거리지도 않았다.
오직 빛과 열기만이 느껴질 뿐.
“난 여기 있어.”
갑자기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들려왔다. 셀린느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손을 잡아 오는 레온하르트의 손이 느껴졌다.
“당황하지 마.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니라니요!”
별안간 배 속이 간질간질하니 웃고 싶은 충동이 들어, 셀린느는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그때, 레온하르트의 이상하리만큼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걸어.”
“네?”
“걸으라고. 이쪽으로.”
셀린느는 더는 묻지 않고 레온하르트의 말에 따랐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그녀를 어딘지 모를 방향으로 잡아당겼고, 셀린느는 오직 그에게 의지한 채 몸을 옮겼다.
걸으면 걸을수록 붉은빛이 조금씩 사그라들었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보였다.
“뭐……뭐죠?”
셀린느는 얼떨떨하게 물었다. 이런 이벤트는 게임에서 겪은 적조차 없다.
마력석은 아이템을 살 수 있는 화폐 단위였고, 게임상 플레이어가 그걸 손에 넣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부드럽게 대답했지만,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축하해. 마법사의 소질이 있는 모양이야.”
“네……?”
셀린느는 어안이 벙벙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가 꿈틀거리는 잔상에 놀라 눈을 감았다.
“어지러워요.”
“그럴 거야.”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마물의 뿔로 만든 최상등품 마력석을 한 번에 흡수했으니.”
“저, 또 죽는 건 아니겠죠?”
셀린느는 자신의 가슴을 조여 오는 추측을 털어놓았다.
“내가 알기론 가능성은 희박해.”
“휴…….”
셀린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기려다, 놀라 눈을 깜박였다.
발걸음이 너무나 가볍게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었다.
공기는 상쾌했고 햇빛은 반짝거렸다. 저 멀리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평소보다 더욱더 빛나 보였다.
셀린느가 보는, 듣는, 느끼는 모든 것이 베일을 한 꺼풀 벗겨 낸 것처럼 한층 다채롭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햇빛을 받아 빛나는 조각상의 대머리가 웃겨 쿡쿡 웃다가 문득 드는 의문을 아무 생각 없이 입 밖으로 냈다.
“마력 때문인가?”
“맞을 거야.”
레온하르트가 곧바로 수긍했다.
“생각보다 좋네요. 마력이 이런 거였다니…….”
“…….”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셀린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 앞에 열린 새로운 세상에 온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셀린느.”
“네?”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헤실헤실 웃으며 올려다보는 셀린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불안감이 그의 가슴을 꽉 옥죄었다.
마법사의 자질은 수백 명 중 한 명이 가지고 태어난다. 셀린느가 흔치 않은 재능을 발견한 건 축하할 만한 일이다.
게다가 셀린느에게나 그에게나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마법이라는 힘을 손에 넣었으니, 셀린느는 확실히 이전보다 덜 죽을 것이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마법사와 친분을 깊게 가지지 않았다.
9년 전, 그가 친우라 생각했던 흑마법사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이후로.
레온하르트는 이를 꽉 악물었다.
셀린느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마법사는 영광스럽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북부에서 그녀의 위치는 공고해질 것이고 죽을 가능성 또한 낮아졌으니 기뻐해야 한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도저히 기뻐할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이렇게 잘생겼었군요.”
“뭐……?”
“아, 걱정 말아요. 평소에도 잘생겼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더욱더 멋있어요.”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려는 셀린느에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력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마법사들의 행태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일부는 추해지고 일부는 잠이 들고 일부는 헛소리를 하고 일부는 말이 많아지는 것이 마치 술에 취한 것만 같다고.
셀린느는 마지막 부류인 모양이었다.
“이거 알아요? 저, 좀 기뻐요. 마법사가 되는 건 힘들다고 들었거든요.”
“힘든 정도가 아니라, 소질이 없으면 불가능하지.”
“그래도 운이 좋았나 봐요.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야겠어요.”
“……쉽게 볼 일이 아니야.”
“알아요.”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안다니, 그녀는 어젯밤까지만 해도 마물의 뿔과 이빨이 마력석이 된다는 것도 몰랐다!
셀린느는 나타샤의 탑에 도착할 때까지 종알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레온하르트, 이거 알아요?”
“……뭔가.”
“이제, 전 안 죽을 거예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
“아니, 아니.”
도리질 치는 셀린느의 눈은 이유 모를 확신으로 가득했다.
“전 알 수 있어요.”
***
셀린느는 온종일 잤다.
그녀의 꿈속에서 프리즘이 무지갯빛을 흩뿌렸으며 화려한 꽃들이 순식간에 피었다가 흉측하게 땅에 떨어져 썩어 가는 걸 반복했다.
그것들이 썩어 들어간 자리엔 구더기가 들끓었다.
썩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볼만한 광경이라는 생각도 잠시, 곧 셀린느는 꿈속에서 비명을 질러 대는 자신을 발견했다.
독사 수백 마리가 그녀의 발밑에 드글거렸고 머리 바로 위에 불길이 넘실거렸다. 어느샌가 가시덤불이 그녀를 꽉 조여 올 태세로 자라나고 있었다.
셀린느는 그저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찬물을 퍼부어 깨울 때까지.
“악!”
셀린느는 진짜 비명을 내지르며 잠에서 깼다가, 더 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녀의 눈앞에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짧게 깎은 은발은 이곳에서 본 머리색 중에 가장 특이했기에 셀린느는 그녀가 이 남자를 난생처음 보노라고 맹세할 수 있었다.
“누, 누구세요!”
남자는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오더니, 손목을 잡아 올렸다. 셀린느는 몸부림치며 몸을 빼내려 했다.
“엘!”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셀린느의 머릿속에 섬뜩한 추측이 떠올랐다.
‘자객? 이렇게 또 죽나? 하지만 왜?’
하지만 놀랍게도, 남자는 곧 손목을 놔 주고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마력석이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셀린느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휘어잡고 간신히 질문 하나를 뱉어 냈다.
“……누구시죠?”
“칼 뷔일란트입니다. 대공가의 유일한 마법사죠.”
“……!”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너무나 잘 아는 이름이었다.
게임과 달리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지도, 목에 흉측한 흉터가 있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게임 속 캐릭터와 닮은 외양을 몇 가지 찾아낼 수 있었다.
칼 뷔일란트는 게임 속에서, 주인공의 유일한 조력자였다.
자주 등장하진 않지만 몇몇 이벤트에서 마법으로 주인공의 목숨을 구해 주고 떠나 유저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니!
칼은 셀린느가 놀란 이유가 자신이 마법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부연 설명했다.
“처음 인사드리는군요. 그간 임무를 수행하다가, 오늘 아침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헌트 양께서 소질을 지니신지 모르고 마력석을 건드리셨다기에…….”
“위, 위험한 짓이었나요?”
“아뇨.”
칼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운이 없었다면 마력석을 다시 몸에서 뽑아내는 술을 받으셔야 했을 겁니다. 운이 따랐군요.”
셀린느는 살짝 안도했다. 이번만큼은 운이 따른 모양이었다.
“호위 시녀들을 불러오겠습니다. 만에 하나 폭주하실지도 몰라 모두 내보냈었거든요.”
셀린느는 칼이 방을 나서려 할 때, 여전히 팽글팽글 도는 머리를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마법, 배울 수 있을까요?”
자신이 마법사가 될 수 있다면 게임 내 주인공에게 호의적이었고 강력한 마법사로 묘사된 칼에게서 배우고 싶었다.
“제게요?”
칼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전 임무가 많아 바쁩니다. 아마 대공 각하께서 좋은 스승을 수소문하실 겁니다. 마법사는 영지의 보물이니까요.”
“그렇군요.”
셀린느는 눈을 감았다.
여전히 머리는 팽글팽글 돌았고 상황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으나 한 가지 희망이 그녀를 들뜨게 했다.
새로운 세상이 셀린느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는 죽지 않을 수도 있는 세상이.
***
셀린느의 두통이 조금 가라앉았을 즈음,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칼이 불러 주겠다고 했던 호위 시녀들 중 한 명이리라.
“들어오세요.”
“좀 괜찮아?”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당연히 호위 시녀 중 한 명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가벼운 옷차림의 나타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멀쩡해요.”
나타샤는 풉 웃었다.
“물에 다 젖었어, 셀린느. 그래도 아파 보이지는 않아서 다행이네.”
그제야 셀린느는 자신의 머리에서 여전히 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여기, 수건.”
나타샤가 의자 위에 걸려 있던 커다란 수건을 내어 주더니, 자신이 그 의자에 앉았다.
“지금 몇 시죠?”
“아침 아홉 시.”
레온하르트는 어제 아침이 되자마자 찾아와 마력석을 보러 가자며 손을 이끌었기에, 셀린느는 만 하루 정도 잔 셈이었다.
“다들 걱정했겠군요.”
“특히 칼 루테가 제일 걱정했지. 잘못 흡수된 마력석을 뽑아내는 건 꽤 힘들고 고통스러운 작업이라면서.”
“루테라니요?”
“마법사들은 루테라 불려. 셀린느 루테.”
나타샤는 셀린느에게 미소지었다.
“축하해. 이제 굳이 우리한테 의탁해도 되지 않아도 될 거야. 마법사는 어디에서든 환영하니까.”
“……제가 어딜 가겠어요.”
“마법사가 여기에 머문다면, 우리야 환영이지.”
나타샤는 벨을 울렸고, 호위 시녀들이 우루루 들어왔다. 모두 궤짝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새로운 마법사에게 보내는 선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