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분명 어제, 레온하르트는 검은색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옷에서 가장 화려한 부분이 가슴 한편에 수 놓인 대공가의 문양일 정도로 수수했다.
하지만 지금, 레온하르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쩍번쩍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훨씬 낫군.”
“고마워요.”
셀린느는 진심을 다해 인사했다. 레온하르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그 옷을 계속 입고 있었다간 얼어 죽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지. 그래도 혹시 몰라 치수를 잰 재단사에게 보관해 두라고 말했어.”
“버리라고 하세요.”
셀린느는 어깨를 으쓱했다. 두 번 다시 그 옷을 보고 싶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을 가리켰다. 서버로 보이는 사람과 은접시가 잔뜩 실린 트레이가 식탁 옆에 있었다.
“앉게. 식사해야지.”
셀린느는 서버가 빼 준 식탁 의자에 앉았다.
“지금 시간이……?”
“3시 20분. 어제 못 잔 건 내 탓이니, 자도록 놔뒀네.”
셀린느는 조금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자신 혼자 먹을 거라고 생각했던 점심이, 레온하르트의 몫까지 2인분 놓인 탓이었다.
“아직 안 드셨어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느는 깜짝 놀라 양송이수프를 떠먹던 숟가락을 떨어트릴 뻔했다.
“왜요?”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서.”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셀린느보다도 훨씬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날 보네…….’
셀린느가 음식을 먹으며 레온하르트를 흘낏거릴 때마다 그의 푸른색 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 저한테 뭔가 이상한 게 있나요?”
마침내 셀린느가 참지 못하고 레온하르트에게 묻자, 레온하르트는 의외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밥 먹다가 뭐가 목에 걸려 숨이 막혀 죽은 적 있지 않나. 걱정이 되어서.”
“그건 독충을 먹어서였어요!”
셀린느는 어이가 없어 볼을 붉히며 소리쳤다. 레온하르트는 약간 미안한 어조를 띠었다.
“그랬나? 미안하군. 내가 자세히 알 수 있는 건 또 아니라서.”
“괜찮아요. 하지만 제가 그 정도로 대책 없이 죽지는 않는다고요. 좀 긴장을 푸세요.”
레온하르트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다행이군.”
그는 셀린느가 차의 마지막 한 모금까지 모두 마신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제 황궁에 들러야 해.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오고 가는 시간이 있으니 그동안 조심하도록.”
셀린느의 가슴속 아주 미약한 실망이 싹텄지만, 그녀 자신조차 눈치를 못 챌 정도였기에 셀린느는 웃었다.
“알겠어요. 안 죽을 테니 걱정 말아요.”
***
3년 만에 발을 들이는 황궁은 생소했다.
레온하르트는 주위를 조금씩 둘러보며 대공에게 보고할 정보를 챙겼다.
3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님에도 시종들의 얼굴은 모두 낯설었다.
‘그새 사람이 전부 물갈이되었군.’
좋지 않은 신호였으나 레온하르트 본인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대공가의 문양이 조각된 흑단나무 함을 품에 안고 황태자가 기거하는 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국의 황태자, 리카르도 운소렘은 레온하르트가 들어섰을 때 뒷짐을 지고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로 정원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레온하르트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리카르도 전하께 프레데릭의 아들 레온하르트가 인사 올립니다.”
황태자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서른 중반의 날카로운 눈빛이 레온하르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다 눈 밑 짙은 다크서클에 머물렀다.
“그간 잘 지냈나?”
“……이상 없습니다.”
조소가 황태자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듣자 하니 문제가 크다고 하던데.”
레온하르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가 모르는 게 더 큰 문제이다. 한 제국의 황태자가 그 정도로 무능력한 자라는 뜻이니.
황태자는 레온하르트가 안고 있는 함을 향해 손짓했다.
“프레데릭이 그리 얘기하던 서한인가? 이리 주게.”
레온하르트는 두 손으로 함을 바치고, 황태자가 함 안의 서신을 읽을 때까지 차렷 자세로 기다렸다.
“하…… 하핫!”
황태자는 서신을 골똘히 읽더니, 말미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레온하르트는 가만히 기다렸다. 만약 황태자가 웃은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집으로 돌아가 대공에게 물으면 된다.
“허, 이것 참.”
황태자는 레온하르트와 서신을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레 물어왔다.
“혹시 프레데릭이 이 서한의 내용을 얘기해 주던가?”
“아니오.”
사실 대공은 그가 이 서신을 전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레온하르트 정도 되는 자가 제국의 수도에 오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레온하르트는 베르누이가의 전령에게서 중간에 서신을 전달받았다.
정확히는 망설이던 전령에게서 서신을 반쯤 빼앗은 것에 가까웠지만.
“하! 그런 거였군.”
황태자는 기묘한 웃음소리와 함께 서신을 레온하르트에게 돌려주었다.
“읽어 보게.”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리며 빠르게 서신을 훑었다. 양피지의 절반을 덮는 미사여구와 인사치레 뒤, 간단한 영지의 현황 보고와…….
[제 자식은 아직 미숙합니다. 그만 부려 먹으시길 청하옵니다.]
“아…….”
레온하르트는 양피지 속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굴 전체가 화끈거렸다.
아버지는 일부러 천한 말을 썼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황태자에게 보내는 서신이 아닌가!
“그래,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당사자 아닌가.”
“저는…… 저는…….”
레온하르트는 말을 찾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이제 겨우 스물넷, 정치적 대화를 무사히 넘기기엔 미숙한 나이였다.
그의 아버지의 표현처럼.
황태자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프레데릭이 맞긴 맞아. 그대는 아직 미숙하지.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고풍스러운 서랍을 열어 제국의 문양이 찍힌 봉투를 꺼냈다.
레온하르트는 다시금 무릎을 꿇어 교지를 받는 자세를 취했다.
“대체 왜 그대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레데릭이 보내지 않은 건 확실하군.”
황태자의 목소리엔 아직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잘됐어.”
레온하르트는 교지를 천천히 열어 보았다. 예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그대는 북부의 마물들만 상대했지. 지원은 충분히 해 줄 테니 이쪽도 좀 정리해 주게나. 자네도 제국의 신하니 할 도리는 해야지.”
황태자는 3년 동안 레온하르트가 북부를 벗어나 전 제국을 돌아다니며 벤 우두머리 마물과 흑마법사들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바짝 마른 입 안을 잠시 적셨다. 어려울 것 없는 임무였으나 머릿속에 떠오른 불안을 해소하려면 황태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전하, 한 가지 청만 들어주십시오.”
“무언가?”
“여자를 한 명 데려가야 합니다.”
“뭐?”
황태자는 깜짝 놀라 눈을 몇 번 끔벅이더니 알겠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대가 그럴 나이긴 하지. 내가 고를까? 아니면 그대가 직접…….”
“그런 게 아닙니다!”
레온하르트는 버럭 고함을 쳤다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네. 특별한 레이디인가 보군.”
“……예.”
“그럼 그에 맞는 준비를 해 주지. 북부의 레이디인가?”
레온하르트는 잠시 머뭇거렸다.
“맞습니다.”
어차피, 이제 곧 그녀는 북부에 기거하게 될 것이다. 대공가가 그녀의 신분을 보장할 터이니 북부의 레이디라는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그러면 북부로부터 시녀는 여럿 데려왔겠군. 알았네. 레이디가 머물 만한 숙소와 마차, 허드렛일을 할 일꾼들을 보내 주지. 내일 출발하게.”
레온하르트는 차마 시녀 한 명 없다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러면 황태자는 그녀의 신분을 캐물을 것이고, 대체 왜 레온하르트가 셀린느를 데려가려 하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감사드립니다.”
레온하르트는 정중히 인사한 후 궁을 최대한 빠르게 빠져나왔다.
머릿속엔 일분일초라도 빨리 셀린느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세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죽고도 남았을 만한 여자다.
“허억…….”
좀체 숨이 차지 않은 레온하르트였으나 최대한 빨리 뛰어오느라 가쁜 숨을 내쉬며 객실 문을 열었다.
셀린느 헌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잠깐 현관에서 멈칫거렸다.
조금 전까지 무언갈 먹던 도중이었던지 입술이 반질거렸고, 놀란 토끼 눈은 순식간에 반달이 되었다.
“왔네요!”
단순히 안도감으로선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레온하르트의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동시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별일…… 없었나?”
“안 죽었어요.”
셀린느는 풉 하고 웃다, 자신에게 드리워진 그림자에 놀라 얼굴을 굳혔다.
다음 순간, 그녀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사람의 체온과 숨소리, 사방에서 그녀를 압박해 오는 힘이 느껴졌다.
굳어진 머리는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풀렸고, 그녀는 그제야 레온하르트가 성큼 다가와 그녀를 꽉 껴안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뭐 ……뭐예요.”
레온하르트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셀린느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며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웃기게도, 그 역시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겁한 표정과 달아오른 뺨.
“이…… 이건…… 미, 미안하다.”
레온하르트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
“저기요.”
셀린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온하르트는 마치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손을 얼굴에서 떼 내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셀린느의 뺨은 여전히 붉었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화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제가 아직 안 죽은 게 기뻐서 그랬죠?”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좀 자제해요. 아니면 말하고 하든가. 깜짝 놀랐다니까요!”
“……레온하르트.”
“네?”
“레온하르트라고 불러. ‘저기요’보단 나을 테니.”
셀린느의 눈이 다시 반달이 되었다.
레온하르트가 자신이 왜 그 반달을 볼 때마다 심장이 쿵쾅대는지를 깨닫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셀린느의 대답에 안도하는 것뿐이었다.
“좋아요. 제 이름은 알죠? 셀린느 헌트. 좋을 대로 부르세요.”
***
셀린느는 양옆에 가득 쌓인 쿠션을 어루만지며 행복하게 신음했다.
“너무 좋다…….”
호화로운 마차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화려하고 편안했다. 그녀 건너편에 앉은 레온하르트는 사탕을 우물거리기 시작한 셀린느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알겠지? 절대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 돼. 무슨 일이 생겨도 내 옆에만 있으면 절대 죽지 않을 테니까.”
“알았어요, 알았어.”
셀린느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온하르트는 지금 똑같은 말을 수십 번 하고 있었다.
어젯밤, 레온하르트는 한 달 하고도 보름 만에 처음으로 정상적인 잠을 잤다.
오랜만에 맛본 단잠을 다시는 잃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아침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서 잔소리를 퍼붓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호텔에 혼자 있는 게 더 안전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혼자 욕조에 빠져 죽은 전적이 있었기에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다.
“평상시에도 이런 마차를 타고 임무를 수행하나요?”
“아니?”
레온하르트는 뭔 황당한 소리를 하느냐는 얼굴이었다.
“황태자께서 내가 여자를 데려간다고 하니까 내주셨어. 그러니 불편한 건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