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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11)화 (111/120)

# 110화

왕자의 걸음 뒤로, 그를 모시는 하인 한 명이 바로 따라붙었다.

걸어가던 제이는 문득 허탈한 웃음을 툭 뱉고는 말했다.

“설마 온느발레에서 돌아오는 길도 호위했었다는 말은 아니면 좋겠네.”

“예?”

“…….”

하인이 반문했지만 왕자는 아무 말 없이 계속 걸음을 옮겼다. 하인 들으라 한 말은 아니었다.

제이는 왕이 머무르는 본궁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본궁 첫째 입구에서 나와 회랑을, 정말이지 채 스무 걸음도 걷지 않았을 때, 그때 회랑의 어느 난간에 기대어 달을 등지고 앉아 있는 이를 보았다. 제이의 걸음이 멈추었다.

눈 감은 옆얼굴에는 그림자가 져 있다.

오전에 그가 보았던 그 옷도 아니었고, 어깨에 걸친 대공의 것일 검은 코트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도 보였지만, 그 모습에서도 제이는 우아한 위엄을 찾았다.

달빛과 그림자가 함께 흘러내리는 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카락은 한나절 새 금색이다.

온느발레의, 그때 그 시절의 뮌제 로헤올이 가졌던 색.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내게 하달된 임무를 힘을 다해 지키는 것뿐이니 당신은 상관 말고 안전하게 생명을 이어 가면 됩니다.]

살아 있을 줄 알았어.

라파엘 에흐베가 수년을 그랬던 것처럼, 이번만은 네 생존을 믿었어.

[머리가 있다면, 내가 왜 표면적으로 가치 없는 인질 따위에게 우호적이었을지를 생각해야지요.]

하지만 여전히, 나는 네 생존에 관해 아무것도 못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자신을 지킬 힘도 없이 계속 스스로를 가엾어하고 싶다면, 그리 해요. 그리하다가 순순히 살해당하면 됩니다.]

어느새 이쪽을 보고 있는 뮌제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그대로 꽤 오랜 시간 서로를 보았다.

물끄러미 왕자를 보고 있던 뮌제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쪽으로 오라는 느린 손짓을 본 제이는 눈을 크게 떴다. 왕자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와 같이 가려 하는 하인에게는 팔을 뻗었다. 왕자의 뜻을 알아들은 하인은 바로 멈춰 섰다.

제이는 뮌제의 옆도 앞도 아닌 애매한 곳에 멈췄다. 서로에게 손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왕자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앙느 셰 베흐쥰…….”

들어가서 기다리지.

“대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왼쪽 눈을 살짝 찡그리고 있는 뮌제는 나직하게 대꾸했다.

정확히는 라파엘과 엘르시어 둘 다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건 말하지 않았다.

막상 라파엘은 뮌제가 왕궁이 아닌 에흐베의 드비에 성에 먼저 가서 진찰을 받기를 바랐지만, 뮌제가 완고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라파엘은 직접 태의를 불러와서 뮌제를 일단 진료하게 했다. 엘르시어는 먼저 입궁하지 않고 뮌제의 응급치료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하고 나서야 세 사람은 입궁했다.

치료를 받았다고는 해도 거의 다 죽었던 몸이기에 움직이기가 쉽지 않긴 했다. 지금 굳이 난간에 걸터앉아 있는 것도 그 탓이었다. 주입된 독도 문제였다. 즉사할 독은 아니었으나 온몸을 쥐어짜는 고통과 함께 서서히 죽어 가는 독이다 하더라. 해독제를 복용했는데도 아직도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러나 뮌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살피던 왕자는 쓴웃음을 짓고 물었다.

“대공이 여기 계시는 모양이네요.”

“조금 전 아리오의 왕을 만나러 올라갔습니다. 왕자와 엇갈렸나 보군요.”

“…….”

온느발레에 있었을 때처럼 적당히 예의를 차려주는 어조였다.

온느발레에서와 다르게 아리오어로 대화한다는 큰 차이가 있지만.

다시 들어도 여전히 뮌제는 온느발레 억양이 조금도 없이 완벽한 아리오 태생의 아리오인처럼 말하고 있었다.

제이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게 두려웠다.

“아리오어……, 언제 공부했어요?”

“글쎄……. 당신을 맡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공부했던 것 같네요.”

그럼 그가 그토록 아리오어를 가르쳐 줘도 다 잊어버리곤 했던 게 전부 거짓된 연기였다는 말이었다.

“……왜요? 나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그랬지요. 당신이 허튼짓은 하지 않는지 지켜보려면 아리오어를 알아 두는 게 좋긴 하니까.”

“허튼짓…….”

“하지만 그런 건 아리오어를 할 줄 아는 자를 고용해도 되었던 일이지요. 내가 바쁜 와중에도 아리오어를 배운 주된 까닭은 달리 있습니다. 그게 왕자는 아니고.”

외국어를 알아 두면 알아 둘수록 더 많은 책을 번역 과정 없이 그녀가 바로 읽을 수 있다. 외국어는 그래서 그녀에게 가치 있었다.

뮌제는 지그시 바지를 움켜쥐는 제이의 손을 일별했다.

한참 침묵하던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날 무어라 생각합니까?”

뮌제의 어깨 즈음을 보고 있던 제이의 시선이 올라왔다. 눈이 마주치자 뮌제는 보충했다.

“내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고 있습니다. 어미? 누이? 스승?”

“…….”

“…….”

“……그 전부.”

제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창백한 얼굴의 뮌제는 느리게 호흡했다. 목소리를 내기가 조금 힘들었다. 어디든 실내에 들어서면 바로 고꾸라져서 기절한 것처럼 잠에 들지도 몰랐다. 그녀가 몸을 진정시키는 호흡을 몇 번 반복하는 사이 제이는 눈물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안 됩니까?”

“…….”

“당신이 내게 준 게 얼마나 큰지 당신은 모릅니다. 내가 당신에게 매달릴 만큼 당신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어요.”

“내가 라파엘에게 하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네요.”

“…….”

“그럼 라파엘도 날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있을까.”

제이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뮌제는 저희 사이에 남아 있는 관계의 조각마저도 전부 부스러기로 만들어 버리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뮌제, 당신은 나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는구나.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하게 그의 앞에 손이 왔다.

제이가 놀라서 뮌제의 얼굴을 보자, 뮌제는 내민 손을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왕자는 머뭇머뭇 그 손 위에 손을 올렸다. 그는 뮌제의 손이 제 손에 거의 다 가려질 정도로 작다는 걸 순간적으로 인지했다. 그럴 만큼 그 상태가 그의 눈에 기묘했다.

그사이 뮌제는 제이를 자기 옆으로 당겼다.

왕자는 얼떨떨하게 뮌제와 나란히 난간에 기대어 앉게 되었다. 뮌제의 손은 곧바로 제이에게서 떨어졌다.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떨어진 것도 그때였다.

“우리 서로의 불행에 대해 말해 볼까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했지요.”

“…….”

“나도 그랬습니다. 부모님의 관심은 윌리엄에게 쏠려 있었지요. 당신은 본 적 없지만 오죽했으면 내 또래 아이들이 내 눈치를 봤어요. 내가 그렇게 불쌍하게 보였던 모양이지요.”

“……공작이?”

“네. 내가. 두 분이 나를 안타까워했던 적은 한순간도 없었을 겁니다. 윌리엄만이 너무도 불쌍하고 안타깝고 애지중지해야 할 자식이었지요. 마법사로 태어나지 못한 데다 몸까지 약해서 내가 태어날 때까지 숨겨져 키워진 첫째 자식.”

제이는 경악하여 뮌제를 돌아보았다.

뮌제 역시 제이를 보고는, 옅게 웃었다.

“이제부터 말하는 건 정말 당신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혈에 대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고. 윌리엄은 대외적으로는 내 동생이었지만 실은 오라비였습니다.”

“…….”

“어렸을 때부터 가장 우선적으로 배운 게 윌리엄을 사랑하고 윌리엄을 지키는 거였어요. 난 윌리엄에게서 후계자를 빼앗은 죄인이니까. 후계자를 빼앗긴 윌리엄이니까.”

“…….”

“살아 있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였는지 모릅니다.”

마치 밤 산책을 하는 것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운 목소리로 나온 고백이었다.

오히려 당사자 아닌 제이가 허벅지 위에 모은 두 손을 깍지 끼고 힘주었다. 듣기 힘들었다. 뮌제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다시 앞을 보았다.

“라파엘과 친해지게 되면서 좀 나아졌지만,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악마가 날 잡아먹으려다가 실패하고는 윌리엄의 몸에 들어갔거든요. 그날 악마는 윌리엄의 손으로 부모님을 살해했습니다.”

“악…….”

그 순간 제이의 목구멍에서 어떤 소리가 흘러나왔다. 반사적인 신음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왕자 스스로도 흠칫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뮌제는 침대에서 어린아이에게 동화를 들려주듯 다감하게 답해 주었다.

“악마는 마법의 근원 같은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마법이 악마의 요술에서 비롯된 것이거든요. 잘 찾아 보면 역사서에 나옵니다.”

“본……, 본 것 같아요.”

“그래요. 그게 신화에 불과한 거짓은 아닙니다. 진실로 있었던 일이고,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악마가 힘을 되찾겠다고 이런 짓거리를 벌였었어요.”

“…….”

“악마를 죽이려면 윌리엄도 함께 죽어야 했어요. 그래서 난 윌리엄을 살릴 방도를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난 살아 있는 걸 힘겨워하지 못했습니다. 윌리엄을 저 지경으로 만든 내가 무슨 낯짝으로 그런 사치스러운 감정을 가질까.”

뮌제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두 손을 올려, 걸치고 있던 라파엘의 코트 앞섶을 잡고 조금 잡아당겨 모았다. 그녀는 그 후에 말을 이었다.

“결국 윌리엄은 악마와 함께 죽었지만.”

“…….”

“사람들에게는 자기 불행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지만,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내가, 이런 사정을 가진 이 내가,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며 내게 의지하려 하는 당신을 어떻게 봐야겠습니까?”

제이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불쑥 오르는 반발심을 억누른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부친이 자기 아들을 죽였다고 충격을 받아 내게 의지하려 하는 당신을 어떻게 봐야겠습니까?”

“…….”

“당신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당신의 정적을 처리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있습니까? 당신이 고생하였으니 다음 왕을 위해서는 미리 정적을 없애 주겠다는 뜻이었다는 생각은?”

“그런 거 바란 적…….”

“당신이 왕 될 재목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죽었겠지요. 그럼 왕 될 생각 없으니 왕실에서 놓아 주든지, 아니면 차기 왕을 위해 죽이든지 하라고 가서 왕에게 요구하면 되겠습니다.”

춥지 않은 밤바람이 그들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뮌제는 입을 다문 제이를 따라 잠시 침묵하다가, 얕은 한숨을 흘렸다.

“그런 것들이 싫은 당신에게는 왕자로 태어난 죄밖에 없지만, 이미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현실을 외면한다고 현실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

“불행을 이야기하면 서로 끝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가족에 대한 불행을 이유로 내게 보호를 받으려 하기에는, 나 역시 가족 사정이 불행했던 사람입니다.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나도 누군가에게 보호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

“나도 힘들고, 나도 쉬고 싶고, 나도 때때로 보호받고 싶습니다.”

“…….”

“당신 부친도 그럴 테고, 당신의 형제들도 그럴 겁니다.”

고개 숙인 왕자의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떨어졌다.

뮌제는 앞을 보던 그대로 턱을 조금 더 들었다. 입을 벌린 그녀는 소리가 나도록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 대화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그녀의 음성에 분노나 짜증이 섞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당신이 당신 신분에 대해 책임지든 아니하든 관심은 없어요. 난 이제 로헤올도 버린 사람인 것을.”

“…….”

“다만 난 당신이 당신 편해지고자 내 책임을 늘리려 하는 게 싫습니다.”

제이는 흐느낌을 삼켰다.

연방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도 더는 흘리지 않으려고 눈을 꽉 감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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