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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13)화 (113/120)

# 112화

이제 손에 아무것도 거치적거리는 게 없는 그녀에게 라파엘이 나직하게 말했다.

“먼저 네 상태부터 보자.”

“아니야.”

뮌제는 아리오에 있었던 직전보다 더 파리해진 얼굴로 거절했다.

라파엘이 솜브헤를 시켜, 황제에 의해 죽거나 다친 뮌제의 기사들과 베렐까지도 살피라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뮌제는 그 기사들을 지금 이 순간 가장 우선해야 했다.

설마 황제가 그녀의 기사들에게도 관심을 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질 못했었기 때문에, 뮌제에게 이 일은 정말, 정말 불의타였다.

지난 세월. 로헤올을 떠난 그녀를 끝까지 보좌하며 수고해 주었던 기사들이었다. 전 세계를 떠돌며 그녀에게 책을 구해 주려 노력했던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 수고에 돌아간 게 주군의 실수로 인한 죽음이라면 이게 개죽음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그녀는 그녀의 기사들을 우선해야 했다.

라파엘은 뮌제의 옆얼굴을 보고는 옥타브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허락을 받은 옥타브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뮌제가 느릿느릿 따랐다. 라파엘은 잠시 그 뒷모습을 보다가, 지나가다 멈춰 서서 군주를 향해 예를 갖추고 있는 두 명의 시종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간단하게 지시했다. 두 시종은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떠났다.

뮌제의 기사들을 눕힌 곳은 저희 두 사람이 나온 아티팩트가 있는 첫째 방에서 멀지 않은 방이었다. 서점에서 나와 뮌제에게로 가기 전에 명령만 해 두었을 뿐, 실제 처리된 결과를 보는 건 그도 처음이었다.

이 방이면 시신들을 상당히 정중하게 대우한 편이었다.

열린 문앞에 선 라파엘은 옥타브에게 코트와 장갑을 건네고 문틀에 어깨를 기댔다. 몸이 약간 피곤했다.

온느발레의 땅에서부터 바로 이곳으로 보낸 베렐의 시신도 있는 것까지 확인한 그는 뮌제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사실 그도 이 정도이니, 정말 거의 죽었다 살아난 뮌제는 저리 움직이기 위해 이 악물고 버티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독도 있었고, 오전에 다친 팔도 있었다.

사망한 기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한동안 얼굴을 들여다보는 뮌제를 좇던 연회색 눈동자는 잠시 뒤 멈추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뮌제를 살피던 그는 팔짱을 풀고 몸을 세웠다.

뮌제에게 다가간 라파엘은 그때부터는 뮌제의 뒤를 지켰다.

그래서 뮌제가 휘청거리자 곧바로 그녀를 잡아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양 팔뚝을 잡은 상태로 입을 열었다.

“뮈즈.”

“미안해. 두 사람 남았어.”

“나 아파.”

그 나직한 말에 뮌제뿐만 아니라 옥타브까지도 굳었다. 뮌제는 놀랐을 뿐이고, 옥타브는 충격과 공포에 젖은 쪽이었다.

라파엘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뮌제는 그를 돌아보려 했지만, 라파엘이 그녀의 팔을 놓아 주지 않았다.

“라파엘.”

“우리, 같은 마법을 썼잖아.”

“…….”

심장을 옮기려 했던 걸 말하는 것이다.

알아들었을 뮌제에게 라파엘은 다시 담담하게 말했다.

“나 아파.”

옥타브는 제2차 충격과 공포를 겪고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마법사라는 사실도 알리셨던 건가!

뮌제는 턱을 들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끝내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미안해.”

그럴 줄 알았다.

라파엘의 상태가 완전히 정상은 아니라는 것도, 조금 전 아프다 한 말은 뮌제를 이만 쉬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다 알 테니까. 그리고 그도, 뮌제가 그를 거절한 게 그를 염려치 않아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라파엘은 순순히 뮌제를 놓아 주었다.

대신 인사가 모두 끝나고 나서, 그는 뮌제를 안아 들었다.

그녀가 더는 버티지 못하리라는 걸 느낀 탓이었다. 드비에 성에서는 라파엘에게 어느 정도 예의를 차리는 뮌제도 그의 결정을 거절하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제 발로 걸었을 테지만 이제 정말 힘들었다.

뮌제는 잠긴 목소리로 라파엘에게 사과했다.

“아픈데 미안하네.”

“그 정도는 아니야.”

“…….”

믿지 않는 듯한 눈치에 라파엘은 낮게 웃었다.

“힘들다면 힘들다고 이야기했을 거야.”

“퍽이나…….”

코웃음을 친 뮌제는 라파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뮌제의 방에 도달하자, 라파엘이 시종을 시켜 미리 불러 놓은 태의와, 뮌제의 시중을 들 시녀와 하녀들이 그들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뮌제는 그 광경을 흐린 시야에 담다가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라파엘은 그런 그녀를 보고는 속삭였다.

“자?”

“응…….”

“진찰만 받고 자자.”

“응…….”

말과는 다르게 그는 뮌제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보고도 이리 둘만 있을 때처럼 스스럼없다는 건 정말 피곤하다는 뜻이었다. 뮌제가 깨어 있을 때 진찰을 받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만, 잠들어도 상태를 볼 수는 있다.

흐트러진 머리를 살살 넘겨 주는 손길을 받던 뮌제는 직전보다도 더 갈라지고 잠긴 음성으로 웅얼웅얼 말했다.

“같이 있어…….”

잠시 멈추었던 손길은 금세 온기로 돌아왔다. 라파엘은 잠든 뮌제의 볼에 입 맞추고 대답했다.

“응. 같이 있을게. 같이 있자.”

이 대화를 전부 듣고 입맞춤까지도 목격한 에흐베인들은 안절부절못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뮌제를 상대하지 않는 라파엘은 저희가 아는 에흐베 대공이었다.

그들은 대공의 무덤덤한 지시대로 조용하게 움직였다.

* * *

뮌제는 날이 새어 아침 해가 떠도 눈뜨지 않았다.

정말 정신없이 잠잤다.

윌리엄이 죽은 직후 몸을 회복하기 위해 쉬던 때도 이리 긴 시간을 자지는 않았다. 배도 채우고, 약도 먹는 등 해야 할 일이 있었지만, 라파엘은 뮌제를 깨우지 않았다.

네게 충분하도록 휴식하기를.

할 일이 전부 끝나 비로소 쉬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가장 편하고 후련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은 이 시간이었다. 한 차례 일어났다가 다시 잠들 내일도, 모레도 아니고, 바로 이 시간. 모든 게 끝난 직후.

그리하여 뮌제가 눈뜬 시간은 노을도 다 지고 이제 막 저녁 하늘이 시작된 시간이었다. 아주 검지도, 밝지도 않은 푸른 밤하늘이 시작된 시간. 아, 폭포수처럼 내려오는 달빛.

따뜻함에 파묻혀 옆으로 누워 있던 뮌제는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왜인지 손가락이 저릿저릿했다. 그래서 일어난 것 같았다.

멍하게 있던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것을 물끄러미 보는 그녀의 눈이 굴러갔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여 어리벙벙하게 데굴데굴 구르던 눈동자는 금세 멈추었다. 어쨌든 괜찮다는 것은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내리고 눈을 감았다.

이마를 라파엘의 품에 꼭 박고, 몸을 웅크렸다. 아직 졸렸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몸과 이마를 통해 넘어오는 진동이 기분 좋았다.

그녀의 등으로 넘어온 손이 뮌제를 부드럽게 토닥이기 시작했다.

“더 자.”

“…….”

무어라 말하고 싶은데 말할 힘이 없었다. 힘을 끌어올릴 의욕도 나지 않았다.

뮌제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다시 잠들었다.

라파엘은 그녀의 호흡이 차분해지고도 몇 분 더 흐르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뮌제가 두 시간 정도를 쥐고 있던 부분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는 셔츠 가슴께를 잠시 매만졌다. 심지어 옷이 여전히 따뜻하기까지 했다. 얼마나 열심히 잡고 있었는지.

그는 작게 웃고 다시 침대 옆에 놓은 베르제르로 내려갔다.

베르제르 옆에 임시로 가져다 놓은 작은 테이블에는 두 시간 전까지 그가 보고 있던 서류와 필기구가 놓여 있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뮌제가 이리 오라 해서 일어났더니 어서 쉬라고 잡고 놓아 주지 않아서, 그 핑계로 덕분에 두 시간이나 쉬었다. 피곤해 죽겠는데도 그를 걱정하는 건 잊지 않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달기도 하여 침대에 누워서도 얼마나 웃었는지 모르겠다.

라파엘은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가, 두 시간 전과 다르게 많이 어두워졌다는 걸 깨닫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이 필요했다.

* * *

하루 간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뮌제는 아침 식사로 따뜻한 수프와 빵, 약간의 샐러드를 택했다. 수프를 거의 다 비워 갈 때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늘 바쁘세요?”

“평소보다는 바쁠 겁니다.”

어제 뮌제의 옆을 되도록 떠나지 않으려고 미룬 대인 일정의 일부를 오늘 일정에 추가한 상태였다.

라파엘의 부드러운 대답을 들은 뮌제는 푹 한숨을 쉬었다.

“뭔가 하긴 해야 하는데…….”

아무 할 일이 없는 시간을 생애 처음으로 보내기 시작해서, 그녀는 벌써 무료했고, 심지어 기묘한 불안까지도 느끼고 있었다.

죽을 뻔했던 게 바로 그제의 일이고, 어제는 하루 종일 자고, 그렇게 맞이한 이 아침인데도. 벌써.

라파엘은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고 미소지었다.

“일단 쉬십시오. 뭘 하든 몸부터 회복하고 해야지.”

“전하는요?”

“예?”

“편치 않으시다면서요. 심지어 계속 내 옆에 있느라 쉬지도 못했지…….”

“중독된 상태로 내 옆을 지켰던 사람이 누구시더라.”

해독약을 복용하였었다. 중독된 상태라는 말은 틀리다.

하지만 뮌제는 멀뚱하게 라파엘을 보고는 반박하지 않았다. 오래전 있었던 일을 꺼낸 그의 표정도 좋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웃고는 있지만 진실로 기분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뮌제는 식기를 내려놓고 접시를 살짝 밀었다.

턱을 괸 그녀는 눈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렸다. 시중을 들기 위해 식당에 시종과 시녀가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뮌제는 저 행동을 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일부러 저리 행동하는 것이리라.

일부러라도 하나하나 로헤올 공작의 흔적을 버려 가려는 걸까. 하지만 지금 그녀가 입은 검은 옷은 로헤올 공작이 잃은 기사들을 추모하는 의미일 터다.

라파엘은 무얼 할지 고민하는 얼굴을 보다가 찻잔을 들었다.

무언가 큰일이 끝났음에는 틀림이 없는데 지금 뮌제와 라파엘의 행동은 극적으로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뮌제를 지켜보고 있던 그는 문득 보인 것에 입을 열었다.

“그 타이 핀은 항상 가지고 다니면 좋겠습니다.”

허공을 보고 있던 뮌제의 눈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뮌제는 손에서 턱을 떼고, 그 손으로 라파엘이 말한 타이 핀을 매만졌다.

지금 뮌제가 입은 옷은 복사뼈까지 오는 검은 치마임에도 그녀의 치장을 도운 시녀는 타이 핀을 옷깃에 꽂고 고정해 주었었다. 라파엘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시녀에게도 묻지 않았던 뮌제는 이제야 라파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거. 뭡니까?”

큰 마법이 담겨 있다는 건 느껴지지만, 무슨 마법인지는 알 방도가 없었다.

차 한 모금을 마신 라파엘은 대답했다.

“우리.”

“예?”

“네 마법을 끌고 나와서 내 마법과 함께 담아 놨어.”

……언제?

뮌제는 진심으로 당혹스러워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에흐베 대공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도 그녀 못지않게 충격과 당혹에 젖었다.

라파엘은 희미하게 웃으며 잔을 소서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나는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고, 비상시엔 내 마법이 뭔가를 할 수도 있고.”

“내 마법을……, 아니, 언제?”

“우리 다시 만났던 날에.”

그 나직한 대답을 들은 뮌제는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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