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2화
뮌제를 의자 위에 눕혔다. 몸 전부를 눕힐 수는 없어서, 두 다리는 어쩔 수 없이 의자 밖으로 떨어졌다.
뮌제의 머리에서 리본을 빼내고 목 뒤에는 옷을 받쳐 주었다. 조금 전까지 라파엘이 입고 있었던 겉옷이었다. 뮌제는 그때부터 낑낑거리며 자기 겉옷을 벗으려 하기 시작했다. 장식이 많아 아무래도 편한 옷은 아닌지라.
라파엘은 나직하게 웃었다.
그는 당연히, 아주 기껍게 뮌제의 시중을 들었다. 뮌제가 누운 채로 겉옷을 벗는 걸 돕고, 흰 새틴 장갑도 벗겼다.
뮌제는 그제야 편해졌는지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완전히 잠이 들었다.
“…….”
뮌제의 장갑을 한 손에 쥔 라파엘은 뮌제의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아서 그녀를 보았다.
그는 빈손을 들었다.
리본을 풀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건드려, 그녀의 뺨 아래로 톡 떨어뜨렸다. 라파엘은 속삭였다.
“난 너와 함께 있든 떨어져 있든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데.”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곳에서 잠들 수 있는 것도 라파엘이 여기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뮌제에게는 그랬다.
그가 있어야 뮌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다. 그가 있어야 뮌제는 마음 놓고 취할 수 있다.
옅은 술 냄새가 나는 숨을 보다가, 라파엘은 입을 열었다.
“뮈즈.”
잠든 그녀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굽힌 검지 바깥으로 살며시 뮌제의 뺨을 쓸었다.
“이제 나를 해하려는 사람이 없는데, 그런데도 대공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라파엘의 연회색 눈동자는 겨울 눈처럼 차게, 가볍게, 하얗게, 그리하고도 꺼멓게 그녀를 담았다.
“너는 로헤올에서 떠날 생각이 없을 테고, 나는 네 옆이어야 하는데.”
그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어떻게 하지.”
라파엘을 죽이고 싶어 하는 부모도, 동생도 죽었으니 이제는 에흐베를 떠나도 되었다. 에흐베가 그에게 준 것이라고는 그를 향한 혐오와 경멸, 위협, 살인미수, 뮌제뿐이었다.
에흐베가 그를 경멸하지 않았다면 그는 온느발레로 도망치듯 떠나야 할 일도 없었을 테고, 그럼 뮌제도 만나지 못했을 터다. 에흐베는 그가 뮌제를 만날 수 있도록 라파엘을 버려 주었다. 고마웠다.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
하지만 그게 라파엘이 대공위에 있어야 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어떻게 하지, 뮈즈.”
라파엘은 조금 전까지 방긋방긋 웃고 있던 뮌제의 입꼬리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내가 있으면 너는 뭐든 할 수 있어.
뮌제가 이리 휴식할 수 있는 이유는, 라파엘이 라파엘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라파엘이 에흐베 대공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은 뮌제가 쉬는 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서.
그건 그가 대공에 있어야 할 이유가 된다.
하지만 그리되면 그가 뮌제의 옆에 있기가 너무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얼굴 볼 일은 없겠지. 난 에흐베에 가지 않을 거고, 너는 여기에 오지 않을 거니까.]
그럼 차라리 묶어 둘까.
여기에 가둬 둘까.
뮌제가 마법사라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윌리엄 따위는 상관없다.
여기에서 편히 쉴 수 있게, 너를 여기에, 내 옆에 묶어 둘까…….
너는 그럼 행복할까.
그러나 그런 그의 의문은 다음 날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틀어막혔다.
새벽과도 같은 아침. 뮌제는 방 안에서 혼자서 발을 구르며 가볍게 춤을 추고 있었다.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몸을 움직이던 그녀는 고개를 발랄하게 왼쪽에서 끄덕끄덕, 오른쪽에서 끄덕끄덕, 머릿속 음악에 맞추어 즐겼다.
이렇게 경쾌한 뮌제는 처음 보았다.
설마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거냐고 당황하던 것도 잠시였다.
아직 가운을 걸친 채로 실내화도 벗고 맨발로 온 침실을 누비는 걸 잠시 지켜보다가, 라파엘은 베르제르의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다행히도 숙취는 없는 건지 안색도 나쁘지 않았다.
그때 뮌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나는 자유롭다!”
웃고 있는 뮌제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그는 문득 웃었다. 그를 본 뮌제의 미소가 더 밝아졌다. 몸놀림도 더 흥겨워졌다.
라파엘은 어젯밤부터 시작된 자유가 아직 끝나지 않은, 어젯밤부터 시작된 자유를 아직 끝내지 않은 사람을 다정하게 보았다.
뮌제는 경쾌한 박자에 맞추어 통통 뛰어 그의 앞에 섰다. 라파엘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자 뮌제는 말했다.
“너도 흐트러지고 싶을 때 말해.”
“……어?”
“내가 지켜 줄게.”
더는 박자를 타지 않는 로헤올 공작이 당당하게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장난스럽게 씩 웃고 있는 얼굴은 온느발레에서 그와 놀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내 모국에서, 다른 나라도 아닌 온느발레에서 나고 자라서 지금까지도 머물고 있고, 가장 힘 있는 가문의 후계자인 데다, 주변에서 강력하게 지지받고 있는 사람이야.]
로헤올의 후계자일 때와 별반 다를 게.
[난 힘이 있어. 난 충분히 널 도와줄 수 있어.]
정말 없었다.
한동안 얼빠진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던 라파엘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머리 위로 뮌제의 짓궂은 목소리가 햇빛처럼 찬란하게 쏟아져 내렸다.
“부끄러워? 왜에. 괜찮아. 어제부터 네가 날 지켜 주는데도 난 안 부끄러워.”
그런 게 아니었다.
하지만, 뮌제의 말이 그에게 너무 따뜻해서, 라파엘은 또다시 웃고 말았다. 그는 한 손을 뻗어 그녀의 손 하나를 잡았다.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간 뮌제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라파엘의 머리를 다정하게 토닥였다.
라파엘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입을 열었다.
“뮈즈. 너는 로헤올을 버리고 싶었던 적 있어?”
“나? 많지.”
그 대답은 선뜻 나왔다.
조금 전 에흐베 대공의 휴식을 돕겠다는 로헤올 공작은 어디 가고. 라파엘은 웃었다.
“그럼 왜 버리지 않아?”
직전까지 즐거워하던 활기찬 웃음은 사라지고, 뮌제는 잔잔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럴 수 없어. 감히 어떻게 그러겠어.”
‘감히’라는 단어는 로헤올 공작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뮌제가 지금까지 누군가에게서 그런 단어로 제지당한 일이 과연 있었을까.
그런데 뮌제는 아주 가끔 자기 스스로 ‘감히’라는 단어로 자신을 낮출 때가 있었다.
[나는 이제 윌리엄을 두고 죽을 수가 없어. 감히 그럴 수가 없어.]
윌리엄과 관련된 때였다.
네게 윌리엄은 짐이다.
“윌리엄을 사랑해?”
“아주 많이. 깊이. 나 자신보다도.”
네게 윌리엄은 사랑이다.
라파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느릿하게 라파엘의 머리를 매만지던 뮌제는 그의 머리 위에 손바닥을 내려놓고 멈췄다. 지그시 내리누르는 힘이 느껴졌다.
“음…….”
“…….”
“라파엘. 버리고 싶어?”
그 질문을 던진 뮌제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건 라파엘을 꿰뚫어 버릴 것처럼 날카롭고 서늘한 시선이었다. 라파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뮌제를 보기만 하자, 그녀는 약간 힘이 들어간 손길로 라파엘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아직 아침이라 머리는 매만지지 않아서 소년일 때처럼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뮌제는 그의 뺨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너였으면 에흐베가 미워서 미쳐 버리려고 했을걸.”
“…….”
“괜찮아. 버리면 버리는 거지. 버리고 싶으면 그렇게 해.”
“음……. 군주가 나라를 버리라는 거야?”
“뭐 어때.”
그 순간 라파엘은 조금 멍해졌다.
뮌제는 귀족적인 책임감으로 조각된 사람이었다. 책임감 그 자체로 조각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뮌제는 그녀 자신에게 엄격했다.
그러나 그만큼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러웠다. 사실, 크게 관심이 없는 편에 가까웠다.
그 잘못에 대해 그녀가 다 드러나게 미워하는 상대라고는 마법과 마법사뿐. 다른 사람이 어찌 살든 그저 보았다. 잘못 살아간 결과로 문제가 생기면 도와줄지언정.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왕에게 나라를 버려도 좋다고 할 정도로 너그러울 줄은 몰랐다. 물론, 아무래도 상대가 라파엘이니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운 것과는 다른 의미로 너그러웠을 테지만…….
그가 입을 여는 찰나, 뮌제는 먼저 말을 이었다.
“내가 널 보호할 건데.”
뭐 어때. 내가 널 보호할 건데.
뮌제의 손을 아직 잡고 있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라파엘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지워 버린 뒤에 뮌제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가을바람에 낙엽이 부딪히는 것처럼 가볍게.
“에흐베를 좋아하면서.”
“좋아해. 네 모국이니까.”
“에흐베어까지 배웠으면서.”
“당연하지. 네 모국어니까.”
“…….”
“라파엘. 네가 가장 중요해. 괜찮아.”
훗날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싶어 하는 제이에게 쓸모없다 하던 뮌제는 이 순간 라파엘에게는 이렇게 너그러웠다. 라파엘에게만 허락된 진심이었다.
라파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걸음 물러난 뮌제를 부드럽게 껴안고 잠시 그대로 있던 그는, 등에 올라오는 두 손을 느끼고 나직하게 웃었다. 두 사람의 몸이 조금씩 양옆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춤을 추듯. 위로하듯.
그들은 뒤뚱뒤뚱 움직이며 온 침실을 돌아다녔다.
에흐베 대공과 로헤올 공작은 아직은 서늘한 그늘이 남아 있는 이른 아침의 방에서 한동안 그리했다.
뮌제가 곧 다시 ‘친구를 만나러 온 로헤올 공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밝아 오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라파엘은 말했다.
“네가 날 보호할 거라면, 나도 널 보호할 곳에 있어야지.”
“…….”
“나는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잠깐의 휴식, 잠깐의 일탈을 만끽하며 춤을 추던 뮌제를 떠올린 그는 덧붙였다.
“자유롭게 행복하면 좋겠어.”
그날 아침은 그렇게 시작했다.
이는 뮌제가 윌리엄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그걸 목격한 라파엘이 호문클루스를 만들기 전의 일이었다.
위즈의 삶을 살며 뮌제는 어딘가는 변했고, 뮌제 없는 시간을 살며 라파엘도 변했다.
* * *
에흐베 대공은 결코 신하들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뮌제를 뮌제라 부르지 않았다.
공작, 혹은 그 사람.
그녀도 함께 있는 자리라면, 이 사람.
어쩌면 무심하게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그 호칭이 대공의 입에서 나오면 특별하게 느껴졌다.
마치 연인을 존중하여 부르는 호칭으로 느껴질 만큼 어감이 달았다.
감히 그 뮌제 로헤올을 이런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도 없었을뿐더러, 뮌제 로헤올이 여기까지 허락한 사람이 대공 이외에는 없어서 더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지칭에 설레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에흐베 대공을 선망하는 젊은 여성들도 그랬고, 로헤올 공작을 선망하는 젊은 남성들도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실수로라도 그 호칭을 시도하지 못했다.
뮌제는 대공에게만 둘도 없이 사랑하는 친구일 뿐, 다른 이들에게는 얕보이거나 함부로 친한 척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칭을 어느 날부터 몇몇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그랬고, 제이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