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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20)화 (120/120)

# 외전 6화

뮌제는 무릎 꿇었다. 퍽. 두 무릎은 거의 깨지는 소리를 내면서 나무 바닥에 부딪혔다. 지체 높은 로헤올 공작은 천하고 더러운 마법사에게, 그녀가 그토록 혐오하는 마법사에게 몸을 낮추었다.

바깥에서 비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 사이로 비 냄새가 들어오는 듯했다.

비가 시작된 지 시간이 꽤 흐른 듯 빗소리가 세찼다.

뮌제 로헤올 공작은 나무로 된 집 안에 서서, 벽난로 옆에 서 있는 우아한 노부인을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노부인이 장난치듯 벽난로 안에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하고 있는 책을 보고 있었다. 노부인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무릎 꿇었음에도 노부인은 장난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공작은 온 마음을 다해 정중하게 말했다.

“그대가 나더러 죽으라 하면 죽겠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기는 수준이었다.

숙이고 있는 뮌제 로헤올의 머리통을 보는 일레인의 새파란 눈이 살짝 커졌다. 아무리 그래도 공작이 이 정도로 절절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일레인의 그 동요 어린 표정은 뮌제 로헤올이 고개를 들었을 때 바로 사라졌다.

공작은 양 무릎에 두 손을 올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존귀한 로헤올의 가주는 빌었다.

“무엇을 요구해도 받아들일 테니 그 책을 한 번만 보여 주십시오.”

“…….”

“단 한 번이면 됩니다.”

일레인은 자신이 들고 있는 책의 표지를 새삼스럽게 살폈다.

제목.

《악마에게 삼켜진 자를 위하여》

저자.

세실 리욘.

저자가 악마를 죽인 영웅으로 기록된 여성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 책에 특별할 것은 없었다.

뛰어난 마법사인 일레인은 입을 열었다.

“각하.”

뮌제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연회색과 파란색. 맑지 못한 두 시선이 서로를 응시했다.

온건한 마법사, 즉 상식적인 마법사로 이름이 난 노부인은 무릎 꿇은 공작을 향해 미소 지었다. 마법사들의 원수. 마법사들의 최대 적수. 마법사들을 잡아들이는 데에 눈 돌아간 비마법사. 마법사가 아닌 불쌍한 자.

“이게 왜 필요하신 건지 물으면 대답해 주실 건가요?”

“예.”

“그렇군요. 하지만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일레인 손안의 책에는 새까만 불이 붙었다.

불이.

그 어떠한 조치도 할 수 없게, 그 불은 단 1초도 되지 않은 시간에 책을 전부 태웠다. 일레인의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시커먼 숯덩이 같은 것은 바닥에 부딪히며 군데군데 바스라졌다.

멍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뮌제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꿈인가? 꿈, 인 건가? 현실이면 안 되는데. 현실이면…….

뮌제는 엉금엉금 기어가 그 시커먼 덩어리 앞에 멈췄다.

그녀의 두 손이 그 꺼먼 것을 차마 만지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추었다. 손끝만 닿아도 더 부스러질 것 같았다.

안 돼…….

안 돼…….

그때, 이 새카만 잔해 앞에 서 있던 마법사의 발이 튀어나왔다.

파삭. 파삭.

책의 형태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게 잘근잘근 밟은 발은 이내 치마 아래로 들어갔다. 노부인은 나직하게 웃었다.

뮌제는 마치 마비된 것처럼 감각이 이상한 손을 올려 귀를 더듬었다.

귀가 아팠다.

너무 시끄러운 것을 너무 오랜 시간 들은 것 같이. 귓구멍에 딱딱한 것을 오랜 시간 끼고 있었던 것 같이.

귀가 아팠다.

빗소리가 들렸다. 쏴아아.

뮌제의 바로 옆에서 온몸의 피부에 화상을 입은 일레인이 쓰러졌다. 옷도 전부 타서 살갗에 달라붙은 듯했다. 아직 살아는 있지만 고통에 기절한 마법사의 얼굴을 멍하게 눈에 담았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 * *

그로부터 3개월을 더 산 일레인의 생명은 중앙탑 탑주의 손자에게 옮겨 갔다. 뮌제 로헤올이 산길에서 죽은 후의 어느 날이었다. 아직 중앙탑에서 요양 중이던 때.

훗날, 윌리엄이 죽던 날, 라파엘이 한 노마법사에게 실행하려 했던 그 마법을 써서, 뮌제는 일레인에게 되갚은 것이다.

죽고 싶지 않아 하는 마법사를 죽임으로써 뮌제는 보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레인이 태워서 읽지 못한 그 책은 한으로 남을 것이다.

뮌제는 흠칫 눈을 떴다.

그녀에게 어깨를 빌려주고 있었던 시녀가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뜬 뮌제는 천천히 몸을 세웠다.

악몽을 꾼 탓인지 온몸이 저릿했다. 눈가를 잠시 짚고 있던 뮌제는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나 쉬었나.”

“십 분도 쉬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

십 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참 알차게도 끔찍한 기억을 되새겼다.

요즘 조금 피곤하게 지냈더니 귀신같이 꿈이 찾아들었다. 모르는 새 정신이 조금 약해진 모양이었다.

뮌제는 고개를 들었다. 후원의 퍼걸러에서 쉬고 있었던지라 얼굴 위로 볕이 드리웠다. 덥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선선하지도 않았다. 이만 들어가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뮌제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득해져서 비틀거렸다.

“전하!”

시녀가 황급히 일어나 대공비를 부축했다.

눈을 찡그린 뮌제는 곧바로 똑바로 섰다. 그러나 시녀는 걱정스럽게 권유했다.

“전하. 여기서 조금 더 쉬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동안 제가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야.”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 그저 피곤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요즘 온느발레가 흔들리는 탓에 나네트가 몹시 과감해져서 밤낮으로 경계하고 있느라. 새 로헤올 공작이 뮌제나 윌리엄만큼 정치 외교적인 방패가 되어 주지 못하고 있으니, 뮌제와 윌리엄의 시대에 로헤올이 버텨 주었던 그 분량만큼 황제에게 부담이 더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황제는 몇 년 안에 자괴감 속에서 라파엘에게 죽을 사람이다. 그걸 생각하면 요즘 피곤하게 경계하는 수고 정도는 별것 아니었다.

그리고 라파엘에게는 비밀이지만 아침에 마법을 썼다. 이렇게 몸이 축축 늘어지는 건 팔 할이 오늘 아침의 마법 탓일 터였다.

뮌제는 퍼걸러에서 벗어나 본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새벽에 나간 라파엘이 슬슬 귀성할 시간이 되었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다가, 그녀는 작게 하품했다. 아침나절에 침실에서 일어난 유혈 사건은 그에게도 비밀로 하고……. 뮌제는 또 하품했다.

라파엘을 생각하자마자 몸의 긴장이 풀려서 이런다.

눈물에 젖은 눈을 깜박이며 걷던 뮌제는 어느 순간 한숨처럼 말했다.

“졸려…….”

맞은편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눈물에 번져서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누군지는 당연히 알았다.

무거운 향이 점점 가까워졌다. 뮌제는 자신을 안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또 작게 하품하자, 그녀를 안고 있는 남자가 낮게 웃었다. 기분 좋은 진동이 느껴졌다. 축축 늘어지는 팔을 들어 라파엘을 마주 안은 뮌제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라파엘이 부드럽게 물었다.

“피곤해?”

“응.”

가까스로 대답했다. 아마 그대로 잠든 것 같다.

사실, 상황을 가리지 못하고 바깥에서 잠든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라파엘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 정도로 몸이 좋지 않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라파엘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그래서 한밤중에 깨어난 뮌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를 알아차린 뒤 당황했다.

그녀의 몸이 굳었다. 그러나 일어난 사람의 호흡이 있을 때부터 뮌제의 기상을 알고 있었던 라파엘은 입을 열었다.

“뮈즈.”

“…….”

뮌제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라파엘은 뮌제가 일어날 때까지 잡고 있던 손이 조금 구부러지는 걸 느꼈다. 맞잡으려고 하는 거다. 그는 한숨처럼 웃었다.

“같이 오래오래 살자.”

“…….”

“난 너 없으면 살지 않을 거야.”

호문클루스로 생명을 채움이 없이 마법을 쓰면 뮌제의 수명이 줄어든다.

라파엘은 뮌제가 되도록 마법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걸 알았다. 따라서 화를 낼 것도 실망할 것도 결코 아니며, 반려로서 할 수 있는 경고만 하면 되었다. 당신이 죽으면 나는 살지 않을 거라 하는.

뮌제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말 하지 마.”

초승달이 떠 달빛이 거의 없는 어둠 속에서 라파엘은 희미하게 미소했다.

그리고 말을 돌렸다.

“필요하니까 마법을 썼을 텐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더라.”

“……마법만 안 썼어도 말했을 거야.”

“알아. 어디 다친 건 아니지?”

“다치지는 않았어. 피곤해서 반응이 조금 늦어서……. 검은 잡지도 못했어. 위험해서 마법으로 제압한 거야.”

이 정도 들었으면 되었다.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받은 라파엘은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손을 풀고 다시 잡았다. 그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뮌제 에흐베. 연회색 눈동자. 금색 머리칼. 찬란한 웃음. 느긋한 휴식. 오후. 고즈넉한 평온.

그의 평온.

그의 심장.

그의 생명.

그의 숨.

라파엘은 옅게 한숨을 흘리고 그녀의 손을 내려놓았다. 잠시 집무실에 다녀오기 위해 이만 일어나려던 그는 직후 뮌제의 손에 셔츠를 잡혔기에, 순순히 끌려 내려갔다.

침대를 짚은 그를 뮌제는 두 팔로 껴안으려 했다. 라파엘은 옅게 웃고는 팔을 조금 더 굽혀서 그녀에게 안겼다.

뮌제는 안도한 것처럼 짧게 숨을 내쉬더니 속삭였다.

“라피, 내 휴식.”

라파엘은 멈추었다. 심장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뮌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네가 있어야 쉴 수 있어.”

“…….”

[맞아. 네가 있어야 마음 놓고 쉴 수가 있어…….]

멈춰 있던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뱉었다. 숨결이 뮌제의 턱선에 떨어졌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라파엘은 고개를 내려 뮌제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맥박이 느껴졌다. 미쳐 버릴 것 같다는 기분이 언뜻 들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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