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셀린느가 이상했다.
레온하르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살폈다.
셀린느는 베르누이성에 다가갈수록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대고 있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냐고 물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왜 그러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겁이 나긴 하겠지.’
생각해 보니, 첫 방문객 중 성의 모양새에 겁을 집어먹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로선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기에 겁내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셀린느 입장에선 새로운 보금자리가 영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겁을 먹을 만도 했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다. 원래 처음 오는 사람들은 다 놀라지. 네 기준으로 위험한 곳이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호위 시녀가 붙을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그가 말하는 사이, 마차는 성문을 통과했다.
셀린느는 숨을 들이켰다. 연결 통로로 얼기설기 엮인 탑들이 그 위용을 완전히 드러냈다.
코가 시큰해졌다. 머릿속에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한 달 하고도 보름 전의 플레이가 떠올랐다.
히든 스테이지는 기억력 하나는 좋은 그녀가 같은 함정에 여러 번 죽을 정도로 교묘한 함정들로 가득했다.
첫 번째 스테이지인 저주받은 저택과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셀린느는 마차에 타는 이 순간이 영원하길 빌었지만, 당연히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차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고, 레온하르트는 먼저 내려 외투에 폭 쌓인 셀린느가 내리는 걸 도와주었다.
‘추워……!’
따뜻한 마차에 있다가 내리니 살갗이 얼어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셀린느는 탑의 철문이 열리자마자 추위도 잊을 정도의 공포에 빠져들었다.
-철컹!
게임 속, 히든 스테이지가 시작될 때 들리는 소리였다. 셀린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같은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겁을 너무 먹었군.’
레온하르트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셀린느를 내려다보았다. 셀린느는 우두머리 마물을 격퇴하기 위해 숲에 들어갔을 때보다도 훨씬 더 긴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곳에서 살 게 걱정되나?“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셀린느는 자신과 함께 지낸 며칠 동안 언제 어디서나 당당했다.
‘아.’
그럴듯한 추측이 레온하르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부드럽게 셀린느에게 설명했다.
“괜찮네. 내가 잘 설명할 터이고, 우리 가문의 손님으로 대우받게 될 테니.”
……완전 잘못 짚으셨는데요.
셀린느는 차마 레온하르트에게 진실을 알려 줄 수 없었다. 그는 셀린느가 꿈으로 미래를 본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곳이 유령성인 꿈을 꾸었다고 얘기한다면?
셀린느는 금방이라도 가슴에서 튀어 나갈 기세로 박동하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눈에 익숙한 광경이 튀어나왔다. 박제한 수사슴 머리, 일렬로 줄지은 갑옷들, 녹지 않은 얼음 장식들…….
셀린느는 양팔로 자신을 감쌌다. 레온하르트의 손을 쥐고 싶었지만 베르누이성에서 그의 손을 잡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진 않았다.
‘침착해, 거긴 유령성이었고, 여긴 살아 있는 사람들로 가득해. 유령 따윈 없어.’
게임 속 유령성은 사람이 없다는 의미의 유령성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실제 유령들이 튀어나와 주인공을 죽이려 드는 유령성이었다.
“이 성에 유령은 없죠?”
“유령?”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 정도로 무서운가? 소문 한번 들어 본 적 없어.”
셀린느는 조금 안심했다. 적어도 레온하르트도 알 정도로 이곳이 유령이 바글거리는 성은 아니다.
“레온하르트!”
갑작스레 들려온 밝은 목소리와 함께, 인영이 그들 앞에 불쑥 나타났다.
“드디어 왔구나!”
십 대 후반의 붉은 머리 소녀는 레온하르트를 덥석 껴안았다.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잘 지냈니, 나타샤.”
“나야 뭐. 그보다 여기 이분이…….”
“그래.”
레온하르트는 호기심으로 가득해 보이는 누이동생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느 헌트 양이다. 셀린느, 여긴 나타샤. 내 동생.”
나타샤는 밝게 웃었다.
“정말 반가워. 레온이 얼마나 당신을 찾아다녔는지 모를 거야.”
셀린느는 인사 한마디 짜낼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이 팽글팽글 도는 듯했다.
불타오르는 빨강머리, 레온하르트를 닮은 사파이어 눈과 눈 바로 밑 애교점, 머리에 꽂은 화려한 나비 장식, 냉기 어린 성내에 어울리지 않은 나풀나풀한 드레스.
전신을 뒤덮은 피도, 가슴에 뻥 뚫린 구멍도 없었지만 셀린느는 눈앞의 소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나타샤 베르누이는 히든 스테이지에 진입한 주인공이 처음으로 마주치는 유령이었다.
“셀린느?”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 셀린느는 간신히 정신을 붙들었다.
“아, 죄, 죄송해요.”
“어머,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는데.”
나타샤는 기분이 상했다기보단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레온, 대체 뭐라고 한 거야? 겁을 잔뜩 먹었잖아.”
유령과는 거리가 먼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이 셀린느의 손을 잡아 왔다. 셀린느는 자리에 얼어붙은 채 입만 뻐끔거렸다.
“걱정 마. 이 인간은 겁주는 게 특기거든. 뭔 소리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해코지할 생각으로 당신을 찾은 게 아니야.”
셀린느는 숨을 서서히 들이쉬며 긴장을 풀었다.
“……알아요.”
“잠깐, 어디 아픈가?”
레온하르트가 나타샤에게서 셀린느의 손을 낚아챘다.
“날 봐.”
셀린느는 떨리는 눈으로 심각한 표정의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요.”
“왜 그래?”
나타샤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둘을 번갈아 관찰했다. 레온하르트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셀린느는 몸이 약해.”
“그렇게 보여. 브란체 선생을 부를까?”
“셀린느, 의사를 불렀으면 좋겠어?”
“아뇨. 정말 괜찮아요.”
셀린느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레온하르트도 더는 권유하지 않았다.
“나타샤,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계시나?”
“아버지는 사냥 나가셨어.”
“또……!”
셀린느는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레온하르트의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고, 주먹은 당장이라도 어딘가를 칠 기세로 굳게 쥐어졌다.
“그렇게 나가지 마시라 말씀드렸거늘!”
나타샤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말을 들으실 분이 아니잖아. 레온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고집을 부리시는데, 뭔 수로 말려? 게다가 아버지는 마물 사냥을 즐기신다고.”
“……알았다. 어머니는?”
“일하고 계실 거야.”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셀린느는 최대한 그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사이좋네.”
나타샤는 놀리는 어투였다.
“그런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긴!”
나타샤가 쿡쿡 웃자,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곧 설명해 주지. 어머니 앞에서.”
“와, 어머니께 말씀드릴 정도로 진지한 사이구나?”
그들은 고풍스러운 문 앞에 도착했다. 레온하르트는 늑대 머리 모양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셀린느는 숨을 집어삼켰다.
조금 전 나타샤를 만났을 때의 감정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대공비에게 소개하는 소리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샅샅이 훑는 대공비 때문도, 그녀 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낭떠러지 때문도, 방을 가득 메운 흰장미 때문도 아니었다.
대공비 옆 작은 책상에서 책을 읽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어린 소년 때문이었다.
나타샤처럼 새빨간 머리에 샛노란 눈, 얼굴에 온통 뿌려진 주근깨.
히든 스테이지에 진입한 플레이어가 두 번째로 마주치는 유령이었다.
“이리 오게.”
냉철한 목소리가 셀린느의 귀에 박혔다. 그녀는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공비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지?”
“어머니, 설명드릴 게 있습니다.”
“…….”
대공비는 장남을 지그시 응시했다.
“셀린느는 잘 죽습니다.”
“뭐?”
저 인간이……!
셀린느는 어이가 없어 정신이 잠시 멍해졌다. 레온하르트가 엉뚱한 발언을 종종 해 댄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상황에서 저런 식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레온하르트 옆으로 성큼 나섰다.
“제가 설명할게요! 전 죽어도 죽지 않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어떻게 죽든 다시 살아나요.”
셀린느는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꼬마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셀린느의 기억에 의하면, 저 꼬마는 염소 뿔이 박힌 단검으로 플레이어를 푹푹 쑤셔 댔다.
“불사신이라는 건가?”
“네. 하지만 반쪽짜리죠. 죽기는 엄청 잘 죽거든요. 그리고 그때마다 고통은 느끼고요.”
대공비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설마…… 레온하르트는.”
“제가 죽는 걸 꿈에서 보는 거죠. 밤 내내.”
“그리고 되살아나서 또 죽었으니 끝이 없던 거고.”
무거운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대공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헌트 양이 죽지만 않으면 레온하르트는 숙면을 취할 수 있다는 거군.”
레온하르트가 긍정했다.
“네. 이미 검증했습니다.”
대공비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것치곤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데?”
“…….”
나타샤가 숨을 들이켰다.
“헌트 양은 또 죽은 거였어! 레온을 만난 뒤에도!”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렸잖아요. 잘 죽는다고.”
무척 황당해 보이는 나타샤와 달리, 대공비는 시종일관 냉철한 표정을 유지했다.
“어머니, 실력이 출중한 호위 시녀가 필요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붙어 있을 수 있는 자로요.”
“……이걸 어쩌나.”
대공비는 조금 곤란한 기색을 내보였다.
“맨하빈 후작 부인이 호위 시녀가 필요하대서 나타샤에게 붙은 세 명, 나에게 붙은 일곱 명 빼곤 전부 보냈다.”
레온하르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호위 시녀 수를 줄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맨하빈 후작 부인에게 한 번 보낸 호위 시녀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도 대공가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
대공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 알아보겠다. 하지만 후작 부인에게 보낸 호위 시녀를 돌려받든, 다른 가문의 호위 시녀를 받든 시간이 필요해. 그때까진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겠구나.”
“안 됩니다!”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성급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대공비는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레온하르트?”
“혼자 목욕하다 물에 빠져 죽고, 멀쩡한 길을 걷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죽는 여자입니다. 절대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보기보다 심각하구나.”
나타샤가 중얼거리더니, 좋은 생각이 있다는 듯 들뜬 목소리로 얘기했다.
“나랑 같이 지내는 건 어때?”
“안 돼.”
“왜!”
레온하르트의 단호한 대답에 나타샤가 바로 항의했다.
“왜, 내가 해코지라도 할까 싶어서?”
“그게 아니라…… 너도 덜렁대잖아. 믿고 맡길 수가 있어야지.”
“세상 사람들이 다 레온처럼 빈틈 하나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
대공비는 손을 들어 티격태격하는 남매를 제지했다.
“결정했다. 호위 시녀가 올 때까지 헌트 양은 나타샤와 함께 지내도록.”
나타샤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셀린느를 자신의 탑으로 안내했다.
레온하르트가 따라오려 했지만, 나타샤가 강력히 거부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셀린느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덜덜 떨리는 몸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당신, 내가 그렇게 무서워?”
당연히 실패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