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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8화 (8/120)

8화.

셀린느는 자신이 어떻게 그 숲을 빠져나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인지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자신을 꽉 껴안은 채 안아 올린 레온하르트뿐이었다.

“공자님!”

처참한 모습의 셀린느를 안은 레온하르트가 숲을 빠져나오자 순식간에 사방이 시끄러워졌다.

의무병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레, 레이디는 이리로…….”

“아니.”

레온하르트는 두 손을 정중히 내민 의무병을 쏘아보았다.

“내가 직접 하겠다.”

그가 의무병의 손에 들린 붕대와 약품을 한 손으로 낚아채고 마차로 들어가려는 순간, 기사단장이 다가왔다.

“공자님, 핵은……?”

“소멸했어.”

“예?”

기사단장이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레온하르트는 대놓고 짜증스러워하는 대답을 던졌다.

“못 믿겠나? 직접 가서 찾아보든가.”

“아, 아닙니다.”

기사단장은 즉각 물러섰다. 레온하르트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들 중 마물의 시체를 헤집을 용기가 있는 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악!”

셀린느가 몸을 비틀면서 작은 비명을 질렀다.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조심스레 마차에 셀린느를 눕히고 샅샅이 살폈다.

의무병을 물린 건 단순한 치기 때문이 아니었다. 제국에서 마물에 당한 상처에 대해 레온하르트보다 더 잘 아는 전문가는 없었다.

‘……!’

레온하르트의 동공이 흔들렸다.

셀린느의 전신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조금 전 붙은 것처럼 일그러진 붉은 흉으로 뒤덮여 있었다.

연고를 집는 레온하르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셀린느는 부드러운 연고가 자신의 목부터 발라질 때야 정신을 겨우 차렸다.

그녀는 신음과 함께 웅얼거렸다.

“낭비예요. 어차피 다 나으니까…….”

“상처들이 다 그렇지.”

레온하르트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연고를 펴 바르다, 어깨보다 조금 아래 지점에서 멈칫거렸다.

넝마 수준의 드레스 밑으로 언뜻 보이는 속살 역시 정상이 아닐 터. 하지만 그가 손대거나 언급할 수 있는 부위가 아니었다.

“의무병을 불러야겠군.”

“다 나았어요.”

여태껏 감겨만 있던 셀린느의 눈이 레온하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평상시엔 활기차게 빛나던 청회색 눈이 고통에 흐려져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봐요. 사라졌잖아요?”

셀린느는 넝마가 된 드레스의 소매를 걷어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팔을 내보였다.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여전히 아프잖나.”

“그렇게 티 나요? 환상통이에요. 곧 사라질 테고, 연고 바른다고 나아질 것도 아니고요.”

“……알았다.”

셀린느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상처들의 통증이 전신을 지배했다.

그녀는 신음을 흘리거나 몸을 들썩거려 레온하르트를 걱정시키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고통을 참아 냈다.

문득, 두 손에 따스한 체온과 압박이 느껴졌다.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싫으면 얘기해라.”

셀린느는 대답 대신 레온하르트의 손을 꼭 붙들었다. 온몸을 파먹는 벌레처럼 우글대던 통증들이 그와의 연결을 따라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마지막 통증이 간지럼으로 변해 그녀를 떠났고,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이제 괜찮아요. 고마워요.”

“…….”

레온하르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입술만 조금 달싹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셀린느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머릿속에 떠오른 아무 질문이나 짐짓 밝은 체하며 던졌다.

“그럼 이제, 호텔로 가나요? 아니면 황태자 전하께 보고 드려야 하니까 황궁으로?”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눈빛이 본디의 냉철한 기색을 되찾는 걸 보고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그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셀린느의 그 어느 예상도 벗어났다.

“아니.”

셀린느는 어리둥절해져 눈을 치켜떴다. 레온하르트는 마치 자명한 진리라도 되는 양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뱉었다.

“바로 간다. 북부로.”

“네?”

“황도는…… 위험해.”

레온하르트는 라쉬르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들 앞에 놓인 모든 위험을 지금 당장 베기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

셀린느는 포근한 담요 속에 파묻혀 온기를 만끽했다. 레온하르트는 북부로 가는 길은 춥다며 마차 안을 담요와 쿠션으로 한가득 채웠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이렇게 서두르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결 차분해진 그를 보니 북부로 최대한 빨리 가는 게 올바른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부는 여기보다 많이 춥나요?”

“그 옛날 옷을 입고 가면 당장 죽었을 만큼.”

레온하르트는 손을 내밀어 셀린느가 꾹 눌러쓴 모자에 달린 담비 털을 살짝 쓰다듬었다.

“명심해. 밖에 나오면 절대 모자를 벗지 마. 순식간에 귀가 잘려 나갈 테니까.”

곧 셀린느는 북부 추위에 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관련 화제가 나올 때마다 레온하르트가 열을 올리며 주의사항을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창밖엔 푸른 어스름이 내려앉았고, 마차는 부드럽게 멈추었다. 출발할 때 들은 것처럼 하룻밤 야영해야만 했다.

둘 다 입맛이 없었기 때문에 저녁은 비스킷과 따뜻한 차 조금 우물거리는 게 전부였다.

레온하르트는 두 손으로 머그잔을 꼭 붙잡은 셀린느를 한참 바라보다, 단단히 결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밖에서 자겠다.”

“왜요?”

셀린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호텔에서조차 자신이 걱정된다며 문에 기대서 보초를 서던 레온하르트다.

게다가 지금은 야영지.

자신이 싫다 해도 곁에 있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게 정상 아닌가?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지만, 금방 돌아올 것 같았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레온하르트의 창백한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이유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악몽 때문에, 제가 깰까 봐 그러는군요.”

셀린느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지만, 레온하르트는 진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셀린느의 죽음이 그에게 가져다 주었던 격통은 아직도 가슴 한편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꿈으로 다시, 수십 번 보게 된다면?

레온하르트는 입 안이 바싹 말라가는 걸 느꼈다.

“오늘은 힘든 하루였지 않나.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만큼, 오늘 밤은 레온하르트에게 힘든 밤이잖아요.”

셀린느의 목소리엔 순수한 걱정이 엿보였다. 레온하르트는 힘겹게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 일은 순전히 나 때문이지. 내 어리석음의 대가를 네가 같이 감당할 필요는 없다.”

셀린느는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숨겼다. 지금 레온하르트에게 무슨 소리를 해도 그는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알았어요. 그럼 저는 누가 지키죠?”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든 순간, 셀린느는 자신의 수가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뭐, 지금 북부로부터 요청하지도 않은 호위 시녀님이 달려오고 계신다면 말이 다르겠지만…….”

셀린느는 유리창으로 타오르는 모닥불 옆 마부가 이미 쳐 놓은 작은 천막을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가 저기 있으면서 어떻게 저를 지키죠? 그렇다고 아예 야외에서 보초를 서실 것도 아니잖아요? 감기 걸리신다고요.”

“……보초를 설 생각이었다.”

“이 추위에?”

셀린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레온하르트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지만, 레온하르트가 펄쩍 뛰며 물러나는 바람에 퍼포먼스는 실패하고 말았다.

“뭐, 안 재어 봐도 열은 없겠지만…… 내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성에 도착할 생각인가요?”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여기 있어야, 네 마음이 편한가.”

“그럼요!”

셀린느는 그제야 레온하르트가 말귀를 알아들었다는 듯 눈을 반짝 빛냈다.

그녀는 담요와 쿠션으로 자신이 잘 자리를 만들었다. 레온하르트는 체념한 기색으로 문에 기대앉았다.

“내일 밤이 기다려지시겠네요.”

“당연하지. 악몽은 이제 지긋지긋해.”

레온하르트는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투였다. 셀린느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아뇨. 드디어 침대에 누워서 주무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절 안 지키셔도 되고.”

“아.”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셀린느와 자신이 한 방에 묵는 밤은 이게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이니 좀 더 유쾌한 밤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곧 그 자신의 오만과 무능이 불러온 악몽이 눈 앞에 펼쳐질 것이고, 셀린느는 그의 나락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흘낏 바라보았다. 그녀는 벌써 졸린 눈으로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굳이 셀린느와 언쟁할 필요 없이, 그녀가 잠들면 밖으로 나가면 될 것 같았다.

그녀의 숙면과 레온하르트의 마음의 평화 두 가지를 모두 지키는 방법이었다.

“……별이 참 많네요. 여기가 벌판이라서 그런 거겠죠?”

하지만 셀린느는 웬 변덕인지,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은 모양이었다.

“오늘 하늘이 맑아서 그런 것 아닌가.”

레온하르트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는 별을 좋아하지 않았다. 별은 마법사와 점쟁이들의 전유물이었고, 그는 양쪽 모두와 친밀하지 않았다.

“……없네요.”

“뭐가?”

“제가 아는 별이요.”

잠에 취한 말로 여겨질 정도로 아리송한 말이었지만,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비웃지 않았다.

“창이 작아서 그렇겠지. 하늘에 별은 많고 아는 별은 적을 테니 안 보이는 것도 당연해.”

“별, 잘 아세요?”

“……아니.”

“그래도 아예 모르시는 건 아니잖아요. 아무거나, 얘기해 주세요.”

레온하르트는 순간 무서운 이야기를 해 달라 조르는 어린 시절의 여동생이 떠올라 그만 자라고 손을 내저을 뻔했다.

하지만 잠이 다 깬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는 셀린느의 얼굴엔 어리광과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 엿보였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군인에게서 볼 수 있는 감정이.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별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북부에선 마법사를 별이라 불러. 그만큼 다른 사람들과 다른 세상을 사니까.”

셀린느는 조금 실망한 눈치였지만, 별 토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별들은 어둠 속에 살지. 그리고 별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 어둠에 파묻힐지언정.”

“흑마법사군요?”

셀린느의 목소리엔 놀라움과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래. 깜박이는 별은 흑마법사로 변화해 가는 마법사고. 그만큼 마법사는 위험…….”

“……풉.”

셀린느의 웃음소리가 마차 안을 뒤흔들었다.

“하, 하하, 아하하…….”

“이게 그렇게 재미있는 얘긴가?”

레온하르트는 어리둥절해져 물었지만, 셀린느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내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정말, 여긴 다른 세상이군요.”

북부가 황도와 많이 다른 건 사실이었기에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느는 한결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레온하르트에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뭐가?”

“덕분에 별을 봐도 슬프지 않네요.”

“……?”

레온하르트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이, 셀린느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셀린느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들은 움직이는 마차 안이었고, 햇살이 한가득 들어왔다. 지난밤 잠 한 번 깨지 않고 푹 잤기 때문에 전신에 활력이 흘러넘쳤다.

‘레온하르트!’

셀린느의 머리를 충격이 강타했다. 그녀가 한 번도 깨지 않았다는 말은…….

“레온하르트!”

생각보다도 먼저 말이 목에서 튀어나왔다. 곧바로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향해 몸을 숙이고 따발총처럼 질문을 쏟아 냈다.

“어디 아픈가? 마차를 세울까? 아니면 악몽이라도 꾼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어제 밖에서 잤어요?”

“보초를 섰지.”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아프거나 불안해 비명을 지른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대놓고 안도하며 뒤로 물러섰다.

“안에 있기로 했잖아요!”

“찬 공기가 마시고 싶었을 뿐이다.”

셀린느는 어이가 없어져 레온하르트를 훑어보았다.

눈 밑 다크서클은 처음 보았을 때와 동일한 수준으로 돌아가 있었다. 게다가 눈이 충혈되고 조금씩 기침을 하는 모습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어제 자신의 죽음이 보통 죽음이었나.

그 꿈을 혼자서, 그것도 야외에서 버텨 내다니.

셀린느는 기가 막혀 침묵하다, 간신히 한마디를 만들어 냈다.

“감기 걸렸군요.”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북부에서 나고 자랐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 말도록.”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꼬치꼬치 따지고 들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배려한 행동이었기에, 레온하르트를 책망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 밤부터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기묘한 의무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이런 문제도 없겠지.’

셀린느는 표정을 풀고 화제를 돌렸다.

“언제쯤 도착하나요?”

“거의 다 도착했는데?”

“네?”

“창밖을 봐라.”

셀린느는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다가 혀를 깨물 뻔했다.

그들은 거대한 성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성이 아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탑 수십 개와 그 사이를 잇는 연결 통로로 이루어져,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성이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성이었다.

‘말도 안 돼…….’

셀린느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절망감에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녀는 이 성을 알았다.

메인 스토리와는 상관없는 히든 스테이지로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유령성.

‘너무 어려워서 중간에 때려치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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