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3화
“폐하.”
“대공. 어서 오시게.”
나네트는 라파엘을 그럭저럭 환대했다.
그녀에게 예를 갖춘 라파엘은 뒤따르던 기사에게서 벨벳 상자를 건네받았다. 방의 문이 닫혔다.
근사하게 잘 차려입은 에흐베 대공을 잠시 살핀 나네트는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일세. 공식적으로는.”
“…….”
비공식적으로는 두 군주는 온느발레의 사신단이 출발하던 날에 마주친 적이 있었다.
이미 베르제르에 앉아 있던 나네트는 앞자리를 가리켰다.
라파엘은 먼저 두 의자 사이에 있는 테이블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뚜껑 위를 크고 두꺼운 손이 지그시 누르는 게 보였다.
그 손길을 보았지만 나네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공을 올려다보지도 않았다. 딱히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던 것은 아닌지, 라파엘의 무심한 음성이 떨어져 내렸다.
“제 집무실에서 발각되었던 자들 중 한 명입니다.”
“…….”
“주군에게로 돌아가지 못한 이 남자를 위해 이 남자의 주군이 추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거기까지 들은 나네트가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이리 조그마한 상자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나?”
그러자 라파엘이 꽤 부드럽게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머리입니다.”
“…….”
나네트는 몰라 물은 게 아니었으며, 라파엘 역시 그걸 몰라 대답한 게 아니었다.
나네트는 비로소 부드러운 웃음을 버렸다.
“그래. 대공의 용건은 이게 끝인가. 이제 내 용건으로 들어가겠네. 나도 소식을 듣고 대공과 만나고 싶었거든. 물어볼 게 있어서.”
나네트가 다시 자리를 가리켰다. 용건이 이게 끝이냐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라파엘도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황제는 턱을 들었다. 팔걸이에 양팔을 걸치고 나른하게 앉아 있던 그녀의 입가에 냉한 웃음이 걸렸다.
“그 사람이 죽었다 할 때는 그리도 조용히 외면하더니, 이제 와서 그 사람 옆에 붙어 있는 겐가. 차라리 그 왕자가 더 낫군.”
“…….”
“말해 보시게. 아주 궁금해. 공작이 기분 나빠하지는 않던가. 이제 와서 무슨 낯으로 제 옆에 나타났냐고.”
에흐베 대공의 단정하고 날카로운 얼굴은 어느 곳 하나 구겨지지 않았다.
무감정하게 잠시간 황제를 바라보던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걸 그 사람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실이라……. 대공이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말을 얹지 않았다는 걸 온느발레인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압니다. 제가 그 사람을 찾아 헤맸다는 것을.”
팔걸이 끝에 늘어져 있던 나네트의 손이 움칫했다.
노기가 섞인 숨이 짤막하게 코를 통해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 신뢰. 뮌제가 나네트에게는 도무지 나눠 주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들어간 숨이 명치께로 내려가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네트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황제는 에흐베의 군주에게 물었다.
“온느발레에 이런 소문이 도는 걸 아시는가? 내가 대공을 연모한다고.”
“…….”
라파엘은 말없이 픽 웃었다.
제이가 ‘황제가 대공을 연모한다’고 느끼게 하였던 그 눈빛 그대로, 나네트는 대공을 보았다. 나네트는 여유 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와 대공이 정을 통하여, 그래서 대공이 그 사람을 찾지 않은 것일 수도 있는데.”
“…….”
“그래도 그 사람이 대공을 믿나?”
대공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니, 웃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어딘가가 묘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또다시 그 사람을 다치게 하셨군요.”
나네트의 도발에 대한 대답은 분명 아니었다.
회피하였거나, 무시하였거나.
황제는 재미있어하며 픽 웃었다.
“그래. 대공. 그리했네.”
“그 사람이 어째서 폐하를 해하지 않는 건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차분한 물음을 위한 올바른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황제는 지체하지 않고 느긋하게 반문했다.
“해해? 나를?”
“…….”
“그 사람이 감히 어떻게 그리하겠나.”
뮌제가 감히 황제를 해할 마음을 가지겠느냐는 뜻 반.
뮌제가 감히 어떻게 황제를 해하겠느냐는 뜻 반.
황제는 지존 중의 지존이다. 온느발레의 누가 감히 황제를 해하고 싶어 하는 건방진 마음을 가지겠는가. 또한, 마법사들의 원수가 어쩌고 해도, 온느발레의 황제는 온갖 뛰어난 아티팩트와 특출난 기사들로 보호받고 있었다.
땅에 떨어져 본 적 없이, 항상 구름 위에서, 세상의 꼭대기에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황제의 말이었다.
에흐베 대공은 평온한 얼굴로 그걸 들었다. 그리고 듣고도 흔들리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폐하와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나네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황제의 금안을 바라보며 대공은 천천히, 분명하게, 평안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그 사람에게 바라는 게 너무 컸고 그 사람은 그걸 이루어 줄 여력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바라…….”
말을 하던 나네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목소리가 우뚝 멈추었다.
황제의 표정은 변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변화였다.
에흐베 대공은 그 변화를 눈에 담고도 무덤덤한 낯이었다.
“제이 왕자와 당신이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황제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가면을 쓰는 데에 익숙한 그녀라도 이 순간만큼은 평온을 가장하지 못했다. 뮌제 앞에서 평생 어리고 싶었던 사촌 동생은 진실 앞에서 동요했다.
정확히는, 질투해 온 상대가 전해 주는, 진실 앞에서 동요했다.
“알고 있었다고?”
“…….”
“알고 있었다고…….”
품격 없는 도발에 품격 없는 분노로 맞받아쳤음을 인지할 정신조차 없었다.
가만히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황제의 내심은 격동하는 중이었다.
분노 그 자체가 절망이었다.
황혼의 시간, 수천 마리 검은 박쥐 떼가 뱃속에서 날갯짓하는 것 같았다. 넋 잃을 만큼 규모 큰 생소함이 그녀를 덮쳤다. 그 생소함이 징그럽고 역겨웠다. 어찌할 줄 모르고 나네트는 팔걸이 끝을 내리쳤다.
뮌제. 언니. 당신이. 당신이. 알면서.
그걸 이 남자에게 말까지 해서.
감히 황제의 앞에서도 떳떳하게 앉아 있는 대공국의 군주를 보는 금색 동공이 확장되었다. 머리로 열이 몰린다. 그러나 나네트의 안색은 창백했다.
새하얘진 얼굴을 앞에 두고 라파엘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다정해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을 테니 저라도 말씀드려야 당신이 당신의 가치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게 아니라, 알면서도 당신을 외면한 겁니다. 당신의 가치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뮌제에게 나네트는, 몸소 나서서 죽이려 할 가치조차 없다.’
예사로운 것을 예사롭게 말하는 느낌뿐이었다.
오로지 그뿐.
무언가 대단한 것을 알려 주는 것 같지도 않게 오로지 그뿐.
“당신이 무얼 바라도 될 사람이 아닙니다.”
“…….”
“감히 그 사람을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마십시오.”
“그건 대공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 분수에 넘치는 조언을 하는군.”
씨근덕거리는 호흡을 억누르며 나네트는 싸늘하게 잘랐다.
그러자 라파엘의 눈이 아주 약간 가늘어졌다. 오묘한 표정은 그렇게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확신하건대 그 사람이 보기에 이건, 제가 상관해도 될 부분일 테고 분수에 넘치는 것도 아닐 겁니다.”
“아니. 분수에 넘치네.”
“지금까지는 로헤올 공작이라는 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여 일부러 언행을 삼갔을 뿐, 저는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일에 손대도 괜찮습니다. 그 사람은 제게 무엇이든 허락합니다.”
그리 담담한 얼굴로 말하지 마라. 그리 무덤덤한 얼굴로 말하지 마라. 그리 신뢰뿐인 말만 하지 마라.
나네트는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이 남자가 뮌제와 나눈,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끔찍했다.
황제는 외로운 자리였다. 그러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뮌제가 한 번만 더 그녀를 쓰다듬어 주기를 바랐었다. 아니, 평생. 윌리엄에게 보이는 미소를 그녀에게도 보여 주고, 윌리엄에게 보이는 사랑을 그녀에게도 보여 주고, 나네트에게 평생 충성하고.
국정으로 힘들어 투정을 부리거든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황제를 안아 주기를 바랐었다. 무례한 접촉이지만 용서할 수 있었다.
한 번만.
[제이 왕자가 당신과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뮌제는 체통과 품위를 지켜야 하는 황제의 말 없는 내심을 그따위 한심한 자와 비슷하게 여기고 있었나.
나네트는 턱을 들었다.
입을 벌리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어느새 등받이에서 멀어져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던 등을 다시 등받이에 푹 기댔다.
그녀는 장신구를 달지 않은 오른쪽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뮌제와 닮은 색의 머리카락이 가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황제는 가만히 물었다.
“그 사람이 에흐베로 갈 것 같은가?”
“오게 할 것입니다.”
이제 와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건, 로헤올 공작. 왜.
“그 사람이 대공을 선택할 것 같은가?”
“선택하게 할 것입니다.”
왜 내가 당신에게 멋대로 구는 건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 남자는 이렇게 멋대로 굴어도 허락하는가.
뮌제를 에흐베에 묶어 두겠다는 이런 말을 해도 괜찮다고, 이 남자는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나네트는 할 수 없는가. 온느발레에 묶어두겠다고 어째서 말하면 아니 되는가.
나네트는 피식 웃었다.
“그대는 이상한 데에서 음습한 사람이야.”
라파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에흐베 대공의 단정하게 미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황제는 입꼬리를 올렸다. 저 연회색 눈동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 두 사람이 같은 색을 가지고 있느냐며.
“그 사람이 살아 있어서 기쁘네.”
진심이었다.
“그리고 난 그 사람이 대공을 선택하지 않기를 바라네. 그 사람의 고향은 온느발레야. 그 사람의 가족은 이제 나뿐이지. 나뿐이어야 하지.”
“…….”
“나는 온느발레의 인재가 타국에 남는 걸 좌시하지는 않을 걸세.”
그러자 에흐베 대공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끝이 상자를 툭 밀었다. 머리가 든 벨벳 상자는 황제에게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가까워졌다.
그는 그대로 말했다.
“지금의 온느발레에 무슨 힘이 있습니까.”
“온느발레에 무슨 힘이 있냐니. 대공.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어린아이도 그런 질문은 하지 않을 걸세.”
“유일의 제국이라는 자만에 젖어 무인을 육성하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고, 그나마 가장 무위 높은 집단이 특수 수사기관인 루미나리에단이고, 그 높은 무위를 가진 루미나리에 단원들은 당신이 해하려 한 사람이 모집한 이들입니다.”
“…….”
“뮌제 로헤올 공작이 없는 온느발레에 무슨 힘이 있습니까. 각 왕국이 육성하고 있는 무인들의 수가 온느발레 무인의 수보다 많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지금 대공, 나와 대적하겠다는 건가?”
나네트는 물었다. 경고였다.
그녀는 온느발레의 군주였다.
황제를 대적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무지렁이도 황제의 무서움은 안다.
그런데 에흐베 대공은 약간의 동요도 없이 서늘하게 대꾸했다.
“제 사람들은 제가 온느발레의 황궁에 침입하여 당신을 암살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그들이 보기에 제게는 그럴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
선대 로헤올 공작이 허락하여, 어릴 적부터 뮌제와 함께 수학했다는 건 알았다. 전반적인 성취가 높고 무위도 상당하여 뮌제가 그를 인정하였다는 사실 역시 알았다.
기준점 높은 온느발레 귀족 중에도 대공을 흠모하는 여성이 몇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감히 ‘온느발레의 황궁에 침입하여 황제를 암살’할 수 있는 무위를 말하는 건 아니었다. 뮌제 로헤올조차도, 이제는 마법사임이 밝혀진 뮌제 로헤올조차도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세상의 그 누구도 황궁을 뚫을 수는 없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네트는, 바로 얼마 전 제게 직통으로 도달한 익명의 투서를 떠올렸다.
……뚫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