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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19)화 (119/120)

# 외전 5화

“그런데 백작이 됐네. 에흐베의 그쪽 법도까지는 나도 모르는데, 에흐베는 작위를 받아도 공가에 들어갈 수 있나? 온느발레는 가능한데.”

“…….”

옥타브는 몸속 장기가 떨린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이 순간 깨닫는 중이었다.

어떻게도 반응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기만 했다.

그걸 눈치챈 건지 뮌제는 힐끔 그를 보고는 말을 돌렸다.

“하여튼. 경. 왜. 내게 용건 있는 모양인데.”

“아. 예. 이거……. 그간 뮌제 님께 온 것들입니다.”

반색한 옥타브는 뮌제에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뮌제는 미소했다.

“내 방에 내려놓지, 뭘 수고롭게 여기까지 들고 와. 수고했네. 할 일도 많을 텐데.”

“아닙니다.”

사실 뮌제의 방에 가다가 뮌제를 보고 방향을 틀었다.

옥타브는 뮌제가 들고 있던 책을 건네받고 바구니와, 꽃다발까지 내밀었다. 뮌제는 멈칫했으나 꽃다발을 먼저 안아 들었다. 꽃 사이에 꽂힌 카드를 확인한 뮌제의 표정은 애매했다.

“이런…….”

“뮌제 님께서 어제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입니다. 오늘 보내 왔습니다.”

“꾸준하군.”

옅게 한숨을 쉰 그녀는 다시 카드를 꽃다발 사이에 꽂았다. 바구니 안에 있는 서신들의 발신자들을 전부 확인하고 나서, 뮌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 * *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펜을 움직이고 있던 뮌제는 라파엘을 반겼다.

“일할 시간 아니야?”

라파엘의 하루하루 일정을 전부 알고 있어 두 사람 사이에서 이런 말은 이상하지 않다. 라파엘은 옅게 웃었다.

“괜찮아. 뭐 하고 있었어?”

라파엘은 벗은 겉옷을 베르제르 등받이에 걸쳐놓고 뮌제가 앉아 있는 티 테이블로 다가왔다.

뮌제는 다가오는 그를 보다가 펜을 들어 보였다.

“서간 쓰고 있었어.”

뮌제에게 도착한 서신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라파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연회색 시선은 뮌제가 앉은 의자 옆 바닥에 놓인 꽃다발에 향했다. 그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더니 난처해하는 웃음을 그렸다.

“화병에 꽂아 달라고 하지.”

“됐어. 아니야.”

뮌제에게 반한 티를 정중하고 우아하게 내는 청년을 너그럽게 용인한 지도 어언 반년이었다.

로헤올 공작을 버렸다고는 하나, 전 로헤올 공작이라는 사실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을 터인데도 이리 마음을 정중하게 주장해 오는 게 신기하기도 하였고 기특하기도 하였다.

보내 오는 꽃과 서신을 받지 않고 돌려보내기도 미안해서 받아 주었었는데, 이제는 선을 그을 때가 된 것 같았다. 오늘에서야 결심이 섰다.

라파엘은 뮌제가 다시 펜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잠깐 그 펜끝에서 피어나는 글자들을 보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리고 다시 글자들을 보았다.

라파엘의 표정이 묘해졌다.

“뮈즈. 그거…….”

“어?”

거꾸로 보고는 있었지만 아리오어는 결코 아니라는 건 알았다.

“아. 이거? 이리 와 봐.”

뮌제가 라파엘에게 손짓했다. 그녀의 허락을 받은 라파엘은 뮌제가 옆에 내려놓은 꽃을 피하여 뮌제의 뒤에 서서, 그녀가 쓰고 있던 서신을 살폈다.

“……우리가 만들었던 암호야?”

“응. 근데 온느발레어로 바꿨어.”

뮌제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본디 이런 글자를 가진 암호는 그들이 에흐베어 기반으로 만든 암호였다.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기도 하였다. 어떤 문제가 있어서 한두 번 글을 써 보고 파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걸 또 온느발레어로 바꿔서 써 본 건가.

라파엘은 편지를 살피다가 웃으며 몸을 세웠다.

온느발레어 문법상 주술의 순서를 생각하여 한두 단어 정도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으나 문장 단위로는 해독할 수가 없었다.

“누구한테 보내는데 암호를 써?”

뮌제에게 편지를 보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전부 보고 받았다. 그중 온느발레인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라파엘은 물었다. 뮌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클리포드 후작에게. 처음으로 편지가 와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은여우단 일로 정보를 묻더라고.”

“아하. 그가 이 암호를 알아?”

뮌제는 열심히 펜을 움직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라파엘은 말없이 그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등 뒤에서, 그리고 위에서 꽂히는 그 시선을 느끼고 있던 뮌제는 입을 열었다.

“라파엘.”

“아……. 응?”

정신을 차린 그가 그녀를 보았다. 그를 돌아본 뮌제는 가만히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지난 일 년.

라파엘은 뮌제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변했다.

뮌제가 로헤올 공작일 때는 이것저것 당당하게 주장하더니, 로헤올 공작이 아닌 지금, 오히려 몹시도 조심스러워졌다.

……감정을 요구할 때는 그리도 밀어붙이더니.

뮌제는 펜을 내려놓고, 다리를 움직여 의자에 옆으로 앉았다. 장식된 등받이에 왼손을 올린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음 편치 않은 게 있으면 말해. 싫으면 싫다고.”

그러자 라파엘은 옅게 웃었다.

“미안. 신경 쓰이게 했네.”

“그런 거 아니야. 라파엘. 내가 후작과 연락하는 게 마음 편하지 않으면 말해.”

“나야말로 그런 거 아니야. 뮈즈. 네 친구와 연락하는 것에 내 감정을 살피지 않아도 돼. 살필 필요도 없어.”

“…….”

누차 말해 왔던 바다.

라파엘은 이리 말해도 뮌제의 표정이 펴지지 않자, 난처해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뮌제가 쓰던 편지를 일별한 그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팔을 뻗었다.

뮌제는 쓰다 만 편지를 라파엘이 가져가는데도 제지하지 않았다. 라파엘은 꾹꾹 눌러 쓴 글씨를 눈에 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네가 이 사람들이랑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가져 온 건지를 모르니까. 그래서 그래.”

“……어?”

“제이 왕세자야 너와 어떤 관계였는지 나도 옆에서 봐 왔지만……. 이제는 내가 모르는 네 시간이 있는 거잖아.”

말은 산뜻했다.

속은 새까만 늪이었다.

그 시간.

지울 수 있다면 지워 버리고 싶다.

윌리엄을 살리겠다고 고생하고 수고한 그 시간을, 뮌제에게는 미안하지만,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와 함께 만든 암호를 엘르시어 클리포드와 공유하게 되었다는 시간. 그가 해독하지 못하는 암호를 두 사람이 공유하게 되었다는 시간.

하지만 이미 보낸 시간이며, 지울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이 내심을 굳이 뮌제에게 털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아직은 아니었다.

라파엘은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편지를 다시 뮌제 앞에 내려놓았다.

뮌제의 시선이 그 손길을 가만히 좇았다. 편지를 놓고 몸을 세우기 전에 라파엘은 허리를 조금 더 숙였다.

두 사람의 코끝이 가볍게 맞닿았다.

뮌제의 눈이 커지는 순간, 라파엘은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뮌제가 반사적으로 조금 움츠렸지만 그를 피하지는 않았다.

입술을 떼는가 싶던 그는 다시 한번 뮌제에게 닿았다. 이번에는 오른손이 그녀의 머리 뒤를 감쌌다. 뮌제의 고개가 부드럽게 젖혀졌다. 혀가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두 사람의 위로 오후의 서늘한 그림자가 졌다.

숨이 차는지 뮌제가 턱을 당겼다. 그녀의 고개가 약간 내려가자 입술이 얼기설기 서로에게 빈틈을 맞췄다가 멀어졌다.

순순히 그녀를 놓아준 라파엘은 그녀의 코끝에 입을 맞추고 몸을 세웠다.

쿵쿵.

뮌제는 눈을 찡그렸다. 심장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너무 컸다. 라파엘에게 다 들릴까. 슬슬 창피해졌다. 라파엘은 그녀와 다르게 그저 평소처럼 웃고 있는데.

그때 라파엘이 손끝으로 뮌제의 눈가를 쓸었다.

아직 장갑을 끼고 있어서 그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다정하게 느끼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에 뮌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에 라파엘이 슬며시 웃고는 손을 거두었다.

아마 뮌제의 반응을 오해한 것 같았다. 그는 오른손 장갑을 벗더니 손등에서 이어지는 검지 첫 마디로 뮌제의 입술을 훔쳤다. 빛날 만큼 촉촉하게 남아 있던 타액이 조금 닦였다.

라파엘은 다시 장갑을 꼈다.

“쉬고 있어.”

조금 전보다 살짝 가라앉은 음성이 부드럽게 그녀를 토닥였다.

뮌제는 등받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라파엘.”

“응?”

베르제르에서 겉옷을 집어 들던 라파엘이 그녀를 보았다.

뮌제는 당연하다는 듯 와닿는 시선을 마주하다가 테이블 위의 편지를 일별했다. 다시 라파엘을 보았다.

“아까, 옥타브 경과 잠시 대화를 했는데.”

“응.”

“내가 떠날 사람 같다고 하더라고.”

라파엘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푹 한숨을 털어 낸 뮌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네가 홀에서 어떤 백작과 이야기 중인 걸 보고 있었거든.”

“…….”

“그러니까 경이 와서, 너와 그 백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굳이 설명을 하는 거야.”

뮌제는 라파엘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그때까지는 딱히 별생각 없었는데, 그걸 듣고 나니까 궁금해져서 물었어. 만약에 너랑 그 백작이 연인이라면 내가 어떻게 할 것 같냐고. 그러니까 경이, 떠날 것 같다고 대답하더라.”

“…….”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경이 날 잘 봤어.”

라파엘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간 표정. 눈동자에 스쳐 지나간 감정. 냉혹한 멈칫거림이 지나가는 걸 뮌제는 보았다.

그래도 뮌제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각별한 친구이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래도 네 연인에게는 실례가 될 테지. 나는 떠날 거야.”

속내가 어떻든지 간에 라파엘은 빙긋 웃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지.”

뮌제는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담담하게 말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 라파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뮌제는 라파엘의 앞에 서지 않고 베르제르 앞으로 돌아갔다.

굽힌 무릎을 의자 좌판에 괴고 등받이 위에 두 손을 올렸다.

두 사람은 이제 딱딱하면서도 푹신한 등받이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채였다. 라파엘을 올려다보던 뮌제는 우아하게 말했다.

“나, 질투해.”

라파엘의 호흡이 순간 멈추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항상 그의 것이었던 단어를,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어 본 적 없는 단어를 뮌제가 입에 담았기 때문이다. 방 안의 공기마저 멈춘 듯했다.

약간 어두워진 방에서, 전과 같이 마냥 친구는 아니지만 아직 완전히 연인이지도 못했던 두 사람이 마침내 어떤 문 앞에 섰다.

뮌제는 그 문 앞에 서기를 미뤄 왔던 이가 자신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숨을 들이켜고 고백했다.

“라파엘. 난 네가 없는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삶.

공작이 되어 라파엘과 더는 만나지 못하게 되리라고 생각했을 때조차, 뮌제는 라파엘 없는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삶. 삶에는 라파엘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윌리엄을 살릴 방도를 찾던 시간은 곧, 죽음에 몸을 뉜 것과 같이 살아가야 했던 시간이었다. 윌리엄과 함께, 악마와 함께, 그렇게 셋이서 함께 죽을 생각은 하였으나 라파엘 없이 살아갈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네게 연인이 생겨서 내가 떠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

“내게 너에 대한 권리가 평생 있으면 좋겠어.”

아무 말도 없는 라파엘을 올려다보며, 뮌제는 등받이를 잡고 있던 두 손을 뗐다.

두 사람이 나눈 반지가 있는 곳은 뮌제의 손에서는 아직 오른손 약지였다. 그녀는 그대로 두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정중하게 물었다.

“나와 결혼해 줄래?”

* * *

라파엘의 다정한 연회색 눈동자에 웃음기가 깃들었다.

일 년 전, 뮌제가 제이에게 한 말을 들었었다.

[내가 보호할 건 이제 대공과 그의 소중한 것들뿐이고, 그 책임을 나는 살아오며 한 번도 없었던 흔쾌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온느발레도 로헤올도 놓고 떠나온 뮌제에게 남은 책임이 그를 향해 있다는 게 정말.

정말이지.

정말이지…….

뮌제에게 깊이 입 맞추며 라파엘은 내심 웃었다.

드디어 네가 스스로 내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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