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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15)화 (115/120)

# 외전 1화

뮌제는 딱히 사교 활동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해야 하기에 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건 라파엘도 마찬가지라서, 두 사람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잠을 자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러니까, 뮌제가 에흐베에 들른 걸 환영하여 연회나 무도회를 열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뮌제가 라파엘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열 필요도 없었다. 에흐베 대공이 뮌제를 중요하다 하는데 에흐베의 감히 누가 뮌제를 깎아내릴 것인가. 또, 뮌제는 온느발레의 로헤올 공작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녀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이번에 대공이 연회를 열게 된 건 뮌제를 위해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뮌제가 부탁했다.

라파엘조차도 눈을 깜박거렸을 정도로 놀라운 부탁이었다. 그는 뮌제가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느니, 그 시간에 잠이라도 자면서 휴식에 집중하거나 책을 읽을 사람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물론 연회를 여는 것쯤은 별 것 아니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인 라파엘은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냥. 해 보고 싶은 게 있어. 휴식의 일환이지.”

뮌제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기억을 더듬으며 머릿속에서 연회를 살펴 나가던 라파엘은 더 의아해졌다. 연회 그 어디에도 뮌제가 휴식할 만한 요소는 없었다. 그러나 하여튼 연회 준비는 그날부터 빠르게 이루어졌다.

드비에 성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을 일주일이나 확보하여 놀러 왔지만, 그 ‘일주일이나’라는 표현은 하루의 시간도 귀한 지배자들의 입장이었다. 연회를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일주일밖에’였다.

뮌제가 드비에 성에 도착한 날에 요청했다고는 하나 그래 봤자 남은 시간은 일주일.

그런데 대공은 일주일조차 주지 않았다. 뮌제가 도착한 지 닷새째 되는 날 저녁에 환영 연회를 열 것을 지시했다. 뮌제가 요청한 연회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옥타브는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책상 위에 엎어졌다. 루시안도 아주 잠시 이마를 짚었다.

뮌제가 라파엘과 스스럼없는 사이라고는 해도, 결국에는 빌어먹을 온느발레의 대귀족이었다. 그 뮌제 로헤올 공작이 처음으로 에흐베에서 참석하는 연회인데 에흐베의 면은 세워야 할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은 비단 두 보좌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닷새째의 밤.

준비 기간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될 만큼 화려한 연회가 열렸다. 수많은 사람이 하얗게 불태운 결과물이었다.

“이야아. 대단하네. 온느발레의 연회에 버금가잖아.”

연회장을 둘러본 뮌제는 굉장히 놀란 얼굴을 했다. 감탄하는 목소리도 꽤 컸다. 급한 일정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대공 대신 뮌제를 안내한 두 에흐베인은 그 얼굴을 보며 내심 뿌듯해했다.

뮌제는 두 사람을 보며 싱글싱글 웃더니, 젊은 아가씨들이 앉아서 대화하고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의 눈이 살짝 빛나는 듯했다. 뮌제는 이만 두 사람은 돌아가서 쉬라고 다독였다. 연회 중 그녀의 시중을 들 사람은 이곳에 많았다. 애초에 두 사람이 시중을 위해 온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돌아가는 길. 화려한 연회장을 뒤로하고 피곤한 몸으로 걸어가다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루시안은 입을 열었다.

“로헤올 공작께서 우리를 귀여워하신 것 같지 않나?”

“바론도 그 생각 중이셨습니까?”

“…….”

“그 공작이 그렇게 표정 관리를 못하실 리가 없었는데…….”

에흐베인들의 면을 세워 주겠다고 일부러 칭찬한 게 분명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싱글거리는 웃음도 평소와는 조금 달랐었다. 뮌제 로헤올은 대공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웃지 않았다.

“온느발레의 무슨 연회에 버금가는 건지도 말 안 하셨어요.”

“그냥 무조건 온느발레에 지지 않았다 하면 괜찮다는 걸 아셨겠지.”

“목소리도 평소보다 좀 키우셨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들으라는 것이었겠지요?”

“…….”

“…….”

뛰는 에흐베인 위에 나는 뮌제 로헤올 공작이 있었다.

옥타브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무진장 창피했다.

* * *

에흐베 대공은 연회가 열린 지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입장했다.

대공이 들어오신다는 알림 없이 조용히 들어왔기 때문에, 그가 들어와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조금씩 소란이 번져 갔다. 한두 사람의 인사가 시작이었다. 에흐베 대공이 계단의 가장 밑을 밟을 때에는 에흐베 귀족 모두가 저희 군주를 향해 허리를 숙인 채였다.

“이만 일어나라.”

그 간단한 말을 끝으로 대공은 회장을 훑었다.

뮌제가 어찌 입었는지를 알고 있음에도 그녀를 바로 찾아낼 수가 없었다. 대공은 뮌제를 찾는 중에, 왕을 영접하고자 다가오는 귀족들을 손을 들어 물리쳤다.

루시안에게 들은 것을 떠올린 그는 다른 얼굴을 찾아내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공을 향한 인사를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았던 젊은 아가씨들은 저희에게로 다가오는 군주를 보고는 다시 하나둘 일어났다.

그들에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한 대공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어떤 아가씨는 그 질문을 받자마자 움찔했다.

이 자리에서 대공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작 가의 아가씨는 상기된 얼굴로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 공작께서는 저기……. 취기가 조금 올라 잠시 휴식하겠다 하셨습니다.”

대공은 그녀가 가리킨 발코니로 시선을 주었다. 두 번째 발코니였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숙녀들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왕에게 인사를 받은 그들은 얼굴을 붉히며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라파엘은 두 번째 발코니로 향했다. 그에게 인사하는 귀족들에게 가볍게 맞인사를 하면서도 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잘 정리되어 금색 줄로 살짝 묶인 긴 커튼 사이로 뮌제가 보였다.

젊은 남성 귀족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뮌제가.

발코니 안으로 들어서려던 라파엘은 커튼 있는 곳을 넘어서기 전에 멈춰 섰다. 그때 뮌제가 설핏 웃었다. 다정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대화가 즐거운 듯 보였다.

이쯤 되면 라파엘을 눈치챌 법도 한데 이쪽으로는 이상하리만큼 시선 한 줌 주지 않았다.

상황을 잠시 잠잠히 지켜보던 라파엘은 몸을 돌렸다.

왕의 시중을 들기 위해 가까운 곳에서 왕을 주시하고 있던 하인이 한걸음에 다가왔다. 그는 대공의 지시를 듣고 금세 잔 한 개가 올라간 은쟁반을 내밀었다. 라파엘은 잔을 들었다.

그는 이번에는 지켜보지 않고 발코니에 들었다.

먼저 라파엘을 발견한 사람은 뮌제와 대화하고 있던 청년이었다.

“전하.”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금방 표정을 정리한 청년은 대공에게 깔끔하게 예를 갖춰 보였고, 로헤올 공작에게도 이어 인사를 남기고 발코니를 나갔다.

뮌제는 라파엘을 보며 방실방실 웃었다.

“뭐야. 가셨, 오셨었었, 었었었, 었……. 오셨었어요?”

라파엘은 가볍게 웃었다.

“네에, 오셨었습니다.”

뮌제는 입을 풀어 보겠다고 연신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취기가 오르긴 한 모양이지. 장갑을 벗은 라파엘은 손끝으로 뮌제의 뺨을 살며시 매만졌다. 평소보다 따뜻하였다.

그는 들고 있던 물잔을 뮌제에게 건넸다.

어딘가 느릿느릿해진 손길로 그 잔을 받은 뮌제는 꾸무럭꾸무럭 물을 마셨다. 그 모습을 눈에 담다가 라파엘이 말했다.

“네가 취한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으응. 작정하고 마셔 봤어.”

뮌제가 에흐베어에 능숙하다고는 해도 결국에는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였다. 취하자 바로 말 어딘가가 조금씩 묘해지는 게 들렸다.

그러나 라파엘은 짚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었다.

뮌제는 다 비운 잔을 발코니 난간 위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자기 뺨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어눌해진 언어로 그녀는 웅얼거렸다.

“온느발레에서는 이렇게 못 마시잖아. 여긴 네가 있으니까 한번 해 봤어.”

음성부터 노곤노곤 녹아 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순간 멈칫했던 라파엘은 뮌제를 보며 이내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내가 있으니까?”

“응.”

“내가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는 거야?”

“응.”

뮌제는 꾸벅꾸벅 끄덕였다.

라파엘은 나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얼굴을 보는 뮌제의 풀린 눈에도 다정한 웃음이 서렸다. 뮌제는 몸을 돌려 난간에 등을 기대었다.

환하게 불이 밝은 회장 안을 바라보며, 로헤올 공작은 나른하게 말했다.

“마음 놓고 푹 잘 수도 있고……. 마음 놓고 취해 볼 수도 있고…….”

“응.”

“마음 놓고 일도 미뤄 볼 수 있고…….”

“그건 그러니까, 내가 있으면 마음 놓을 수가 있다는 말인 거야?”

뮌제의 바로 등 뒤에 놓인 잔을 가져오던 라파엘이 넌지시 물었다. 뮌제는 시인했다.

“맞아. 네가 있어야 마음 놓고 쉴 수가 있어…….”

“…….”

라파엘은 말없이 뮌제의 옆얼굴을 보았다.

눈꺼풀이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게 보였다. 이 자리에서 쪼그려 앉아 잠들려는 건지 난간에 등 기댄 상태로 조금씩 다리가 접혔다.

세상의 그 누구도, 라파엘을 제외한 그 누구도 로헤올 공작의 이런 소탈한 모습은 본 적 없을 것이다. 어렸을 적과 다르게 로헤올 공작이 된 이후로는 윌리엄에게조차 조심하는 모양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라파엘은 뮌제가 완전히 앉기 전에 그녀의 팔을 잡았다.

대공과 공작이 이 발코니에 있는 걸 알자마자 다른 발코니에 있던 이들이 자리를 비워 주었지만, 아직 모든 발코니의 커튼이 열려 있었다.

잡힌 뮌제는 졸린 눈꺼풀을 들어 끔뻑끔뻑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피곤하면 이만 들어가자.”

그가 나직하게 속삭이자, 뮌제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실타아…….”

“…….”

대공은 알 수 없는 시선 끝에 한동안 뮌제를 담다가, 하인을 불렀다.

그리고 아직 들고 있던 빈 잔을 건네며 의자를 부탁했다.

하인은 동료와 함께 금세 회장 안에서 팔걸이 없는 의자 세 개를 가져왔다.

라파엘은 그 의자를 발코니 입구 바로 옆의 벽 앞에 놓도록 지시했다. 뮌제의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면 난간이 막아줄 수 있도록. 그리고 그는 다른 의자들은 그 의자 바로 옆에 이어 놓게 하였다.

대공의 심중을 알아차린 하인이 조심스럽게 대공 몫의 의자를 가져와 드릴지 여쭈었다. 대공은 거절했다. 이미 의자를 세 개나 들였다. 뮌제가 여기서 자고 있다는 걸 다른 자들이 짐작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인은 나가서 두 사람이 있는 발코니의 커튼을 닫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 다른 발코니의 커튼도 닫혔다. 두 권세가가 있는 곳은 이제 상당히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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