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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3화 (3/120)

3화.

셀린느는 잠깐 얼이 빠져 있다가, 거세게 항의했다.

“저도 죽고 싶어서 죽는 게 아닌데요!”

“그래? 이 날씨에 그런 옷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

셀린느는 반박할 수 없었다.

집 안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옷이라곤 빙의 당시 입고 있었던 얇은 여름용 드레스와 잠옷 한 벌뿐이었다.

지금은 11월로 무척 추웠다. 하지만 저 사람 죽이는 집 안에만 있다간 미쳐 버릴 것 같아 웬만하면 마당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독감에 걸려 죽은 적도 있지. 왜 두꺼운 옷을 입지 않나?”

레온하르트는 진중한 목소리로 셀린느의 기억을 일깨웠다.

“옷이 없어요.”

“겨울옷 한 벌 없다고? 그게 말이 되나?”

“저에겐 이 옷뿐이에요.”

셀린느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

이번엔 레온하르트가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확인해 보실래요?”

“아니, 됐어.”

레온하르트는 손사래를 쳤다. 그는 다 쓰러져 가는 대저택을 눈으로 훑었다.

“저곳은 지긋지긋하게 겪었으니까.”

깨진 창문들과 녹슨 문, 담쟁이가 뒤덮은 벽들이 그간의 악몽을 연상케 해 몸서리가 절로 쳐졌다.

‘오늘 밤에도 꾸겠군.’

레온하르트가 인상을 팍 찡그리자, 셀린느가 작은 웃음을 내뱉었다.

“저도 싫어요.”

“다행이군. 이제 북부에 살게 될 테니까.”

“네?”

셀린느의 아연실색한 반응에 레온하르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 여자를 북부로 데려가 조사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거부할 가능성은 생각지도 않았다.

저 몸서리쳐지는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 살 선택권이 있다면 누구나 환영하리라 생각했으니까.

“왜, 싫나?”

“아, 아뇨, 싫은 게 아닌데…….”

문득 레온하르트는 정보원의 보고가 떠올라 얼굴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내 정보원들이 널 데려오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 놓치고 말았다더군. 혹시 이 집이 그렇게 좋다거나……?”

“그게 당신 정보원들이었어요?”

셀린느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래. 그만큼 이 집이 좋다면 나도 강제할 순 없지.”

“아뇨! 그,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이것도 저주 같은 건데, 전 이 집에서 멀리 못 가요. 그게 다예요.”

“멀리 가면 어떻게 되지?”

“장막 같은 게 절 밀어내는 게 느껴져요. 더 나가면 어느 순간 저 집 안으로 돌아와 있고요.”

부르르 몸을 떠는 셀린느를 내려다보는 레온하르트의 이마에 작은 주름이 졌다.

“……설마 그거였나.”

“네?”

“알 것 같다. 네 저주를 풀 방법.”

셀린느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눈앞이 아득했으며 귓가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질러 댔다.

‘이건 저주야! 풀 수 있는!’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굴러떨어진 다음에야 그녀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눈치챘다.

“그 툭하면 죽었다 살아나는 저주 말고, 이 집에서 떨어질 수 없는 저주.”

“아.”

셀린느는 바싹 긴장해 들어 올렸던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실망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꼼짝없이 이 끔찍한 집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게다가 이 레온하르트는…… 멀쩡해 보였다.

게임의 레온하르트는 눈에 핏발에 섰고, 사람보다는 맹수에 가까운 살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어딜 보나 말쑥한 귀족이었다. 셀린느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게임 초반에 조금 풀린 설정을 기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온하르트 베르누이.

북부의 젊은 늑대이자 명검 라쉬르의 주인, 제국의 수호자.

제국 유일한 마검사인 그의 어깨에 모든 흑마법사와 마물을 처단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이 얹어졌다.

겨우 열다섯에 그 짐을 받아들인 레온하르트가 결국 흑화하고 만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가 흑화하게 된 계기나, 게임의 주인공을 죽이려 드는 진짜 이유는 오직 진엔딩에서만 알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엔딩 스포일러 볼걸…….’

셀린느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스포일러는 좋아하지 않아 피하고 다녔던 게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아직 레온하르트가 제대로 얘기하진 않았지만, 북부로 가자는 그의 말엔 자신이 죽지 않도록 도와주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아니, 감시하겠다는 뜻으로 생각해야 할지도.’

셀린느는 이마를 짚었다.

결정은 정말 쉽지 않았다.

‘오래 걸리는군.’

레온하르트는 참을성 있게 셀린느 헌트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녀는 눈앞의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듯 입으로 무어라 중얼대며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래, 아무리 저주받은 집이어도 자신의 집을 떠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마침내 셀린느는 고개를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녀의 두 눈은 여태껏 그 누구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 결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좋아요. 절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너무 기대하진 마.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

“기대 같은 거, 안 한 지 좀 됐어요.”

대답에서 느껴지는 씁쓸함이 제법 강렬해, 레온하르트느는 살짝 움찔하며 화제를 돌렸다.

“북부까지는 멀지. 그동안 내가 조심해야 하는 것들을 알려 줘. 최근 한 달 반 동안 일어난 것들은 꿈으로 전부 봤으니, 빼고.”

“음…….”

셀린느는 잠시 망설였다.

“없나?”

“아뇨, 너무 많아서요.”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 여자가 죽기 시작한 건 한 달 반 전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생각을 잠시 정리한 셀린느는 바로 리스트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 고산에 올라도 죽어요.”

“난 등산 싫어해.”

“배를 타도 죽고요.”

“……거 참 연약하군.”

“말이 너무 빨리 달려도 죽어요.”

“…….”

레온하르트의 눈에서 짜증이 번득였다. 셀린느는 재빨리 한마디 덧붙였다.

“아, 당신이 제일 많이 절 죽여요!”

“뭐……?”

아차.

셀린느는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을 사람을 만나 들뜬 나머지 애꿎은 말을 내뱉은 혀를 끊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레온하르트의 손이 검집을 향해 움직였다.

“대체 그게 무슨 뜻이지?”

셀린느는 입술을 초조하게 깨물었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떻게든 레온하르트가 믿을 법한 변명을 꾸며 내야 했다.

“미래를 볼 줄 아나?”

“……네.”

셀린느의 입 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그래도, 흑마녀는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푸흡.”

“어……?”

“하, 하하, 하하하!”

몸을 뒤흔들며 웃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셀린느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레온하르트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이렇게 실컷 웃어 본 게 얼마 만이던가. 눈앞의 여자는 흑마법사를 본 적조차 없는 게 분명했다.

“흑마녀라고 생각했다면 진작 베었다.”

“아…….”

“흑마녀라면 내가 라쉬르를 빼 든 순간, 진작 흑마법을 썼겠지. 하지만 넌 나를 단 한 번도 공격하지 않더군.”

“그래서 검을 거둔 거였군요.”

레온하르트는 싱긋이 미소 지으며 검집을 툭, 쳤다.

“라쉬르는 그렇게 쉽게 더럽힐 검이 아니니까. 자, 이제 말해 봐. 대체 무슨 미래를 본 거지?”

“……제가 죽는 꿈을 꾼다고 했죠.”

“그래.”

“저는 미래에 제가 죽는 꿈을 꿔요.”

레온하르트의 눈썹이 꿈틀였다.

“다 이뤄지던가?”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요. 그런데 당신이 자주 나타나 나를 죽였어요.”

“흐음.”

레온하르트는 턱을 어루만지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여자는 분명 흑마녀가 아니다.

하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

자신이 실제로 이 여자를 죽인다면, 이 여자가 흑마녀가 되었을 때리라.

“제가 언젠가는 흑마녀가 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아니?”

셀린느가 토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난 예언자들은 믿지 않아.”

레온하르트는 정말로 믿지 않았다.

믿는다면, 진즉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어야 했으니까.

베르누이 대공의 후계자가 탄생한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선 붉은 별이 떨어졌다.

모든 예언가들이 레온하르트가 훗날 제국에 큰 화를 가져올 징조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북부의 대공은 전부 쓸데없는 미신으로 치부했고, 어릴 때부터 아들에게 예언자들의 헛소리를 귀담아듣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런 그가 초짜 예언자의 말을 들을 리가 만무했다.

“뭐, 제 말을 안 믿으셔도 상관없어요. 절 죽이지만 않는다면.”

셀린느는 정말 개의치 않는다는 투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 죽일 테니, 따라오기나 하도록.”

***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벗어 준 두꺼운 외투에 얼굴을 파묻었다. 말은 처음 타 보았지만, 레온하르트가 무척 조심스레 몰았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다.

“괜찮나?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어지러운 곳은?”

“없어요.”

레온하르트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을 몰았다. 오늘 밤 이미 끔찍한 악몽 하나가 예약되어 있다. 부주의 탓에 하나를 더 꾸고 싶지는 않았다.

“아악!”

문득 셀린느가 작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레온하르트는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었다.

“더 가면 안 돼요.”

셀린느가 가쁘게 숨을 내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긴가?”

레온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외관상 특이할 게 하나도 없는 길 위였다.

하지만 셀린느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레온하르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집에서 라쉬르를 빼냈다.

“무, 무슨 짓을…….”

셀린느는 겁에 질려 레온하르트를 막으려 했으나, 그는 거침없이 움직여 라쉬르로 허공을 갈랐다.

-챙!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셀린느는 홀린 듯 라쉬르를 바라보았다. 허공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라쉬르의 날은 붉게 빛났다.

마치 흑마법을 베었을 때처럼.

‘설마.’

레온하르트는 검을 집어넣었다.

“시시한 결계로군.”

“결계라니…….”

셀린느는 신음을 토해 냈다. 그동안 자신을 막아선 건, 절대 거역할 수 없는 게임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계였을 뿐이다.

이 세계의 캐릭터가 충분히 파괴할 수 있는.

말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긴장감에 몸을 곧추세웠다. 소름이 전신에 쭈뼛 끼쳤다.

그동안 이곳을 얼마나 지났고, 얼마나 그 끔찍한 저택으로 되돌아갔던가.

“너무 긴장하지 마라. 또 죽을지도 모르니.”

“…….”

셀린느는 대답할 수 없었다. 먹먹함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여전히 말 위였다.

“정말…… 정말이군요.”

“나는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아.”

셀린느는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이 잘 닦인 도로를 물들이고 있었다.

여태껏 한 번도 지나가지 못한 길.

말은 천천히 움직였고,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세상이 그녀 앞에 펼쳐졌다.

가슴 한편에서 생소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움터 올랐다. 더는 품을 수 없으리라 생각한 감정이…….

희망.

셀린느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품 안의 여자가 몸을 미세하게 떨며 울고 있었다.

“어디 아픈가?”

“아, 아니에요!”

셀린느는 고개를 휘저었다.

“그럼 왜 울지?”

레온하르트가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셀린느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으로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무, 너무 기뻐서요.”

레온하르트는 한 번도 기쁨의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기에 셀린느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 몸을 의지한 채 들썩이는 여자를 추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여자를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

“떨어질 것 같아서.”

레온하르트는 무뚝뚝하게 말하며 그녀를 감싸 안았다. 셀린느가 할 수 있었던 말은 오직 한마디뿐이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정말 오랜만에, 타인의 온기가 셀린느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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