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14)화 (114/120)

# 113화

그날은 뮌제에게 의미가 있는 날이다. 윌리엄이 죽은 날. 따라서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지을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게 뮌제가 이런 표정을 짓기를 바랐다는 뜻은 아니었다.

라파엘은 손을 뻗었다.

거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과 다름없는 그녀의 손을 그는 지그시 잡았다.

타이 핀을 잡고 있는 손이었다.

“그날 내가 네 손을 감쌌던 때가 있었어.”

“…….”

뮌제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녀에게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던 건 사실 라파엘의 마법이었다.

라파엘은 뮌제의 마법을 빼내어 손과 손 사이에 있던 보석에 고이게 하였다.

애초에 그의 생명으로 윌리엄을 처리할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뮌제가 윌리엄과 함께 죽게 둘 생각도 없었다.

그는 그 잠시를 기회로 삼았을 뿐이다.

뮌제를 찾자마자 그는 뮌제를 다시는 잃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죽어 가는 윌리엄, 죽어야 할 윌리엄, 죽을 윌리엄은 그 후의 문제였다. 그 시간이 라파엘에겐 그랬다.

다시는. 다시는 너를 잃지 않겠다.

다시는 네가 나를 떠나게 두지 않겠다.

그날 그는 그랬었다.

라파엘은 뮌제의 손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꼭 노크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돌려 그녀의 손을 가볍게 한 번 두드렸다.

“타이 핀이 싫다면 아티팩트들이라도 잔뜩 가지고 다니면 좋겠어.”

“라, 전하.”

“호문클루스를 만들 게 아니라면, 더는 마법을 써서는 안 돼. 뮈즈.”

온느발레 황제는 여전히 온갖 아티팩트들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의 뮌제는 어릴 적보다 많이 약해졌다.

호문클루스 없이 마법을 써 왔기 때문이다. 그 말은 그녀의 생명력을 마법에 소진했다는 뜻이었다.

마법을 사용하며 윌리엄을 상대한 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졌고, 그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이번에도 죽기를 각오하고 모든 마법을 방출하다 멈추었다. 라파엘의 생명의 근원과 또다시 섞이고 또다시 나뉘어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나, 그래 봤자 거기까지다.

근본적으로는 호문클루스를 만들어 타인의 생명을 가져오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그러지 않는 한, 뮌제는 평생 약할 것이다.

호문클루스 없이 이 이상 마법을 썼다가는 요절하는 건 정해진 일이 되어 버리며.

바로 얼마 전에도 라파엘은 그녀에게 말했었다. ‘네가 마법을 쓸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써서도 안 된다. 마법을 쓰다가 죽을 게 아니라면.’

그땐 그녀의 기사들이 말해 주었겠거니, 아니면 악마가 하는 말을 들었겠거니 하고 그저 넘어갔었다. 하지만 이제 뮌제는 라파엘이 마법사임을 알게 된 상태였다.

타이 핀에서 손을 뗀 뮌제는 흐리게 웃었다.

“……너는 호문클루스가 있어?”

역겹고 역겨운 마법사들.

마법도 생명도 포기하지 못한 개새끼들.

그 더러운 개새끼 중 한 명인 라파엘은 물끄러미 뮌제를 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응.”

“그래. 그렇구나.”

애매한 반응이었다.

라파엘은 뮌제를 찬찬히 살폈다. 충격을 받았다는 반응도, 역겹다는 반응도 분명 아니었지만, 뮌제는 하고자 하면 표정 관리를 능히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살짝 눈을 내려 식탁을 보고 있는 뮌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뮈즈.”

뮌제는 호의 어린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부르냐는 표정이다. 전에 그녀가 라파엘 앞에서 선뜻 짓던 표정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치 가면 같음을 라파엘은 알아보았다.

말을 이으려던 라파엘은 멈칫하고는 입을 닫았다. 그는 문득 저희 둘 사이가 더는 예전 같을 수 없음을 실감했다.

거기엔 많은 이유가 있었다.

윌리엄과 같이 뮌제를 괴롭게 쥐어짰던 ‘요소’가 더는 없고, 뮌제가 더는 로헤올 공작이 아니며, 그녀는 자기 사람도 많이 잃었고, 라파엘이 마법사라는 사실이 알려졌으며, 무엇보다 뮌제의 시간 중 수년에 달하는 시간에 라파엘이 없었다.

뮌제가 버틴 시간 일부에 라파엘이 없었고, 뮌제는 그 시간을 혼자 지내 왔다. 그 시간에 뮌제는 무언가를 배웠을 테고, 무언가는 포기했을 테며, 무언가는 추려 가며, 나이 들고, 전보다 성장했으리라. 그 시간에 라파엘이 없었다. 뮌제가 가장 절박했었을 그 시간에.

말문이 막힌 라파엘이 침묵하자, 뮌제는 그 시간만큼 기다리다가 그를 불렀다.

“전하?”

그리고 그 직후 식당 입구에 선 루시안이 알렸다.

“송구합니다, 전하.”

잠시 실례하겠다는 사죄에 라파엘과 뮌제 모두 서로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일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알림이었다.

식사는 이미 다 마쳤다. 뮌제에게 맞추어 잠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것이기 때문에, 라파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합니다. 일정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

마찬가지로 일어난 뮌제는 완성되지 않은 대화를 남겨 두고 일어나는 라파엘을 배웅한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조금 전 라파엘이 보였던 반응을 곰곰이 생각했다.

“…….”

애매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온느발레 수도에 있는 로헤올 저택의 도서실도 만만치 않게 큰 편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로헤올 영지에 있는 도서실이 더 크고, 이 서재는 딱 그 도서실과 비슷한 크기였다. 아리오에 있었던 뮌제의 서점을 여덟 채 정도 합해 놓은 크기.

큰 건물 한 채를 도서관으로 따로 쓰고 있는지라 이 서재는 대부분 라파엘의 취향에 맞춘 책들, 업무를 보기 위해 자주 필요한 책들이나 기록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기밀로 다루어야 할 기록들이 많아서 여기 출입 권한을 가진 이들은 적었다.

잠시 서재 문 앞에 서 있던 뮌제는 이내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조금 어두운 구석에 있는 책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쪽. 조금 더 안쪽.

고개를 들고 책장 위에서부터 빠르게 훑던 눈이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목적이었던 기록물을 찾았다. 뛰어도 손이 닿을 수 없는 칸에 있었다.

뮌제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 책장 가장 오른쪽에 세워져 있던 사다리를 질질 끌고 왔다.

사다리는 뮌제의 키보다도 컸다.

그것을 타고 올라간 뮌제는 아홉 권의 두꺼운 책 중 가장 최근 핵심적인 역사가 기록된 책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어찌어찌 사다리 중간 즈음에 살짝 걸터앉았다. 말이 걸터앉은 것이지 거의 서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경사가 급한 사다리라 허리를 살짝 앞으로 굽혀야 했으나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새 금박이 묻은 장갑은 벗어서 사다리 밑으로 떨어뜨리고 종잇장을 착착 넘겨 갔다. 중간 장. 뮌제는 자신이 전에 보았던 부분에서 더 갱신되지 않은 정보의 끝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손끝으로 한 이름을 짚었다.

뮌제 W. 로헤올 드 로어네피.

차분한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들으며 그녀는 그대로 그 이름을 눈에 담았다. 라파엘은 나직하게 물었다.

“뭐 하고 있어?”

“온느발레 계보를 보고 있어.”

뮌제는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그녀가 한 말은 실은 굉장히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건 온느발레 황실 밖에는 결코 존재해서는 아니 되는 계보였다.

황실 밖의 귀족이 황실 일원을 추적하면서 유명한 자나 유력한 자를 기록해 두는 것이야 흔하지만, 이 계보는 참으로 특별하게도 온느발레 황실에서 관리하는 계보와 같이 먼 방계까지도 전부 기록되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땐 얼마나 황당해했었는지.

언제부터 있었느냐, 에흐베에서 계속 온느발레 황실을 추적해 왔던 것이냐, 그게 아니라면 어디서 어떻게 에흐베가 이걸 구한 것이느냐고 물었었지만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던 바. 뮌제도 더 캐묻지 않았었다. 앞으로도 캐물을 일 없을 것이다.

다만, 전에 봤던 것과 다르게, 이제는 황실로 반납한 기존 로헤올 본령의 이름 대신 중앙탑의 땅 옆의 영지 이름이 적힌 것을 보아하니 계속 관리해온 것이라는 건 이제 알 수 있었다.

뮌제는 자신의 이름을 짚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윌리엄의 이름이 있었다.

“…….”

진실이 어떻든지 간에 윌리엄 로헤올은 로헤올의 마지막 직계로 남을 것이다.

뮌제는 촘촘한 글자로 적힌 계보를 이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라파엘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높이 즈음에 있는 칸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의미 없이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쓴 책을 아직 모르네.”

그러자 수많은 이름에 박혀 있던 눈동자가 올라왔다.

뮌제는 책 두 권을 빼내는 라파엘의 손으로 눈을 올렸다. 라파엘은 그 책 두 권을 한 손에 한 권씩 들었다. 책들을 확인한 뮌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반응을 본 라파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 중에 있어?”

“어, 음……. 이건 내가 썼어.”

뮌제가 떨떠름하게 가리킨 논문의 저자는 상당히 유명한 학자였다.

특수 수사기관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수험생들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논문을 쓴 학자. 비마법사들이 마법사나 알 법한 내용이나 원리를 낱낱이 알 수 있게 만들어 준 학자.

그리고, 라파엘이 뮌제일 수도 있겠다고 예상했던 몇 학자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뮌제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글쎄……. 너를 찾아야 했으니까.”

얼마 전이었다면 뮌제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삼켰을 말을, 지금의 라파엘은 했다.

뮌제가 악마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대공은 중앙탑에서 쏟아지는 양질의 논문 중에서도 특히 악마와 관련된 논문을 주로 살폈었다.

그러나 새로 나오는 논문 중 악마를 주제로 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었다.

마법의 근원을 파헤치는 등 마법에 관심이 많은 듯한 학자들이 쉰 명 이상이었다. 뮌제가 사라진 후 연구 활동을 눈에 띄게 중지한 학자도 살펴보았지만, 본디 논문이라는 게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므로 십 년 만에 논문을 발표하는 학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뮌제로 추정되는 학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했다.

뮌제의 책을 내려다보는 눈이 살짝 가늘어지고, 그는 반쯤 충동적으로 말을 흘렸다. 거의 독백이었다.

“작은 단서라도 놓칠 수 없었어.”

이미 몇 번을 읽은 책이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다시 한번 뮌제의 논문을 펴고 한두 문장을 읽었다. 그리고 파라락 책장을 넘기고 책을 닫았다.

다시 책을 꽂아 넣는 손길을 따라 시선을 옮긴 뮌제는 새삼스럽게 그 책장 칸을 살폈다.

그 칸은 물론이요, 위 칸, 그 아래 칸, 아래 칸, 옆 칸. 아니, 책장 전부. 주변 모두 마법과 관련된 서적으로 채워져 있음을 깨달았다.

여기는 하필 온느발레의 계보가 있는 곳이었다.

“…….”

그리고 생각해 보면.

뮌제의 흔적이 있는 곳이었다.

계보에도 그녀의 이름이 있고, 마법에도 그녀가 있었다.

뮌제는 제 손 위의 책으로 눈길을 내렸다.

잠시 산책을 하고 나서 가장 먼저 찾은 게 온느발레의 계보라면 이상하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묻지 않는 라파엘에게 그녀는 먼저 말을 꺼냈다.

“온느발레를 어찌할 생각인지 제대로 들은 적이 없어서 묻겠는데…….”

“응.”

“새 황제를 옹립할 건지 알고 싶어.”

아주 민감한 질문이었다.

제국 온느발레의 황제를 갈아치울 거냐는 질문을 세상 그 누가 할 수 있겠으며, 세상 그 누가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태연했다.

114화 (완결)

멀리 있는 큰 창에서 들어오는 샛노란 햇빛 덕분에 아주 어둡지는 않았지만, 책장에 가려 서늘하게 그늘진 곳이었다. 그런 장소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에 두 사람은 덮였다.

책을 다 꽂고 손을 내린 라파엘은 차분한 얼굴로 뮌제를 보았다.

대답하지 않는다.

뮌제가 이어 물었다.

“페레이라 백작은 아직 아리오에 있어?”

“…….”

이번에는 라파엘은 살짝 웃었고, 웃기만 했다. 대답하지 않는 대공을 기다리던 뮌제는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러나 진심으로 곤란하여 보인 반응은 아니었다.

조금 더 말없이 생각하던 뮌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계보를 닫았다.

턱. 두꺼운 책이 덮이는 소리가 둔탁하게 났다. 책장 쪽으로 허리를 돌리는 뮌제에게 라파엘은 다가갔다. 그녀의 앞에 선 그는 계보를 들었다.

뮌제의 머리 위로 뻗어 나간 손이 계보를 책장에 꽂았다.

라파엘의 무거운 향기가 뮌제의 코에 닿았다. 그의 팔 그림자가 어둡게 얼굴에 드리웠다가 사라지는 걸 느끼며, 뮌제는 말했다.

“사실 무엇이든 상관없어. 황제가 죽든 아니든. 페레이라가 어떻게 되든. 어디에 있든.”

“…….”

“라파엘. 그때 그 늙은 마법사. 억지로 그의 생명을 옮기려 했었어?”

윌리엄이 죽던 날, 라파엘의 기사들에게 끌려오던 마법사를 말하는 것임을 라파엘은 알아들었다. 그는 여전하게 묵묵히 뮌제를 보기만 하였다.

뮌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가 돌아왔다. 그녀가 말했다.

“난 그런 적 있어.”

그 토설에도 라파엘은 가만히 있었다. 뮌제는 말을 이었다.

“내게는 사람의 생명이란 건 그래.”

“…….”

“난 내 있는 곳을 숨기겠다고 네 기사를 죽이기도 했지.”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뮌제는 라파엘의 눈높이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높은 곳에 앉아서, 책을 넣은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서 있는 라파엘의 연회색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라파엘도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마침내 뮌제는 고백했다.

“라파엘. 나는 네가 호문클루스를 만들었다는 게 슬퍼.”

라파엘의 눈가가 움찔했다.

뮌제는 손을 올렸다. 라파엘의 왼 눈꼬리 부근을 쓸자, 손끝에도 붙어 있던 금가루가 옮겨 갔다. 그늘졌음에도 살짝 반짝거리는 것에 잠시 눈을 주던 그녀는 말을 이었다.

“네가 마법사라는 게 슬퍼.”

“…….”

“난 내가 혐오스러워. 마법은 더러운 거야. 마법사도 더러워. 역겨운 것들이지.”

“뮈즈.”

라파엘이 잠긴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리 말하지 말라는 제지였다. 전과 다르게 이제는 할 수 있는 제지.

뮌제는 눈물 없이 마른 얼굴로, 꼭 눈물로 범벅이 된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웃음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네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네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야.”

“…….”

“슬퍼. 라파엘. 네가 내 그 말들을 들으면서 마음 상했을 걸 생각하면, 슬퍼. 슬프고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상하지 않았어.”

라파엘은 대답했다.

뮌제는 눈을 찡그렸다.

“거짓말. 얼마 전에 네가 말했던 ‘진창’을 기억하는데.”

[네가 너 스스로를 끌어내려 나와 같이 진창에 있어 주니 기뻤고, 네가 너 스스로를 끌어내려 같이 진창 수준에 머무르려 하니 싫었어. 네가 널 더 사랑하길 바랐어.]

알아들은 라파엘은 옅게 웃었다.

“세상이 만든 진창이잖아. 네가 아니라 세상이.”

“…….”

“나는 마음 상하지 않았어. 그때 말했잖아. 네가 마법을 그렇게 경멸하면서 너 스스로를 끌어내리는 게 좋았고, 싫었다고. 네가 널 더 사랑하길 바랐다고.”

“…….”

“나는 마음 상하지 않았어. 네가 걱정이었지.”

왼손으로 사다리를 잡은 라파엘은 오른손으로는 뮌제의 짧은 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는 올라오는 걸 삼키고 억누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아침 뮌제가 지었던 표정의 영문을 이제 알 것 같았다.

[슬퍼. 라파엘. 네가 내 그 말들을 들으면서 마음 상했을 걸 생각하면, 슬퍼. 슬프고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그리도 자기 자신까지도 싫어하며 경멸하기를 거리껴하지 않던 뮌제가, 단지 라파엘이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그토록 혐오스러워하던 마법사라는 집단에 라파엘 한 명이 포함된 것만으로도 그녀는 제 말들을 후회한다.

그게 얼마나 안타까운지 뮌제는 모를 것이다.

그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뮌제는 모를 것이다…….

뮌제와 라파엘의 눈길은 서로에게 향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의 눈이 너의 눈이며, 나의 생명의 색이 너의 생명의 색이다. 같은 색을 가진 두 쌍의 눈동자는 서로에게 갈고리 건 채로 숨도 멈추었다.

서늘한 그늘이 한순간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 작은 변화도 컸다. 그 속에서 뮌제는 아직 그에게 닿아 있던 손을 조금 움직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찬찬히 움직였다.

“내가 말한 적 있었던 것 같은데. 네가 있어서 내가 숨을 좀 쉬겠다고.”

“응.”

라파엘의 오른손도 뮌제 팔 옆의 사다리를 잡았다.

뮌제는 잠시 잠깐 입을 다문 끝에 속삭이듯 말했다.

“난 이걸 네게 평생 말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

“너는 내가 사람으로 하는 호흡이었어.”

라파엘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말문 막히듯 막혀 버린 숨이 뮌제에게도 들렸다. 뮌제는 조금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죄인도, 공작도, 마법사도 아니게, 내가 사람으로서 쉬는 호흡이었어.”

그녀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숨구멍도 아니야. 숨 그 자체였어.”

“…….”

“그래서, 나를 나로 살게 하는 휴식 앞에서 죽고 싶지 않았어. 네 앞에서 죽고 싶지 않았어.”

라파엘의 눈꺼풀이 스륵 내려갔다. 떨리는 입술을 깨문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뮌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안다.

정말 알고 있었다.

뮌제가 죽기를 각오하고 베렐에게 남겼던 서신을 읽었기에 그는 알고 있었다. 막상 그에게 보내는 서신에는 그녀의 기사들을 위한 부탁이 반이었지만, 베렐에게 남긴 서신에는 온통 라파엘이었다.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라파엘은 진심을 토했다.

그 나직한 말을 들은 뮌제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라파엘은 계속 말했다.

“의무감 없이 읽고 싶은 책을 읽어도 좋겠지. 출장 때문도, 책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네 즐거움을 위해 여행을 하는 것도 좋을 거야. 아리오를 여행하는 것도 좋겠지.”

뮌제를 사랑한다 하는 남자가 있는 나라를 말하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라파엘은 뮌제의 어깨에서 이마를 뗐다.

그는 그녀의 코끝에 코끝을 살짝 맞대었다가 몸을 세웠다.

“누구든 가까이에 둬도 돼. 누구든 친구로 삼으면 돼.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당연히 그래야지.”

“…….”

“무엇이든, 네게 해가 가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괜찮아.”

[라파엘. 무엇이든 해. 네게 해가 가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괜찮아.]

“하지만 이제 나는 네게 한 가지를 강제하려고 해.”

그는 뮌제의 눈 안의 자신을 보았다. 뮌제를 향한 마음으로 추락하고 가라앉은 남자의 형상으로 좁아졌던 시야를 넓혔다. 이제 그는 뮌제의 눈 안의 자신이 아니라 뮌제의 눈동자 자체를 보았다.

떨고, 차분하고, 차가우며, 불에 타는 듯 고요하게 일렁이는 연회색 눈.

그 경이로운 눈을 똑바로 보며 라파엘은 말했다.

“네가 있을 곳은 내가 있는 곳이야.”

강제하고.

“내가 있을 곳은 네가 있는 곳이야.”

강제한다.

“떠난다면 찾으러 갈 거야.”

몸을 기울인 그는 뮌제의 입꼬리 바로 옆에 지그시 입을 눌렀다.

약간 쉰 음성이 그녀의 입술 가까이에 속삭임을 남겼다.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

“계속 사랑해.”

뮌제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고개를 돌렸고, 두 사람의 입술이 스쳤다. 그대로 라파엘이 속삭였다.

“계속 나만 사랑해.”

뮌제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사다리를 놓은 라파엘의 양손이 뮌제의 등과 머리를 안았다. 뮌제는 저보다 살짝 아래에 있는 라파엘을 꾹 눌렀다. 그녀의 머리 뒤를 안은 큰 손은 뮌제를 놓아 주지 않았다. 야릇하게 얼기설기 물린 붉은 것들이 서로를 삼키고 삼켰다.

뮌제는 그의 목을 안았다.

* * *

[너는 행복하게 네 삶을 살 권리가 있어. 태어났잖아.]

네 말대로, 살아 보려고 해, 라파엘.

* * *

챕터 9. 바보가 되어야 했던 사람이.

사랑하는 라파엘.

이건 혹시 몰라 미리 써 두는 편지다. 이게 네게 도달했다는 건, 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뜻이겠지.

이 편지를 들고 가는 내 기사들을 부디 부탁한다. 나 죽은 뒤에 내 유지를 받들어 끝까지 일해주었던 내 사람들을 염치없이도 네게 맡긴다. 내 유지가 무엇이었는지, 무슨 일을 하다 이리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네게 간 건지는 그들에게 묻지 말아 줘. 부탁할게.

내 개인적인 일을 위해 모아 두었던 책들은 네 뜻대로 처분하면 된다. 내 기사들이 너를 책 있는 곳으로 안내할 거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파엘.

내 흔적에 붙잡히지 마. 붙잡지도 마.

온느발레와 로헤올, 나 죽은 자리에서 관심을 거두고, 절대 나를 쫓지도 좇지도 마. 너는 네 삶을 살아야지.

그간 네가 나와 함께 있어 주었기에 더 길게 버틸 수 있었어. 네게 받은 게 너무 많은데 나는 약속조차 지키지 않고 떠나 버려 미안하다.

고마웠다.

사랑해.

널 아주 많이 사랑했어, 내 친구.

* * *

베렐 경에게.

경.

이 편지를 쓰는 지금, 나는 이제 시간도 기회도 없다는 걸 직감한 상태일세.

끝까지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또한, 여차할 시 윌리엄을 죽일 것을 미리 결단했네. 세 목숨이 한자리에서 끝나겠지.

윌리엄이 미리 유언장을 써 놓았다면 좋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로헤올은 잠시 혼란스러울 걸세. 하지만 그것에 대해 경은 조금도 염려하지 말고 이제 부디 로헤올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기를.

내가, 혹은 윌리엄이, 혹은 우리 두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지체하지 말고 에흐베로 가게. 대공에게 전해 달라고 경에게 맡긴 편지에 경들을 맡아 달라고 부탁해 두었어. 대공이라면 경들을 부족함 없이 살펴줄 걸세.

그리고 이것만은 꼭 내게 약속해 주게.

에흐베 대공에게는 그 어떠한 것도 말하지 말게.

그가 나를 찾으려 하던 시간에 내가 정말 살아 있었다는 걸 그가 알게 하지 말아.

나는 산길에서 죽었어. 경, 나는 산길에서 죽었네.

그에게 그 이후의 절망을 더하지 말라는 뜻이야. 내가 그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시간이 길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죽었음을 그가 알게 하지 말게. 그 사실은 어떤 식으로든지 그에게 흔적을 남길 테고, 나는 그걸 진실로 원하지 않아.

나는 내 마지막이 정말 어떠했는지를 그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고, 내 그 어떠한 흔적이라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그가 이 이상 나로 인해 힘들어하지 않길 바라.

덧붙여, 내가 경들에게 맡겼던 아티팩트들은 전부 폐기해 줘. 이 세상에 그 어떠한 마법 조각으로도 남고 싶지 않아. 내 시신도 세상 어디에도 남지 않게 불살라 소훼해 주면 좋겠어. 나를 추모할 곳조차 없게 남은 재는 대충 바람에 날려 주게.

그간 고마웠네. 나를 주군으로 만나 너무도 수고 많았어.

부디 다른 기사들에게도 내 고마움을 전해 주게.

경들은 행복하기를.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 바보학개론(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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