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셀린느는 침대에서 반쯤 튀어 올랐다.
대체 이 인간이 무슨 말을……!
심지어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반응에 상당히 어리둥절해 보였다.
“왜 그렇게 놀라지?”
셀린느는 진짜 그 이유를 모르겠냐고 쏘아붙이려다,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침착하자, 침착해. 이 인간은 그저 나를 그만 죽게 하고 싶을 뿐이야.’
조금 전 그녀는 혼자 목욕하다 물에 빠져 죽었다. 당연히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감시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럼 대체 잠을 어디서 잘지가 문제였는데…….
당연히 침대는 논외였다. 대공가의 후계자인 레온하르트에겐 당연히 약혼녀가 있을 것이고, 자신과 한 침대를 써선 안 된다는 상식 정도는 있을 테니까.
셀린느의 눈이 커다란 안락의자에 머물렀다. 왕좌로 써도 될 정도로 화려하고 폭신해 보이는 의자였지만, 침대에 비견될 바가 아니었다.
“저, 오늘만큼은 침대에서 자고 싶어요.”
레온하르트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여자를 침대에서 끌어 내릴 인간으로 보이나?”
여자를 죽일 인간으로는 보이는데요…….
셀린느는 게임 속 레온하르트가 떠올라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태연스레 대답했다.
“그럼 어디서 자려고요?”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방문에 기대앉았다. 살짝 흘러내린 가운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몸은 금방이라도 움직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거기서요?”
“그래. 무슨 문제 있나?”
“문제야 없죠. 하지만 불편하잖아요! 저기 소파나, 안락의자도 있는데…….”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잠깐 갸우뚱했다.
“널 지켜야 하잖나. 보초 태세로 있어야지.”
셀린느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정신 차려! 별 의미 없는 말이야.’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그저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천천히 설명했다.
“잘 때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죽을 수도 있고, 다른 방법으로도 죽을 수 있으니까. 영지에 도착하면 무예가 출중하고 믿을 만한 호위 시녀를 붙여 주지.”
“그래도 거기서 잠은…….”
“어차피 안 자느니만 못한 잠을 자는데, 침대나 여기나 똑같지 않나.”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레온하르트는 군인이다. 당연히 이것보다 훨씬 못한 잠자리에서도 자 보았을 것이다.
그녀는 자리에 누워 두꺼운 이불을 턱 끝까지 잡아당겼다. 기분 좋은 무게감과 따스한 온기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잘 자요.”
셀린느는 너무나 피곤해 자신의 말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 시간 뒤.
레온하르트는 숨을 쌕쌕 내쉬며 자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깊은 잠에 빠진 여자의 얼굴은 정말 평온해 보였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부러웠다. 곧 그에게 세상 무엇보다도 두려운 수마가 덮칠 테니까.
그나마 오늘이면 끝난다는 점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잠이 들지 않기 위해 부릅뜬 레온하르트의 눈이 어느새 감기며 고개가 떨어졌다.
익숙한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 끔찍한 집.
말라 죽은 담쟁이들이 벽면을 뒤덮고, 성한 창문 하나 없는 으스스한 건물의 외양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했다.
레온하르트는 금세 눈에 익은 여자를 찾아냈다. 셀린느 헌트는 집으로 들어가던 참이었다.
그때, 레온하르트 자신이 나타났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곧 레온하르트는 그 감각이 자신이 아닌, 셀린느의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셀린느는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만을 느끼다가, 곧바로 큰 공포를 느끼며 달아났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와 자기 자신의 추격전을 숨이 턱턱 막히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저러지 말았어야 했다.
당연히 셀린느로선 겁을 먹었을 것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낯선 사내가 윽박을 질러 대는데, 겁을 먹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공포에 질린 여자는 지붕으로 달아나려고 시도했다.
-쿵!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셀린느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녀는 방금 단말마가 들려온 곳으로 머리를 돌렸다.
‘세상에.’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벽에 기댄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셀린느는 바로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이봐요! 일어나요! 그냥 꿈이에요!”
하지만 신음을 토해 내는 레온하르트에게 그녀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셀린느는 조심스레 그의 몸을 흔들었다. 레온하르트의 몸은 깊은 잠이 들었는데도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고통이 셀린느를 휩쓸었다. 하지만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레온하르트를 눈을 똑바로 뜨고 응시했다.
‘조심해야 해.’
레온하르트는 지금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갈 것이다. 이 상황에서 그를 자극했다간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일어났어요?”
“…….”
레온하르트는 잠시 눈앞의 광경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바닥에 너부러진 채, 명백히 고통을 호소하는 셀린느를 본 새파란 눈이 경악에 흔들렸다.
“……꿈이야.”
“꿈이 아니에요!”
셀린느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봐요, 당신 꿈이면 내가 이미 죽었겠죠. 하지만 안 죽었잖아요?”
“…….”
레온하르트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문득 그 모습이 무척 약하게 느껴져 셀린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
“됐어요. 죽은 것도 아닌데.”
“아니. 아까, 그 집에서.”
셀린느는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그런 일로 사과를 할 법한 인물이었던가?
“네?”
“나 때문이었잖나.”
레온하르트는 진중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안하다. 그렇게 무서워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어.”
“……뭐, 어차피 되살아났잖아요.”
셀린느는 가벼운 농담을 던졌지만, 심각한 분위기를 바꾸지는 못했다.
“가서 자. 피곤해 보이는데 깨워서 미안하군. 그리고…… 내던진 것도.”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엔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이 가득했다.
“사과는 한 번 했으면 됐어요.”
셀린느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 지었다.
“다음 꿈은 좀 더 낫겠죠.”
“그렇지도 않아. 계속 반복되니까. 두 번 죽었으니, 두 꿈을 번갈아 계속 꾸겠군.”
“아…….”
셀린느는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언제까지예요?”
“해가 뜰 때까지.”
“제가 죽는 모습을 그때까지 계속…….”
“그래. 두 번이니 두 죽음을 번갈아 보겠군.”
“해가 뜬 이후에 자는 건 어때요?”
“……낮잠은 더 끔찍해.”
레온하르트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는 것처럼 손을 내저었다.
“자, 이제 그만 자도록.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셀린느는 편치 않은 마음으로 침대로 돌아갔다. 방금 레온하르트 때문에 바닥과 부딪친 정강이가 아팠지만, 푹신한 이불은 금세 고통을 완화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선잠과 악몽을 계속해서 오갔으니까.
“허읍……!”
레온하르트는 눈을 번쩍 떴다.
청회색 큰 눈이 그의 코앞에 있었고, 어깨에 여자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레온하르트는 신음에 가까운 말을 토해 냈다.
“또…… 깨웠나 보군.”
“괜찮아요.”
셀린느는 약간 불안한 표정이었다.
“혹시 깨우는 게 싫으시면…….”
“…….”
레온하르트는 잠깐 침묵했다.
솔직히, 깨우는 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스스로 깨어나거나 누군가가 깨워 주기 전까진 그 끝없는 고통을 계속 겪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깨우는 게 낫다고 얘기하면, 셀린느는 대체 어떻게 잔다는 말인가?
“싫지는 않아. 하지만 네가 불편하겠지.”
“왜요?”
레온하르트는 잠시 말문이 막혀 셀린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셀린느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물에 젖은 금발이 수면 등의 따스한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날 계속 깨울 테니 본인이 잠을 못 잘 게 아닌가.”
“아.”
셀린느는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이었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잠은 못 자요. 비명 소리에 일어나니까.”
“비명……?”
“자꾸 안 된다고 비명을 지르시던걸요.”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가 꿈속에서 고함친 것도 처음이었다. 당연히 잠꼬대로 비명을 지른 것도 처음이었고.
여태껏 그녀가 아무리 꿈에서 죽어 대도 고통스럽기만 할 뿐 눈앞의 죽음을 막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왜일까.
오늘 단 반나절 같이 있었을 뿐인데, 꿈속에서 눈앞의 여자가 목숨을 잃는 순간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미안하군.”
“어쩔 수 없잖아요.”
레온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서 자려고요? 잘 생각하셨어요.”
“아니. 내 방으로 가겠다.”
셀린느는 바로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저 때문이군요. 악몽 때문에 제가 못 자니까.”
“그래.”
레온하르트가 방문을 열 때, 셀린느가 황급히 그를 만류했다.
“어차피 오늘까지잖아요. 특별히 오늘만 깨워 드릴게요. 여기 있으세요.”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돌아섰다. 이불 속에 폭 파묻힌 작은 여자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도감이 들었다.
조금 전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게 한 그 여자가 눈앞에 멀쩡히 살아 있다.
“도움이…… 많이 될 것 같군.”
“다행이네요.”
셀린느가 푸스스 웃었다. 레온하르트는 긴장이 조금 풀려 문에 기대앉았다.
두 사람은 각기 수마에 저항하려고 애썼으나, 성공하기에는 너무 긴 하루였다.
마침내 태양이 희뿌연 하늘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며 떠올랐다.
셀린느는 기진맥진하여 침대 위로 쓰러졌다. 레온하르트는 순식간에 잠든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긴 밤이었다.
하지만 최근 한 달 하고도 보름 동안 레온하르트가 겪은 가장 안온한 밤이기도 했다.
***
셀린느는 기지개를 켰다. 푹신한 베개가 손에 눌리자 감동의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방문을 응시했다. 레온하르트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푹신한 카펫에 자국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아리송한 것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분명 휑했던 공간엔 색색깔의 리본으로 포장된 상자들이 가득했다.
세 개, 네 개씩 쌓여 그 사이를 걷다 와르르 쓰러뜨리지 않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셀린느는 조심스레 침대에서 가장 가까운 상자를 열어 보았다.
‘뭐지?’
조심스레 들어 올려 보니 셀린느의 몸에 딱 맞을 만한 부드러운 나이트가운이었다.
셀린느의 가슴이 점차 두근거렸다.
굳이 나가서 이게 다 뭔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자고 있는 사이, 레온하르트가 옷들을 모두 주문한 모양이었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셀린느는 상자를 신나게 열어 보았다.
상자마다 신세계가 펼쳐졌다.
각종 털가죽으로 이루어진 외투 세 벌과 두껍고 화려한 드레스 다섯 벌, 별다른 장식이 달려 있지 않은 드레스 세 벌, 열 벌은 넘을 법한 페티코트, 심지어 스타킹과 속옷까지…….
셀린느는 나이트가운을 훌렁 벗고 페티코트와 비교적 간소한 드레스를 입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무엇보다도 깨끗한 새 옷이라는 게 그녀를 절로 미소짓게 했다.
셀린느는 옷을 다 입자마자 거울도 보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레온하르트에게 한시라도 빨리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일어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