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뭐라고요?”
셀린느는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 반문했지만, 레온하르트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 가문은 황도에서 철수한 지 오래다. 리카르도 전하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어.”
셀린느의 침묵이 길어지자 레온하르트는 이유를 헛짚고 황급히 설명했다.
“어차피 이건 황실 임무야. 그러니 내게 필요한 것이 그 무엇이든 황실이 지원해 주는 건 당연하지.”
“여자를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
“그래. 전하께선 내가 북부에서부터 데려온 레이디로 아셔. 그러니 말만 적당히 맞춰 주면…….”
셀린느는 머리를 짚었다.
북부 대공의 후계자인 데다가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듯한 레온하르트에겐 당연히 약혼녀가 있을 터였다.
“지금 그 말, 모르는 사람 입장에선 어떻게 들리는지 아세요?”
레온하르트가 순간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더니, 알겠다는 듯한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북부의 레이디라고 해서 그런가? 어차피 곧 소속이 북부가 될 테니, 거짓말은 아니지.”
“그게 아니라, 제가 애인처럼 들리잖아요! 그것도 북부에서부터 애지중지 데려온!”
“……아.”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는 동시에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렇군.”
셀린느는 의기양양하게 쏘아붙였다.
“네. 그렇다고요. 심지어 약혼도 하셨을 거 아녜요!”
“약혼은 안 했다.”
레온하르트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으니, 미래의 내 약혼녀에 대한 미안한 감정도 버리도록.”
“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황태자에게 말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놀랐다.
“왜요?”
“…….”
레온하르트가 대답 대신 허공만을 노려보자, 셀린느는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
“괜찮아요, 말하기 어려운 거면. 그냥 좀 놀랐을 뿐이에요. 어쨌든, 애인이라고 하면 서로 곤란하잖아요? 나중에 말만 좀 잘해 줘요.”
“……알겠다.”
순간 레온하르트의 머릿속에 애인이라는 설명이 가장 간편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셀린느가 싫어할 것 같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셀린느는 순식간에 어두워진 레온하르트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괜한 걸 물었나 봐요. 미안해요.”
그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간 셀린느가 알게 될 일이지만, 왜인지 지금 자신 앞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그녀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게 쉽지 않았다.
북부의 후계자인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여태까지 결혼은커녕 약혼조차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이유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겨우 열다섯 때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마물과 흑마법사들을 베었다.
마물은 마음이 없는 삿된 정령들이니 벤다 해도 별다른 부작용이 생기지는 않았다.
흑마법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라쉬르를 휘두르는 젊은 늑대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했고, 한 명 한 명 죽어 나갈 때마다 레온하르트에게 강력한 저주를 퍼부었다.
레온하르트 본인은 타고난 마력과 끊임없는 수련으로 저주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았다.
하지만 그의 후계는 흑마법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다. 흑마법사들은 바로 그 점을 노렸다.
그들은 라쉬르에 찢겨 죽을 때마다 레온하르트 베르누이의 자손은 대대로 썩어 문드러지리라고 저주했다.
당연히 레온하르트는 자식을 낳을 생각도, 결혼할 생각도 없었다. 동생이 둘이나 있으니 조카를 후계로 들이면 될 것이다.
-덜컹!
마차가 급정거했다. 긴장을 푼 채 의자에 기대어 있던 셀린느는 순식간에 바닥에 코를 박을 뻔했다.
그녀를 붙잡은 레온하르트가 아니었다면.
“고마워요.”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빳빳한 긴장 태세라는 점을 알아차렸다. 그는 곧바로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공자님, 여기서부턴 혼자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황태자가 마물 토벌을 위해 붙여 준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실력이 출중하지는 않지만 경험이 많아 의견을 들을 가치가 있는 자였다.
“왜 벌써부터지?”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마물들은 일반적으로 기사단과 함께 처단한다.
그가 홀로 맞서는 경우는 마물의 우두머리만 남았을 때였다.
“이걸 봐 주십시오.”
기사단장이 손짓하자, 한 병사가 손수레에 정체불명의 덩어리를 싣고 힘겹게 다가왔다.
“헉……!”
셀린느는 숨을 들이켰다. 피투성이 허물이 손수레 가득 남겨져 있었다.
모양은 매미 허물과 비슷했지만,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사람만 한 크기가 매미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미 늦었군.”
“네. 동족을 다 잡아먹고 변태한 듯합니다.”
“알겠다. 혼자 들어가지. 다들 이곳에서 대기하도록.”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잠시 동안 셀린느에게 머물렀다.
“저어…… 이 레이디는?”
“같이 간다.”
“네?”
기사단장과 주위의 병사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만류했다.
“공자님, 아시지 않습니까! 레이디를 데려간 채로 임무를 수행하시는 건 무리입니다!”
“맞습니다. 게다가 그 광경은 어떻고요? 레이디께선 기절하실 겁니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와 눈을 마주쳤다.
“그건 문제가 될 수도 있겠군. 기절할 것 같나?”
“아뇨.”
셀린느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저는 기절 잘 안 해요.”
“하기야, 더한 상황에서도 기절은 안 했지.”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셀린느의 손을 꼭 쥐었다.
“레이디도 동의했으니, 함께 가겠다.”
기사단장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무병을 호출했다.
“……의무병, 입구에서 대기하라!”
“그럴 필요 없네.”
“제 생각엔 필요하다고 봅니다!”
레온하르트는 더는 토를 달지 않고, 셀린느를 조심스레 잡아끌며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셀린느는 자신의 등에 내리꽂히는 수십 개의 시선을 무시한 채, 오직 앞만 보며 걸어갔다.
깊은 숲길은 사람 두 명이 겨우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숲은 고요했다. 으레 들려올 법한 산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무얼 보든, 내 등 뒤에만 있어.”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가 얼마나 사기 캐릭터인지는 게임 플레이를 통해 충분히 알고 있다. 자신은 그 마물 우두머리가 어떤 놈이든 간에 무사할 것이다.
둘은 말없이 길을 계속 걸어갔다.
“너무 긴장했군.”
“긴장 안 할 수가…….”
그때, 허공을 찢듯 날카로운 소리가 셀린느의 귀를 강타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귀를 막으며 레온하르트의 등 뒤에 꼭 붙었다.
쿵, 쿵, 쿵.
심장 소리에 맞춰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눈물이 찔끔 나오려고 해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등만 쳐다보았다.
무엇이 일어나든, 무엇이 들리든, 무엇이 보이든.
자신은 그의 등에 꼭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
레온하르트가 약속했으니까.
-화르르!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 셀린느는 살짝 고개를 내밀고 앞을 보았다.
“……!”
푸른 불꽃이 라쉬르를 휘감고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이 가리키는 곳엔…… 아름드리나무만 한 마물이 꿈틀거렸다.
혐오감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허물에서 보았던 발톱과 이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되려 집채만 한 구더기와 비슷한 형상이었다.
“잘 들어. 우리는 움직이지 않아. 저놈이 우리를 잡으러 올 거고, 내 뒤에만 있으면 모든 건 끝난다.”
도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이 육중한 몸을 뒤틀며 그들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셀린느가 마물의 혐오스러운 숨결을 막 느꼈을 때, 레온하르트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챙!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살덩이처럼만 보이던 마물이었다. 그런데도 라쉬르로 내려치자 마치 금속을 내리친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빌어먹을.”
레온하르트가 나직하게 욕을 내뱉더니, 몸의 자세를 살짝 바꾸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큐웨에에엑!”
마물이 몸을 뒤흔들며 그들을 덮치려는 찰나, 철로 된 방벽이 그들을 뒤덮었다. 강철이 은처럼 번뜩였다.
‘라쉬르야.’
셀린느는 바로 깨달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라쉬르를 방벽으로 바꾼 것이다.
“곧 없어지니, 대비하도록.”
셀린느는 눈을 꼭 감았다 떴다. 레온하르트는 다시금 검 형태의 라쉬르를 쥐고 있었다.
“웅크려!”
셀린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최대한 몸을 작게 말았다.
-챙! 챙! 챙!
레온하르트는 그들이 선 자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흘낏 본 그의 목덜미는 땀으로 흥건했다.
셀린느의 마음에서 불안이 피어올랐다.
아무리 레온하르트라 한들,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마물의 우두머리와 싸워본 경험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셀린느의 마음을 옥죄었다. 그녀는 이제 믿지 않게 된 지 오래인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제발 제 존재 때문에 지지 않게 해 주세요.’
-쿵!
갑자기, 묵직한 굉음과 동시에 땅이 울렸다.
셀린느는 화들짝 놀라며 위를 쳐다보았다. 마물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칠흑 같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끝났어. 고생 많았군.”
셀린느는 목이 먹먹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라쉬르를 검집에 집어넣고 손을 내밀었다.
“계산대로라면 변태 중 도착했어야 했는데, 변태가 완료된 이후 도착해 좀 힘들었군. 그래도 초기라 아주 힘들진 않았어.”
레온하르트의 설명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셀린느는 부들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어 레온하르트의 팔을 꼭 잡았다. 잡은 옷자락이 마물의 피로 질척거렸지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많이 힘든가?”
레온하르트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나가요. 나가요 빨리.”
“잠깐만.”
레온하르트는 죽은 마물로 몇 걸음 걸어갔다. 셀린느는 차마 뒤를 따를 수 없어 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다.
“이 녀석의 핵을 빼어가야 해.”
“핵이요?”
“마물들의 심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핵이 있어야 학자들이 이것들을 연구할 수 있으니까. 잔챙이들 건 필요 없지만, 우두머리는 다르지.”
레온하르트는 마물에 올라서 라쉬르로 한가운데를 내리찍었다.
-챙!
“뭐……?”
레온하르트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한 마디를 내뱉었지만, 셀린느에겐 마물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기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붙어!”
그제야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에게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아까 보았던 허물과 비슷한 형상을 띤 마물들 수십 마리가 우두머리의 핵으로부터 터져 나와, 숲을 뒤덮었다.
그들의 첫 번째 타깃은 아무런 무기도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아아악……!”
셀린느는 순식간에 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죽었다.
“안돼……!”
레온하르트는 미친 듯이 고함을 내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이럴 순 없었다.
그의 모든 계산은 맞아떨어졌다.
여태껏 경험에 의하면 그의 등 뒤에 셀린느가 있는 것이 마물 따윈 없는 호텔에 있는 것보다 안전했다.
우두머리까지 완벽히 처단했다.
그런데 대체 왜……!
어느새 레온하르트의 잘생긴 얼굴과 멀끔한 옷은 시꺼먼 핏덩이로 뒤덮였다.
마침내 마지막 마물을 썰어 버린 후, 그는 셀린느를 찾기 위해 사방을 헤맸다. 심장이 불안으로 고동쳤다.
여태껏 셀린느는 신체가 손상된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머리가 깨지는 정도였다.
하지만 마물들에 의해 목이 잘렸다면? 살점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났다면? 그래도 되살아날 것인가?
“……하르트.”
그때, 레온하르트의 발 앞, 마물 시체 밑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레온하르트는 미친 듯 마물 시체를 치워 버리고 참혹한 광경과 마주했다.
셀린느가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마물의 검은 피가 아닌, 그녀의 붉은 피로.
금발은 피와 뒤엉켜 본디의 머리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드레스는 갈기갈기 찢어진 채였다.
레온하르트는 허겁지겁 그녀를 일으켰다.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굳어 버린 혀는 말 한마디 내뱉지 못했다.
침묵을 먼저 깨트린 건 셀린느였다.
“이건 좀…… 아팠어요. 오늘 밤 힘드시겠네요.”
레온하르트의 목구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게 올라왔다. 생소한 느낌이라 그는 셀린느가 지적할 때까지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우는 거예요?”
“…….”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은 무지했다.
그리고 오만했다!
그 탓에 셀린느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부족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뭐가요?”
“내 힘이…….”
셀린느는 고개를 저으며 그 말을 부정하려 했지만,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잠시라도 놓아 주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꽉 죄듯 안아 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