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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4화 (4/120)

4화.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레온하르트는 조심스럽게 말을 멈춰 세운 이후, 셀린느가 말에서 내리는 걸 도와주었다. 하인이 곧바로 다가와 말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

셀린느는 휘황찬란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활짝 열린 대문으론 화려한 옷으로 몸을 감싼 사람들이 오고 갔다.

베르누이가와 친분이 있는 귀족 저택인 듯했다.

레온하르트가 언짢다는 투로 말했다.

“별장으로 가야 하겠지만, 아버지께서 거길 싫어하셔서 지금은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는 상태야.”

“여긴 어디죠?”

“그랜드 호텔. 처음 보나?”

셀린느의 머리는 잠깐 정지했다.

‘이 게임에 호텔이 있었나……?’

레온하르트의 손에 이끌려 로비로 들어섰을 때도 그녀는 계속 멍한 상태였다.

‘눈부셔…….’

셀린느는 천장에 빼곡히 달린 샹들리에와 사방의 금박 장식, 대리석 벽면 중 눈을 둘 장소를 찾지 못했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붉은 문양이 어지러이 그려진 대리석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대단하네.’

하기야, 대공의 후계자가 몸을 누일 곳인데 평범한 곳은 아닌 게 당연하다.

머리가 반절 벗겨지고 배가 튀어나온 지배인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아이고, 공자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3년쯤 되었지.”

“미리 전령을 보내셨으면 이렇게 기다리지 않으셨을 텐데…… 근데 이 아가씨는……?”

“내 일행일세.”

“셀린느 헌트예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 아 반, 반갑습니다.”

지배인은 셀린느가 당당히 자신을 소개하자 흠칫 놀라며 그녀를 훑어보았다.

셀린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더 이상 죽지만 않는다면 남들이 자신을 무어라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방은?”

“당연히 있습죠. 모건! 모란실이야.”

셀린느는 직원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다, 문득 든 생각을 입 밖으로 냈다.

“방은 두 개인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두 개나 필요한가?”

“아무래도 같은 방은 좀 그렇잖아요?”

셀린느는 의아해하며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녀만큼이나 어리둥절해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게…… 됐어요.”

셀린느는 설명을 포기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침대만 분리되어 있으면 큰 상관은 없었다.

‘보기보다 구두쇠네.’

하지만 셀린느는 직원이 문을 여는 순간,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깨달았다.

문이 열리자 짧은 복도와 아담한 홀, 열 개 남짓 되어 보이는 문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곳 방은…… 다 이런가요?”

“다 이렇다니?”

“이건 방이 아니라 집이잖아요!”

“집이라니? 이게 어딜 봐서 집인가?”

“전 당연히 침대만 있는 방이 나올 줄…….”

레온하르트는 황당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설마 침실만 빌린다고 생각했나? 그렇게 빌려주는 호텔이 어딨어.”

아주 많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셀린느는 굳이 속내를 내뱉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나팔을 부는 작은 천사 조각이 새겨진 문을 가리켰다.

“내 여동생이 쓰는 침실이다. 여성에게 필요한 건 다 마련되어 있을 테니, 저길 써.”

셀린느는 아무 생각 없이 방문을 열었다가, 숨을 들이켰다.

별천지가 펼쳐졌다. 바닥엔 폭신한 자줏빛 카펫이 깔려 있었고, 모든 벽면엔 꽃밭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한쪽 벽면엔 오직 이 방만을 위한 난로가 보였다.

무엇보다도 침대가 셀린느의 눈을 사로잡았다. 거대하고 폭신한, 그 어떠한 함정도 없는 침대.

셀린느가 체면 따위는 잊은 채 침대로 달려가려는 찰나, 직원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공자님,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아, 바로 보내도록.”

식사!

갑자기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동안 따뜻한 음식이라곤 먹어 보지 못했다.

저택을 뒤져 나온 동전 몇 푼으로 동네 빵집에서 가장 싸고 딱딱한 빵을 사는 게 하루의 행복일 정도였다.

최근엔 그마저도 떨어져, 쉰내가 풀풀 나는 밀가루를 물에 타 먹는 게 식사였다.

셀린느의 목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평범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배가 불러오는 것 같았다.

“혹시 못 먹는 음식이 있나?”

“없어요! 다 좋아요!”

셀린느의 눈이 반짝거렸다.

잠시 뒤, 셀린느는 거대한 마호가니 탁자 위 하나씩 놓이는 은접시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프, 동네 빵집에서 가장 비싼 메뉴보다 더욱 맛있어 보이는 빵, 싱그러운 야채가 가득한 샐러드, 냄새만 맡아도 황홀해지는 비프스튜, 톡톡 터지는 송어알이 올라간 연어구이까지…….

사라지는 게 아까워 조심스레 떠먹는 것도 잠시, 그녀의 앞에 놓이는 음식들은 게눈 감추듯 사라져 버렸다.

레온하르트는 자신 반대편에 앉아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음식을 싫어하는 건 아닌가 보군.”

“그럴 리가 있나요.”

셀린느는 혀에서 황 녹아내리는 레몬 셔벗를 음미하며 웅얼거렸다.

“워낙 말라서 음식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닌가 했다. 주위에 그런 경우를 본 적 있어서.”

“없어서 못 먹었거든요?”

셀린느는 잔 한가득 따뜻한 차를 따르고 행복한 한숨을 내쉬었다.

“좋네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정말 마음에 든답니다.”

셀린느는 자리에서 일어서다 잠깐 비틀거렸다.

한 달 하고도 보름만의 포식은 그녀를 살짝 어지럽게 만들었다. 즉각 몸을 굳히는 레온하르트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잘 먹어서 그런가 봐요.”

“조심해. 악몽은 하루에 한 종류로 충분하니까.”

“내일부턴 전혀 안 꾸실 텐데, 뭐가 걱정이세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레온하르트는 언짢게 대답했다.

“네가 그 집에서만 죽는 거면 몰라도, 길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죽은 적도 있지 않나. 조심해야지.”

“……정말 다 보셨군요.”

“그리고 오늘도 볼 예정이지.”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가서 쉬겠나?”

“네!”

셀린느는 활기차게 대답하며 방문으로 다가갔다.

“좋은 꿈 꾸세…… 아, 어, 음…… 힘내요!”

“…….”

레온하르트가 어이없다는 듯 헛기침했지만, 셀린느는 침대에 뛰어드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폭신했다!

“아…….”

셀린느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빨리 이 너저분한 옷을 집어 던지고 이불 속에 파고들어 가고 싶었다.

‘잠옷이 있으려나? 가운도 좋은데.’

그녀는 잠시 뒹굴거리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진 공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건 뭐지?’

셀린느는 카펫의 부드러운 감촉을 만끽하며 걸어가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어……?’

고풍스러운 나무 욕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셀린느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 끔찍한 저택에서도 욕조는 있었지만, 물을 틀면 벌레가 뒤섞인 녹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후다닥 도망쳤다.

셀린느는 거대한 수도꼭지를 힘겹게 돌렸다.

뜨거운 김이 쏟아져 나왔다.

셀린느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목욕이다.

싸늘한 날씨가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그간 제대로 몸을 씻어 본 적이 없었다. 우물에서 직접 퍼 올린 물을 전신에 끼얹는 수준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뜨겁고 따뜻한 물로 가득한 욕조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셀린느는 옷을 훌렁 벗어 던졌다. 욕조에서 올라오는 김 덕에 전혀 춥지 않았다.

-풍덩!

따스한 물이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셀린느는 노곤한 몸을 길게 뻗었다. 욕조는 어른 두 명이 누워도 될 만큼 컸다.

“좋다…….”

셀린느의 입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이런 기분은 죽음이 도사리는 삶에 던져진 이후 처음이었다.

배는 부르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포근한 침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셀린느는 도저히 육체적인 만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곧 그녀는 답을 찾았다.

안전함에서 오는 안도감이었다.

더는 배앓이를 두려워하며 썩어 들어가는 음식을 주워 먹을 필요도, 함정에 수십 번씩 죽어 가며 푼돈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자신의 숙면을 위해 그녀에게 안전을 제공해 줄 테니까.

셀린느는 좀 더 자신과 그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려 했지만, 물은 너무나 따뜻했고 그녀의 노곤한 몸은 긴장이 풀려 가고 있었다.

곧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

“꺄아악!”

모란실에서 가장 큰 침실에 있던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집어 들고 방을 뛰쳐나갔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셀린느의 침실로부터 끊임없는 비명이 들렸다. 그간 꿈속에서 수십 번 들은 비명이 아닌, 낯선 목소리가 내지르는 비명이.

“무슨 일인가!”

“공, 공자님, 아, 아, 아가씨께서……!”

호텔의 메이드는 혼비백산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레온하르트는 반쯤 그에게 매달리는 메이드를 성큼 지나쳐 셀린느의 침실로 들어갔다.

“……!”

레온하르트의 눈이 흔들렸다.

나신의 여성이 욕조에 반쯤 걸쳐져 있었다. 어깨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마른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원, 원랜 완, 완전 잠, 잠겨 있으셔서…… 숨, 숨, 숨이…….”

메이드가 오열하며 상황을 설명하던 바로 그때.

욕조의 물이 요동치며 인영이 움직였다.

메이드가 숨을 들이켰다.

레온하르트는 이마를 짚으며 등을 돌려 방을 나섰다. 머리가 아파 왔다. 긴 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셀린느는 눈앞의 메이드를 난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오랜만에 긴장이 풀려 그만 물속으로 꼬르르 잠수해 익사하고 만 모양이었다.

잠이 들어 죽는 줄도 몰랐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미안해요. 많이 놀랐죠?”

“괜, 괜찮으세요? 아, 아, 아까 숨을 안 쉬셔서…….”

메이드는 겁에 질린 눈으로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아주 멀쩡해요! 보세요, 숨을 이렇게 잘 쉬잖아요?”

셀린느는 보란 듯이 씩씩 콧김을 내뿜었다. 솔직히, 이런 죽음이면 천 번도 더 죽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메이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왜 들어오셨어요?”

“공, 공자께서 너무 급하게 오셔서 준비를 미처 못, 못 해서 지금 하려고.”

이 불쌍한 메이드가 얼마나 놀랐을지를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셀린느는 고개만 끄덕였다.

“혹시 수건 있나요?”

“네…….”

메이드는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며 그녀에게 몸을 다 감싸고도 남는 크기의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잠옷은 없죠?”

“가운은 있는데…….”

바로 셀린느가 원했던 것이었다.

셀린느가 몸을 닦고 가운을 입는 사이, 메이드는 거듭 그녀에게 의사가 필요한지 물었지만 셀린느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 멀쩡해요. 저, 보기보다 훨씬 튼튼하거든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메이드는 난로에 불을 붙인 후 돌아갔다. 셀린느는 따스한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값비싼 침대에서 자는 호사를 만끽하려 했다.

똑, 똑.

셀린느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저지른 일이 있어 그냥 잠든 척할 수가 없었다.

“들어오세요.”

레온하르트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이트가운 사이로 탄탄한 몸이 언뜻 보였다.

또다시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셀린느를 휘감았다.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리지도, 위협적인 제스처를 취하지도 않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 탓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

레온하르트의 강렬한 눈빛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번엔 대체 뭐였지?”

“잠들었어요.”

“하…….”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미안해요.”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조심 좀 해.”

“알겠어요.”

셀린느는 구구절절한 변명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부주의 탓에 오늘 제법 고통스러운 밤을 겪게 될 것이다.

“이젠 적어도 목욕하다 물에 빠져 죽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래 보여도 기억력은 좋거든요.”

“……기억력은 좋지만, 너무 덤벙대더군.”

레온하르트가 꿈으로 본 셀린느는 한 번 죽은 모든 함정을 기억하지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죽는 여자였다.

“미안하게 됐네요. 앞으로 조심하죠.”

“…….”

레온하르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셀린느는 잠에 꼴까닥 빠져들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더 할 말 없으시면 전 이만 잘게요.”

셀린느가 무거운 눈꺼풀을 지탱하려 노력하는 사이, 레온하르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있는데.”

“뭐죠?”

레온하르트 특유의 단정적인 말이 셀린느에게 내리꽂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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