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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10화 (10/120)

10화.

“그냥 긴장이 되어서…….”

나타샤는 셀린느를 빤히 쳐다보았다.

“흥, 레온은 속아 넘어갈지 몰라도 나는 못 속여. 대체 그 자식이 나에 대해 뭐라고 얘기한 거야?”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럼, 무서워할 이유도 없네?”

……차고 넘치는데요.

“그냥 긴장한 거예요. 제가 수줍음이 좀 많아서.”

“알았어. 긴장 풀어.”

나타샤는 셀린느의 등을 툭툭 쳤다.

“호위 시녀들도 곧 소개받을 텐데, 새로이 모실 사람이 그렇게 겁을 집어먹었으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들은 긴 복도 끝 진홍빛 문에 도착했다. 나타샤가 문을 잡아당기자, 달콤한 향이 훅 끼쳐 왔다.

셀린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벽지부터 천장의 벽화까지 온통 분홍빛으로 가득했고, 값비싸 보이는 가구들마저 채도만 다른 분홍색 칠이 되어 있었다.

“멋지지? 레온은 아주 질색을 해. 하지만 내 방인데, 내 멋대로 꾸며야지.”

나타샤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벨을 눌렀다. 곧바로 메이드가 나타났다.

“공녀님, 부르셨습니까.”

“아리아, 엘, 미리암을 불러 줘. 당장.”

셀린느는 시간이 좀 걸리리라 생각했지만, 단 몇 분 만에 그들 앞에 세 명의 호위 시녀가 모두 나타났다.

나타샤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모두 소개시켜 주었다.

“그리고, 이쪽은 셀린느 헌트. 우리 가문의 손님이셔. 너희들 동료가 한 명 더 올 때까진 내 방에 머물 거야. 몸이 무척 약한 분이니 조심해.”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셋은 한 몸처럼 동시에 대답했다.

셀린느도 무어라 대답하려 했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 셋을 모두 알고 있었다!

히든 스테이지에서, 나타샤의 유령은 홀로 다니지 않았다. 그녀가 나타났다는 건 곧 주인공을 노리는 다른 유령 셋이 협공을 해 온다는 뜻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공포와 혼란이 셀린느를 장악했다.

북부만 오면 모든 위험에서 해방되리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야말로 시궁창이었다.

‘아니야, 진정하자, 진정. 게임과 여기가 다르다는 건 레온하르트를 통해 충분히 깨달았잖아?’

셀린느는 셋을 향해 미소 지었다.

“모두 만나서 반가워요. 앞으로 얼마간 잘 부탁해요.”

나타샤는 바로 셀린느를 잡아끌었다.

“앞으로 지내게 될 방도 보여 줄게. 셋이 번갈아 불침번을 설 거야.”

한 시간 후.

셀린느는 탑의 맨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돌아다니느라 기진맥진해져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타샤는 다소 당황한 기색이었다.

“레온 말대로 몸이 정말 약하구나. 의사를 불러올까? 뭐 좀 마실래?”

“…물 좀 주세요.”

곧바로 셀린느의 손에 차갑고 신선한 물 한 잔이 쥐어졌다. 나타샤는 셀린느의 몸 곳곳을 대놓고 살폈다.

“그렇게 잘 죽는 건 체력 때문도 있을 거야. 날 봐.”

그녀는 나풀거리는 드레스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매일 단련하거든. 같이할래?”

셀린느는 웃고 말았지만, 나타샤는 진지한 얼굴로 거듭 권유했다.

“여기에 살려면 체력은 필수야! 아, 황도엔 말을 못 타는 여자들도 있다고 들었어. 셀린느는 아니지?”

“적어도 전 못 타요.”

나타샤는 입을 틀어막았다가, 다소 무례한 행동이었다는 걸 깨달은 듯 사과했다.

“미안, 북부에선 승마가 상식이거든. 그럼 뭐, 뜨개질, 자수 이런 거 좋아해? 엘이 자수를 참 잘 놓아. 부러울 정도야.”

“어…… 아뇨.”

“괜찮아, 나도 싫어해. 그럼 좋아하는 게 뭐야?”

문득 두 달 전이었다면 공포 영화, 공포 소설, 공포 게임이라고 대답했으리라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셀린느는 가장 무난한 대답을 골랐다.

“책을 좋아해요.”

“아, 책 말이지.”

나타샤는 얼굴을 찌푸렸다.

“미안,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갖다 두질 않아. 그런데 도서관이 있거든? 시간이야 많으니 언제든 다녀와.”

“감사드려요.”

셀린느는 평생 갈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며 감사를 표했다.

“별말을.”

그렇게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던 와중, 아리아가 나타났다.

“공녀님, 오늘 저녁은 헌트 양의 환영회라고 합니다.”

“알겠다.”

나타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생각이실 걸. 손님은 북부의 모든 정성을 다해 맞이해야 한다나 뭐라나.”

“뭔갈 준비해야 하나요?”

“아니. 셀린느야 거기서 얌전하게 앉아 있으면 돼. 그래, 바로 지금처럼.”

나타샤는 피식 웃었다.

“단지 지루할 뿐이야.”

세 시간 뒤, 셀린느는 그저 얌전하게 앉아 있는 게 보통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영하오. 아까는 밖에 있느라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하지 못했군.”

베르누이 대공은 샛노란 눈을 빛내며 셀린느에게 인사했다. 셀린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과 대공비는 유령으로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셀린느가 플레이 한 구간까지는.

대공은 정식으로 자제들을 소개해 주었다. 대공비의 집무실에서 보았던 소년은 대공 부부의 막내아들, 마르틴이었다.

음식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숨을 쉬려 노력하며 식전 빵을 조심스레 베어 물었다.

공포나 긴장 때문이 아니었다.

난생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입혀 주는 옷을 입느라 말 한마디 못 하고 시녀들의 시중만 받은 게 화근이었다.

코르셋 역시 난생처음으로 착용한 셀린느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꾸 긴장한 탓인지 목이 말라 들이켠 물 때문에 배가 꽤나 팽창한 상태였다.

‘이렇게 불편할 줄은 몰랐어!’

대공가의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어디 안 좋은가?”

즉각 그녀 건너편에 앉은 레온하르트가 반응했다.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위해서 연 환영회다. 이 세계의 예법에 대해 아는 거라곤 전혀 없었지만, 일찍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조금 전, 나타샤가 이 환영회는 대공가의 손님이라는 지위를 그녀에게 만들어 주기 위해 열었다고 귀뜸해 주지 않았던가.

대공이 걱정스레 물어 왔다.

“입에 맞지 않는가?”

“아뇨. 맛있네요.”

셀린느는 힘겹게 웃으며 수프를 떠먹었다.

“헌트 양은 좀 많이 먹어야 해. 그렇게 마르니 몸이 약하지!”

순간, 머리가 아찔하더니 눈앞에 수십 가지 색상의 전구를 켰다가 끈 것처럼 색색깔의 잔상이 깜박였다.

셀린느는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노력했지만 온몸이 납으로 된 것처럼 무거웠다.

-쿵!

셀린느가 코르셋 때문에 숨 막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였다.

“……린느!”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온몸을 옥죄던 압박이 사라지고 없었다.

당장 사람 하나 베고도 남을 것처럼 날카로워 보이는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손을 꽉 부여잡았다.

“불편하면 얘기를 해야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셀린느가 애매하게 웃었다.

“레온하르트도 그런 경험 있지 않아요? 어버버하는 사이에 모든 일이 끝나 있는 거.”

“……입이 살아 있는 걸 보니, 멀쩡하군.”

레온하르트는 한결 안심한 기색으로 셀린느를 앉혔다.

“환영회는 저 때문에 엉망이 됐겠군요.”

“상관없어.”

거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넌 내가 직접 데려온 손님이다. 환영회 따위 없어도 되는 거였어.”

셀린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들은 작은 방에 있었다. 방구석에 나뒹구는 코르셋이 눈에 들어왔다.

“직접 벗겼어요?”

셀린느의 목소리엔 질책이 아닌 놀라움만이 담겨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걸 어떻게 푸는지도 몰라. 나타샤의 호위 시녀들이 알아서 했지.”

“절 그들에게 맡기고 돌아가셨어야 했어요. 손님이 없으면 그 손님을 데려온 후계자라도 자리에 있어야지요.”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셀린느 헌트, 겨우 이런 일 하나로 네 위치가 흔들리진 않는다. 내가 보증하지.”

셀린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위 시녀들이 코르셋만 빼고, 드레스를 완벽히 매만져 줬기 때문에 바로 돌아가도 될 듯했다.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으니, 환영회는 아직 많이 남아 있을 터.

“돌아가죠.”

“……괜찮겠나?”

“레온하르트, 전 이것보다도 훨씬 더한 죽음도 많이 겪어 봤거든요? 게다가 음식들도 저놈의 코르셋 때문에 제대로 못 먹었다고요.”

레온하르트는 더는 만류하지 않고 일어섰다.

“분부대로, 레이디.”

그들이 대연회장에 들어가자마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셀린느는 당당하게 제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대공이 바로 걱정스레 물어왔다.

“몸은 괜찮은가?”

“네. 어젯밤 야영을 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좀 쉬고 오니 훨씬 괜찮네요.”

“아버지, 역시 환영회는 헌트 양이 적응하고 난 뒤로 잡으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나타샤가 핀잔을 주더니 악단에 그녀가 좋아하는 경쾌한 곡을 주문했다.

“이젠 괜찮아요. 배도 막 고픈데요?”

셀린느는 웃으며 부드러운 송아지 스테이크를 한 조각 입에 집어넣었다.

“맛있네요!”

빈말이 아니었다. 육즙이 풍부한 송아지 스테이크는 그녀가 이 세계로 떨어지기 전, 가끔 먹었던 싸구려 스테이크와는 차원이 달랐다.

“쉬고 오니 입맛이 도는가 보군. 많이 들게.”

대공 일가와 대공가의 손님이 앉은 테이블은 곧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변했다. 단 한 명, 악몽이 예약된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를 제외하고.

환영회는 저녁 늦게야 끝났다.

지친 셀린느는 호위 시녀들의 손에 이끌려 몸을 씻고,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는 곧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잠에 빠져들기 전, 고개를 살짝 들어보니 엘이 문에 기대앉아 자수를 놓고 있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여태껏 잊고 있었던 게 신기할 정도였던 사실을 떠올렸다.

레온하르트는 오늘 밤 자신의 죽음을 반복해서 보고, 느끼게 될 것이다.

‘……어쩐담.’

언젠가 그에게 북부에는 깨워 줄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레온하르트는 약해진 자신을 어찌 남에게 하룻밤 내내 보여 주느냐고 되물었다.

하기야, 셀린느가 그의 악몽을 함께하게 된 것도 단순히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제 셀린느는 그녀를 지켜 줄 호위 시녀가 있으니 레온하르트는 아무런 괴로운 밤이라도 혼자 버텨 내야 한다.

‘……안 되겠네.’

셀린느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엘이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레…… 공자님을 뵈어야 해요. 지금 당장.”

“이 시간에요? 뭔가 전하실 일이 있다면 제가 따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직접 가서 전해야 해요. 공자님께서 절 데려오신 이유와 깊은 관련이 있는 거라.”

엘은 내키지 않은 얼굴로 일어섰다. 셀린느는 당당했다. 그녀는 거짓말 하나 하지 않았다.

“그럼 공자님께 미리 알릴 시간만 주십시오.”

“지금 당장 가야 해요!”

셀린느는 절박하게 외쳤다. 당연히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내칠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직접 가서, 자신이 여기까지 왔는데 돌려보내겠냐고 묻는 방법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셀린느는 그녀가 걸쳐 주는 두꺼운 외투를 껴입었다.

“밖은 춥습니다. 돌아가실지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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