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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11화 (11/120)

11화.

“……!”

엘은 셀린느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환영회에서 그 일이 있었는데, 모르리라 생각하셨습니까? 공녀님께서 저희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이 생각보다 순순히 자신의 청을 들어준다 싶더니, 이유가 있었다.

수십여 분을 걸은 뒤, 셀린느는 거대한 늑대가 조각된 문 앞에 섰다. 엘이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바로 그때.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모피를 전신에 두르고 모자까지 써 나갈 채비를 단단히 한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순간, 셀린느의 말문이 턱 막혔다.

모피로 꽁꽁 몸을 싸맨 레온하르트가 너무 잘생긴 탓이었다.

“물었다. 여기서 뭘 하냐고.”

“……아시잖아요.”

바로 정신을 차린 셀린느는 고개를 치켜들고 레온하르트를 직시했다.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

“여기까지 왔는걸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밤, 나는 여기에 없다.”

“어디 가는 거죠?”

셀린느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밤 사냥. 아버지께서 외톨이 마물을 잡으러 가셨다가, 마물 무리를 발견하셨어.”

셀린느는 숨을 들이켰다.

“설마 밤 내내……?”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래라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겠지만, 내 문제가 있으니 어쩔 수 없군.”

“마물과 싸우다 악몽을 겪으면요?”

셀린느는 무언가 뜨거운 것이 가슴을 콱 조여오는 걸 느꼈다. 레온하르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럼 마물이 깨워 주는 거지. 고맙다는 생각까지 든다니까.”

“…….”

셀린느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돌아가도록.”

“낮에 가셔도 되잖아요.”

목이 메어 우스꽝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아침이면 우두머리가 변태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 전에 막아야 한다는 건 이제 너도 알겠지.”

레온하르트는 그녀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성큼 지나쳤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지만, 기분이 상한 듯한 셀린느의 청회색 눈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렸다.

“……저도 가겠어요.”

“안 돼.”

“왜요, 위험해서요? 지금은 우두머리가 변태하기 전이잖아요.”

“그런 문제가 아냐.”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셀린느를 보았다.

“내 힘이…… 부족하다.”

여태까지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기만 하던 엘이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레온하르트 베르누이의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이 성내에 없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힘이 부족하다는 말이 나왔다.

엘은 대공 부부조차 그런 말을 레온하르트로부터 들은 적 없으리라 자신할 수 있었다.

“그날, 깨달았다.”

“레온하르트.”

도톰한 외투에 폭 쌓인 자그마한 여자가 레온하르트를 향해 다가갔다.

“당신이 완벽하다면 왜 제가 같이 가려 하겠어요? 혼자서도 충분할 텐데.”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곤혹스러워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만약 제가 짐이 될 정도로 위험한 마물들이면 가지 않을게요. 솔직히 말해 주세요.”

레온하르트의 입술이 달싹였다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다시 닫혔다.

‘무척 위험한 마물들이라고 말할까. 만나자마자 몸이 산산조각 날 정도라고…….’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청회색 눈에 대고 거짓을 고할 수가 없었다.

“그날 보았던 놈들보단 훨씬 약하다. 하지만 북부의 마물은 황도의 마물들보다 영악하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봐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는데, 깜박깜박 잠이 들면서 어떻게 마물을 처치해요?”

“…….”

셀린느는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을 알고 미소 지었다.

“저도 모자 하나 주세요.”

잠시 뒤.

셀린느는 찬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귀까지 모자를 폭 눌러쓴 데다 목도리를 둘둘 감아 북부의 차가운 공기가 상쾌한 찬바람으로 느껴졌다.

레온하르트는 그들이 처음 만난 날보다도 더욱 조심스레 말을 몰았다.

“막 전속력으로 달리는 게 아니면 안 죽어요.”

셀린느가 안심시키려 노력했지만, 레온하르트는 알겠다고 짤막하게 대답만 할 뿐 속도를 높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말이 움직이는 리듬에 따라 흔들리는 시야로 평원을 바라보았다.

보름달이 이름 모를 풀들에 어슴푸레한 달빛을 뿌리고 있었다.

갑자기 말이 우뚝 멈춰 섰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멈추었나 싶었지만, 말은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장막이라도 있는 것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발을 굴렀다.

둘은 조심스럽게 말에서 내렸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왼손으로 셀린느의 오른손을 움켜잡았다.

“그때처럼 하면 되는 거죠? 마물이 나타나면, 등 뒤에 숨는다.”

셀린느는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겁이 아예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우겨서 따라온 건 자신이다.

“아니.”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잠시 응시하다,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내 손을 놓지 마.”

“그럼 레온하르트가 싸우기에……!”

“쉿.”

레온하르트가 입술에 긴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셀린느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가, 그가 빙그레 웃는 걸 보고 속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레온하르트!”

그때, 셀린느의 전신에 소름이 우수수 끼쳐 왔다.

소름 끼치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렸고, 악취가 훅 느껴졌다.

레온하르트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셀린느는 바보가 아니었다. 마물 무리가 가까이에 있다.

셀린느는 재빨리 레온하르트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레온하르트는 되려 그녀의 손을 꽉 붙잡고 라쉬르를 빼 들었다.

“내가 한 말, 기억해.”

“알았어요.”

풀들 사이로 셀린느가 며칠 전 보았던 기괴한 생명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던 이빨과 발톱이 달빛을 받아 번쩍였다.

셀린느의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떴다.

‘난 레온하르트를 돕기 위해 온 거야. 짐이 되기 위해 온 게 아니라.’

다음 순간, 셀린느의 몸이 땅에서 붕 떠올랐다가 착지했다.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세차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움직임에 따라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라쉬르가 눈앞에서 번쩍하더니, 등 뒤에서 불길이 화르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고, 레온하르트가 무어라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물들의 고막을 찢는 비명 소리와 악취, 죽음의 숨결이 느껴졌다.

하지만 셀린느는 그 와중에도 레온하르트의 손을 절대 놓지 않았고,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손을 잡은 힘을 절대 풀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셀린느에겐 제법 길게 느껴진 시간이 흘렀는데도 레온하르트는 마물들의 시체 더미 사이에서 여전히 라쉬르를 휘두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했고 거침없는 움직임엔 망설임 하나 없었다.

셀린느는 점차 자신의 마음도 고요해지는 걸 느꼈다.

갈기갈기 찢겨 나갔을 적의 기억이 자신에게 발톱 한 끗 미치지 못하고 스러져가는 마물들의 목숨과 함께 사라지는 듯했다.

‘어쩌면 이게 레온하르트가 나를 데려온 이유일지도 몰라.’

전처럼 등 뒤에 숨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손만 꼭 붙들게 해 준 것도 그만의 배려였으리라.

갑자기, 셀린느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를 꼭 붙든 레온하르트의 손에서 힘이 서서히 풀렸다. 셀린느는 황급히 그를 붙잡았지만 레온하르트는 깨어나기는커녕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수가 많이 줄었지만 규모는 여전한 마물들이 눈을 빛내며 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그를 소리쳐 부르며 팔을 잡아당겼다.

“일어나요, 레온하르트!”

분명 여태까지의 레온하르트는 소리치며 몸을 흔들기만 해도 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오늘은 좀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셀린느의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가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

그때, 용감한 마물 한 마리가 그들의 머리 위를 덮쳤다. 레온하르트의 눈은 마물의 발톱이 그의 망토를 찢고 살갗을 스쳐 피를 낸 후에나 떠졌다.

-챙!

마물은 순식간에 반토막이 나 뒤로 사라졌다. 레온하르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오지 말았어야 했어.”

“왜 못 깨죠? 만약 이제는 남이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는 거라면…….”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하루 만에 그렇게 변할 리가 있나. 밤 사냥 중이라 그런 것 같군. 손길 정도는 느껴지지도 않은 자극에 둘러싸여 있으니.”

-챙! 챙! 챙!

그가 말 몇 마디를 늘어놓을 때마다 마물들이 하나씩 너부러졌다.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번엔 뺨이라도 때리도록 할게요.”

“좋은 생각이 났다.”

“……?”

갑자기, 한기가 그녀의 전신을 덮었다.

셀린느가 상황을 인식하기까지는 몇 초가 걸렸다. 레온하르트가 순식간에 그녀의 외투를 부드럽게 벗겨 낸 것이었다.

하지만 셀린느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나기도 전에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당기고 외투를 덮었다.

“내가 또 잠들면, 무릎으로 정강이라도 차.”

셀린느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레온하르트의 가슴팍뿐이었다. 은은한 달빛만으로도 대공가의 문양은 환하게 빛났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손만 잡았을 적처럼 날렵하게 움직였다.

우습게도, 셀린느는 한 번도 춰 본 적이 없는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그때, 레온하르트의 움직임이 다시금 멈추었다.

셀린느는 망설이지 않고 온 힘을 다한 주먹으로 그의 배를 푹 찔렀다.

“허읍……!”

레온하르트가 눈을 번쩍 뜨고 셀린느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그들에게 달려든 마물을 쳐 냈다.

“효과가 좋군.”

“드디어 도움이 되었네요!”

셀린느는 자꾸만 올라가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날 친 게 그렇게 좋은가?”

“그렇다고 해 두죠.”

십여 분 뒤, 레온하르트는 다시 악몽에 빠져들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셀린느는 이번에도 주먹을 내질렀으나, 힘이 빠진 탓인지 레온하르트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레온하르트가 말한 대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번엔 효과가 있었다.

마침내 레온하르트는 품에서 셀린느를 놓아 주었다. 살아 있는 마물은 단 한 마리도 없었고, 너르던 벌판은 악취를 내뿜는 마물들의 시체로 가득 차 있었다.

셀린느는 다소 기가 질려 한숨을 내뱉었다.

“이것들을 처리하는 것도 정말 힘들겠어요…….”

“그렇지도 않아.”

레온하르트는 멍투성이가 된 정강이를 어루만지며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얼얼하긴 했으나 여태까지 악몽과 함께 지샌 그 어떤 밤 사냥보다도 훨씬 나았다.

마물에게 상처를 입은 다음에야 잠이 깬 탓에, 전신에 박힌 발톱과 이빨 수십 개를 맨정신으로 빼내야만 했으니까.

“며칠이 지나면 이것들의 사체는 분해돼. 그러면 이빨과 뿔만 남아.”

“으…….”

셀린느는 진저리를 쳤다.

“젤 끔찍한 부위만 남는 게 아닌가요?”

“틀린 말은 아니군.”

레온하르트가 동의했다.

“하지만 이것들의 뿔과 이빨엔 마력이 한가득 담겨 있어. 숙련된 마법사들이 정제하면 최상등품의 마력석이 된다. 북부의 주 수입원이지.”

셀린느는 살짝 소름 끼치는 깨달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것들의 사체가 북부의 주 수입원이라면 레온하르트는 그간 얼마나 많은 마물을 베어 왔다는 말인가!

셀린느는 눈앞의 흉측한 이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선 이빨처럼 촘촘하지만, 독사의 독니처럼 크고 날카로웠다.

“마력석은 보석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분명 게임 내 아이템이었던 마력석은 다양한 색깔의 보석 모양이었다.

“아, 혹시 본 적이 있나? 마력석은 보석처럼 보이긴 하지.”

“……?”

“솜씨 좋은 마법사가 정제하면 웬만한 보석들보다도 더욱 빛나네. 믿기 힘들겠지만.”

레온하르트는 동그란 청회색 토끼 눈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원한다면 이것들의 작업물 중 하나를 슬쩍해 주지. 마법사가 아닌 사람에겐 그저 예쁜 돌에 불과하지만, 기념으로 갖고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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