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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12)화 (112/120)

# 111화

“이제 내게는 당신을 위로할 책임도 없고, 당신을 보호할 책임도 없습니다. 내가 보호할 건 이제 대공과 그의 소중한 것들뿐이고, 그 책임을 나는 살아오며 한 번도 없었던 흔쾌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

“도망가고 싶거든,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싶거든, 정 그러고 싶거든 다른 사람을 찾아요.”

이럴 것까진 없었다.

이렇게까지 모질어야 했나.

꼭 그의 앞에서 부친과 형제들을 언급해야 했고, 꼭 그의 앞에서 라파엘을 말해야 했나.

반발심이 들었다. 섭섭했다.

반항하고 싶었고, 소리치고 싶었다. 조금만, 조금만이라도 부드럽게 말해 줄 수는 없었나.

그런데 이런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가 당신에게 해 줄 말이 없습니다. 왕이 되기로 결정한 당신은 꽤 잘할 것을 알거든. 내가 온느발레에서 괜히 은여우단의 기사를 살려서 돌려보낸 게 아닙니다. 당신은 확실히 왕이 될 만했기 때문이지.”

“무슨, 말…….”

“그건 당신의 부친에게 물어봐요.”

길게 숨을 흘리며 웃은 뮌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생각해 봐요. 이 대화가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보호인 듯합니다.”

제이는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뮌제가 꼭 저희가 온느발레에 있던 때처럼 하나하나 말해 주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때도 뮌제는 그의 상처를 들어 주다가 ‘왕이 당신을 가장 귀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위로해 주었었다.

그때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뮌제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는 점이리라.

제이는 뮌제가 지금 한 게 비난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또다시 그를 위로해 준 것이다. 그때보다도 더 깊게. 더 다정하게.

그녀의 말대로라면, 제이는 그녀에게 지긋지긋한 사람일 텐데도.

“잘 지내길. 제이 왕자.”

뮌제는 퍽 다정다감한 마지막 인사까지 남기고, 저쪽에 서서 기다려 주고 있던 라파엘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대공은 아까 제이가 나왔던 문 앞에 서 있었다.

라파엘에게 나아가는, 제이에게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뮌제에게 미소 지은 대공의 단정한 얼굴을 보았다.

대공이 제이에게 눈을 주자, 제이는 가만히 묵례했다. 에흐베 대공은 그 예에 대해 아무런 반응 없이 시선을 뮌제에게로 되돌렸다. 그러나 제이는 저를 보는 대공의 표정이 얼마나 냉혹했는지를 보았다.

왕자는 뮌제를 만나기 전에 향하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하인이 따랐다.

* * *

라파엘은 한 손으로 뮌제의 뺨을 감싸고 엄지로 그녀의 눈가를 쓸었다.

“라파엘?”

“…….”

그는 무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살며시 미소지었다.

뮌제가 제이에게 말하던 곳에서 이곳까지 그의 평소 보폭으로 겨우 열다섯 걸음 정도. 보폭을 넓히면 그보다 줄어든다.

겨우 그 정도.

라파엘이 뮌제의 목소리를 듣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악마를 죽이려면 윌리엄도 함께 죽어야 했어요. 그래서 난 윌리엄을 살릴 방도를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난 살아 있는 걸 힘겨워하지 못했습니다. 윌리엄을 저 지경으로 만든 내가 무슨 낯짝으로 그런 사치스러운 감정을 가질까.]

그런 마음이었구나.

[나는 이제 윌리엄을 두고 죽을 수가 없어. 감히 그럴 수가 없어.]

네가 내게도 숨겨야 했던 건 그런 마음이었구나.

라파엘의 손이 잔떨림을 머금고 뮌제의 눈가를 계속해서 쓰다듬고 더듬었다. 가만히 기다리던 뮌제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고는 그쪽 눈을 찡긋 감았다. 다친 눈이었다.

그에 라파엘은 나직하게 웃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힘들지. 돌아가자.”

에흐베의 드비에 성으로 ‘돌아가자.’

뮌제는 그 말을 놓치지 못했다. 이제는 공작이 아니라 하더라도 공작으로 살아온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단어 한 마디 한 마디를 순간적으로 해독해 나가면서 대화에 임해야 했던 그 당연한 습관 그대로, 뮌제는 라파엘의 말을 해독했다.

전에는 이런 적이 별로 없었는데.

라파엘이 전보다 멀어진 것 같다. 그러니까, 오늘 오전보다.

선 밖의 타인을 대할 때면 항상 가지는 가벼운 긴장이나 경계 같은 게 생긴 듯했다. 조금 초조해졌다. 뮌제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대답했다.

“응. 가자.”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생길 것도 같았다.

뮌제가 움직이지 않자, 마찬가지로 저 기척을 알고 있을 라파엘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만날래?”

“…….”

얼마 지나지 않아 엘르시어가 문으로 나왔다. 주변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움직임이 다급해 보였다. 뮌제는 완전히 라파엘의 옆으로 나왔다.

라파엘은 그녀를 잡지 않았다. 다만, 뮌제가 걸치고 있는 그의 코트를 조금 더 여며 주었을 뿐이다.

걸어오는 뮌제에게로 다가온 엘르시어는 아주 살짝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가시기 전에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이 달리는 건 처음 본 것 같습니다, 후작.”

“…….”

뮌제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엘르시어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었다. 그녀의 몸 상태가 지금 좋지는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기에 길게 끌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저희 두 사람 있는 곳에서 너덧 걸음 떨어져 있는 대공이 이쪽을 향해 몸을 반쯤 돌리는 걸 보았다.

대공의 무심한 눈과 눈이 마주쳤다.

엘르시어는 가만히 시선을 내려 뮌제를 내려다보았다. 한숨을 들이켠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제가…….”

“…….”

“당신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뮌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분명, 동요를 나타내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잠시 그를 눈에 담다가 퍽 상냥하게 물었다.

“지금의 나를? 온전하게?”

“…….”

핵심을 짚어 왔다. 엘르시어는 자신이 도대체 그간 얼마나 티를 내 왔던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조금 창피해하면서도 또 미소짓고 말았다.

그의 버릇인 그 미소였고, 그래서 완벽했다.

슬픔도 동요도 분노도 긴장도 느껴지지 않게 그저 부드럽기만 한 미소였다. 뮌제는 또다시 그 미소에 사로잡힌 것처럼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깨달았기에 금세 숨을 들이마셨다.

또, 길게 내쉬었다.

무언가를 털어 내려는 것처럼 훅 떨어진 숨이었다. 그녀는 애써 가볍게 웃는 얼굴을 지었다.

“난 당신에게서 나와 윌리엄을 보고…….”

“…….”

“당신은 지금의 나에게서 위즈 스미스를 찾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공께서는 아까 공의 목숨을 바쳐 저를 살리고자 한 게 아니라 죽은 분을 살리려 하셨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엘르시어의 쓴웃음이 담긴 질문을 받은 뮌제가 힘없이 하하 웃었다.

“우리 참 슬프네요.”

그리고 그런 만큼 뮌제에게 엘르시어는 꽤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다. 오로지 그 정도.

뮌제는 호의를 담아 말했다.

“제 필요에 의해 아리오에 왔지만,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안타깝고도 좋았습니다, 후작.”

“…….”

“위즈 스미스는 제이 왕자의 성격을 차용하여 만든 인물일 뿐입니다. 너무 길게 잡혀 있지는 말고……, 내가.”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짧게 호흡을 고른 뒤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만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

그 순간 엘르시어는 입술을 이로 지그시 깨물었다. 미소는 온데간데없어졌다.

그 얼굴을 보는 뮌제는 울컥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무언가를 힘겹게 삼켰다. 저 표정은 윌리엄도 뮌제도 아니고, 온전히 엘르시어였다. 뮌제가 한 사죄에서 비롯된 것임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뜬 그녀는 한 손을 들었다.

“…….”

뮌제가 엘르시어의 얼굴을 향해 뻗은 손은 검은 장갑을 낀 다른 손에 부드럽게 잡혔다.

뮌제의 머리 위로 나직한 숨이 떨어졌다.

그녀의 뒤에 선 라파엘은 뮌제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을 거두고 다시 물러났다.

짧게 있었던 일이지만, 엘르시어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저 대공은 확실히, 더 이상은 엘르시어에 대해 관용을 베풀 일이 없을 것이다. 에흐베 대공을 처음 만났던 날에는 엘르시어가 위즈의, 그러니까 뮌제의 얼굴을 만지는데도 대공은 제지하지 않았었던 바.

그때와 달라진 점이라면, 그때보다 엘르시어가 뮌제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있다는 점과 뮌제는 오늘 죽을 각오로 그를 구하려 했다는 점이다.

뮌제가 죽을 뻔했다는 것도 실은 조금 전에야 알았었다. 발롬브로사를 만나는 자리에서 대공의 정중하고도 냉혹한 언어로.

[발롬브로사. 당신은 약속했던 대로 내 이름을 걸고 내 기사들이 항시 지키겠습니다. 후작, 그대도, 당분간은.]

엘르시어는 대공의 제지를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한 뮌제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후작. 다시는 뮌제 그 사람의 목숨으로 살길을 찾으려 하지 말고…….]

후작의 눈꺼풀이 약간 내려갔다.

그는 미소했다.

[차라리 그대의 숨을 소진하는 편을 추천하네.]

“괜찮습니다.”

다시 이런 일이 있다가는 그를 살려 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 나라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예의 바르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대공은 오늘 분명히 경고한 것이다.

부드럽게 대꾸한 엘르시어는 한 걸음 물러났다. 가볍게 예를 갖추는 엘르시어를 잠시 보던 뮌제는 묵례했다.

“나의 기사에게 겉옷을 덮어 주어 고맙습니다.”

그게 그녀가 그에게 남기는 인사였다.

엘르시어는 저와 뮌제의 대화를 묵묵히 기다리던 에흐베 대공이 뮌제에게 손을 내미는 걸 보았다.

은여우단의 단장은 두 마법사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의문에 잠겼다.

대공은 자신의 말이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제대로 인지하고 있을까.

뮌제와 엘르시어가 다시 만날 일이 있다는 전제하에 말했다는 건 제대로 인지하고 있을까.

인지하고 있다면, 그건, 대공이 뮌제를 떠나보내겠다는 뜻인 건가.

* * *

옥타브는 돌아온 에흐베 대공을 확인하자마자 순간적으로 눈을 굴렸다.

그리고 전율했다.

대공의 옆에 뮌제 로헤올이 있었다.

갑자기 표정이 변해서 가시더니 역시 로헤올 공작의 일이셨던 것이다.

라파엘에게 부축받고 있는 뮌제는 옥타브에게 인사했다.

“경.”

“각, 전 공, 가…….”

여러모로 당황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 전에 전 로헤올 공작으로 오셨던 때와는 무언가 달라질 만한 일이 오늘 있었을 수도 있다. 황제가 아리오에 가지 않았던가. 그래서 알고 있는 호칭이란 호칭이 전부 혀에 걸려 딱딱하게 굳었다.

살며시 웃은 뮌제가 손을 저었다.

“괜찮네. 편한 대로 부르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온느발레와 로헤올에서 벗어나기를 우리 전하께서 얼마나 기다리고 계셨을지를 생각하면 호칭은 굉장히 중요했다.

“그래? 그럼 경이 좋겠어.”

“…….”

경을 칠 만한 말씀을 하시는군. 옥타브는 허망하게 평했다.

이럴 땐 온느발레의 대귀족치고 참 얼마나 소탈하신지 또 새삼 깨닫게 된다…….

말문이 막힌 그에게 뮌제는 물었다.

“내 기사들은 어디에서 쉬고 있나.”

질문을 던지자마자 그녀는 몸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어두운 그늘과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셔츠 앞섶에 작은 핏방울이 말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켠 옥타브는 먼저 대공을 확인했다. 에흐베 대공은 뮌제가 코트를 벗는 걸 마뜩잖아 하는 눈치였으나, 옅은 한숨을 쉬고는 뮌제의 손에서 코트를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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