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옷은.”
“예, 예?”
“그 사람. 옷은 입고 있나.”
“……입고 계십니다.”
일순 눈을 동그랗게 떴던 시녀가 금세 표정을 정리한 뒤 대답했다.
혹시나 하는 상황까지도 배제한 라파엘은 하녀 한 명에게 손짓했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하녀의 손에서 수건 하나를 집어 든 그는 직후 욕실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예의상 하는 노크도 없었다.
달칵. 넓은 욕실을 가로지르는 동안 등 뒤에서는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욕조 앞에 선 라파엘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몸을 굽혀 욕조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뮈즈.”
물속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뮌제는 흠칫 놀랐다.
“으, 아, 깜짝이야…….”
“옷 입고 물에 들어가 있는 것은 좋은데, 물이 식으면 나오기로 했잖아. 감기 걸려.”
그리고 잘못하면 익사한다.
그러나 라파엘은 죽음의 위험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랬듯,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는 뮌제가 정신을 차리는 동안, 소매를 살짝 걷고 욕조에 손을 담가 물 온도를 확인했다. 역시나 다 식어 싸늘했다.
“물? 아, 몰랐어…….”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늘어지는 목소리로 뮌제가 대꾸했다.
대답만 잘한다. 물이 식었다고 제 발로 나온 적이 없는 사람이.
뮌제는 흠뻑 젖은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라파엘은 가지고 온 수건으로 일단 뮌제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얼굴의 물기를 닦아 주는 내내 뮌제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라파엘은 문득 웃고 말았다. 그는 부드럽게 농담했다.
“로헤올 공작 각하. 이렇게 덤벙거리시면 당신이 온느발레에 있을 때에도 제가 불안합니다.”
그러자 뮌제는 눈도 뜨지 않고 살짝 졸음에 잠긴 음성으로 대답했다.
“에흐베 대공 전하 앞에서만 이러니까 괜찮습니다…….”
“…….”
라파엘은 말없이 마지막으로 뮌제의 턱끝에 맺힌 물까지 훔치고 수건을 거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는 뮌제의 이마에 입 맞추고 속삭였다.
“응, 알아.”
그는 뮌제를 욕조에서 일으켜 세운 뒤, 뮌제가 끼고 있는 반지와 그 반지를 끼고 있는 오른손 약지를 지그시 잡았다가 놓았다.
“시중들 사람 들여보낼게. 씻고 나서 같이 쉬자.”
“그러고 보니……. 너 시찰 갔다던데.”
“다녀왔지. 먹고 싶은 건 있어?”
“으으. 맛있는 거.”
물이 뚝뚝 떨어지는 팔을 들어 기지개를 켠 뮌제가 대답했다.
피식 웃은 라파엘은 욕실을 나왔다. 시녀와 하녀들을 욕실로 들여보내고 나서 그는 바로 뮌제의 방을 나왔다. 방문 옆에 대기 중이던 옥타브가 바로 따라붙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사소하게 일어났던 일이나 급하지 않게 제출된 서류들에 대해 간단히 보고 받는 것만 그로부터 장장 20분이 걸렸다.
집무실에서 몇몇 서신을 확인한 라파엘은 적당한 시간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나온 뮌제가 머리카락을 말리고, 새 옷을 입고, 이제 막 몸을 웅크렸을 만한 최소한의 시간이 흐른 상태였다.
뮌제에게 향하는 길. 부친 되는 백작과 함께 있던 젊은 여인이 저희 군주를 보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전하.”
“전하.”
에흐베 대공은 백작에게 고개를 까닥하여 인사한 뒤 그들을 지나쳤다.
무표정이던 대공은 그 직후, 이쪽으로 오는 사람에게는 달콤한 음성을 전했다.
“뮈즈.”
뮌제는 제 이름을 부르며 두 손을 내민 라파엘을 잡았다. 아직 온기 어린 뺨에서 붉은 기도 가시지 않았다. 라파엘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 가는 중이었습니다. 방에서 쉬고 있지.”
“일 분이 아쉬워서요.”
뮌제는 나른하게 대답하면서 라파엘의 옆으로 살짝 물러나 에흐베의 귀족과 눈을 마주쳤다. 이쪽을 뚫어져라 보는 백작을 외면하지 않은 것이었다. 라파엘은 뮌제가 관심을 주었음에도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드 세네허 로헤올…….”
백작이 어딘가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대 온느발레의 로헤올 공작은 말없이 고개를 까닥인 뒤 옅게 미소지었다.
“에흐베어로 말씀하셔도 괜찮네.”
“……예. 감사합니다.”
“오…….”
“뮈즈.”
“예?”
묵묵히 기다리던 라파엘은, 무슨 흥미가 들었는지 백작 부녀를 물끄러미 보는 뮌제를 불렀다.
뮌제가 동그랗게 빛나는 눈으로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라파엘은 빙긋 웃었다.
“그만 갈까? 식사하러 가자.”
“아, 예.”
순순히 대답하는 뮌제의 손을 꼭 잡았다.
에흐베의 백작과 그 여식에게 뮌제는 눈인사를 남겼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그걸 놓치지 않은 라파엘은 침묵하다가 뮌제에게 말을 걸었다.
“일 분이 아쉽다는 건, 이번에도 금방 가는 거지?”
“그렇지. 원래 다음 달에 닷새 정도는 있을 수 있게 일정을 빼놨었는데……. 지금 당장 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 다음 달에는 못 오겠지만.”
금세 라파엘에게 관심을 돌린 뮌제는 그런 말을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남자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라파엘은 뮌제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무슨 일 있어?”
“그냥, 좀. 별건 아니야. 마법사가……, 마법사가 골치지.”
“루미나리에단 일이야?”
“아니. 아주 개인적인 일.”
“……또 습격했어?”
뮌제를 살피는 그의 사람은 물론이요, 뮌제가 붙여 준 로헤올의 기사에게서도 그런 보고는 못 들었었다. 굳은 라파엘의 얼굴을 본 뮌제가 하하 웃었다.
“아니야. 그런 거.”
“…….”
“정말이야. 어떤 마법사와 일이 좀……, 일이 좀 있었어.”
뮌제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떨렸다.
라파엘은 걸음을 멈추었다.
역시 멈춘 뮌제는 동요하지 않고 라파엘에게 손짓했다. 그녀에게로 몸을 돌려 허리를 굽힌 라파엘의 눈동자를 뮌제는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올려 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만지작거렸다. 왼 관자놀이 위를 단정하게 넘긴 짙은 회색 머리카락과 연회색 눈동자를 한눈에 담아보던 뮌제는 웃었다.
“나야말로 의미를 두고 있었나 봐.”
“……응?”
“아무것도 아니야.”
알 수 없는 말을 한 그녀는 라파엘의 볼을 꼬집듯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근래에는 하지 않았던 장난이었다.
한 걸음 물러난 뮌제가 또 웃었다.
“아직 네게 말할 건 아니야. 그 마법사와의 일로 힘들었고, 네가 너무, 너무 많이 보고 싶었어.”
“…….”
라파엘은 말없이 뮌제를 품에 안았다.
이게, 뮌제 로헤올이 폭사하기 전, 두 사람이 드비에 성에서 마지막 함께한 날이었다.
두 달 후 라파엘이 잠시 온느발레에 들렀다가, 뮌제가 로헤올령에 내려가는 일정에 맞추어 에흐베로 돌아갔고, 그게 끝이었다.
* * *
제국의 방패로 이름 높은 뮌제 로헤올 공작이 산길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하였다.
* * *
‘마법 혹은 아티팩트에 의한 변고가 있었던 것 같다.’
순식간에 도착한 현장에서 그는 멈춰 섰다.
눈앞을 물들인 현장을 보고, 보고, 보았다. 아주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그의 오랜 친구가 폭사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현장이었다.
푸른 산길.
이미 산화되어 검게 변해 버린 핏자국.
피 웅덩이. 아직 물들어 있는 길.
갈기갈기 찢긴 육신의 잔해. 피 묻고 그을린 채로 나무 기둥에 꽂혀 있는 검.
라파엘의 연회색 눈동자는 그 모든 것을 넓은 시야로 한 번에 받아들였다. 최소한 한 생명 이상이 반드시 숨졌을 게 분명한 현장이었다. 이곳에서 분명 누군가가 죽었다.
“……전하.”
그의 기사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라파엘이 너무 긴 시간 한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은 그 부름을 듣지 않은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닦인 길을 벗어나, 비탈길에 서 있는 나무 앞에 그는 섰다. 검 하나가 꽂힌 나무였다.
라파엘의 시선은 기도처럼 검을 훑어 갔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검은 장갑을 벗었다. 수분 없이 건조하게 마른 손끝의 살갗이 느리게 검의 손잡이를 스쳤다. 나아간다. 감쌌다. 이것에 남아 있을 수가 없는 체온을 찾고자 절박한 손길이었다.
“…….”
잠시 가만히 있던 대공은 나무에서 검을 빼냈다.
이것은 그가 친구에게 선물하였던 검이다.
검을 잡은 라파엘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검에 묻은 마른 피를 내려다보고 있던 눈을 들었다. 이걸 잡고 있었다면 마법이 발동하였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거라면, 뮌제는 검을 놓았거나 아예 잡지도 않은 것이다.
이 검은 검집에서 나와 있었다.
뮌제는 검을 잡았다가 놓았다.
감정이 아예 말살된 듯 무표정한 얼굴이 비탈길의 끝을 향했다. 그렇게 위를 보고 있던 대공은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들었다. 이 숲의 모든 녹색이 우수수 부딪히는 쓸쓸한 소리를.
그림자 진 라파엘의 눈동자는 비로소 흔들렸다.
뮌제 로헤올. 회색 눈동자. 금색 머리칼. 찬란한 웃음. 느긋한 휴식. 오후. 고즈넉한 평온.
그의 평온.
“…….”
그의 심장.
그의 생명.
그의 숨.
친구의 것과 같은 연회색 눈동자가 아주 잠시 초점을 잃었다. 그는 다시 검을 내려다보았고, 곧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가슴이 아프게 뛰었다.
검을 잡은 채로 비탈길을 내려온 대공은 ‘현장’이라 할 산길을 조금 더 보다가 몸을 돌렸다.
* * *
라파엘은 뮌제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뮌제가 폭사하였다는 이 산길이 그에게는 내내 사무치는 장소가 되었다.
뮌제는 죽지 않았다.
뮌제가 죽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만약, 정말 만약에, 라파엘이 이 산길에 뮌제와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윌리엄의 일이라면 뮌제는 이성을 잃는다.
이성 있는 눈빛, 이성 있는 표정, 이성 있는 태도로, 이성 잃은 행동을 한다.
그런 뮌제를 윌리엄에게서 보호할 수 있었다면, 이 산길에서만이라도 뮌제를 보호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산길.
피가 고이고, 살이 갈기갈기 찢긴 이곳.
뮌제는 살아 있겠지만, 그래도 뮌제에게 무슨 일이 생긴 이곳.
이곳이 대공에게 사무쳤다.
뮌제가 떨어진 이 산길을 덮은 환상이 황폐했던 까닭이 바로 그것이었다.
황제가 가진 백금의 관 호문클루스와 뮌제의 이동 마법에 라파엘의 마법이 간섭하여, 라파엘이 항시 내심 깊숙한 곳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던 곳으로 뮌제가 떨어진 것도 그 탓이고, 이파리 다 떨어지고 녹색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이 산길이 온통 눈에 덮여 있던 것도, 새로이 또 눈이 내린 것도 바로 그 탓이었다.
대공에게 이 산길은 그런 곳이었다.
뮌제를 바로 이곳에서 또 잃게 될 뻔한 라파엘이 무너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
뮈즈. 네가 죽었다 할 때.
살아 있는 걸 알았어.
살아 있으리라는 걸 알았어.
그땐 그랬어.
[네가 역부족이고 내가 역부족이라서 만약 온느발레가 에흐베를 멸망시킨다면, 그래도 끝까지 함께할 거야.]
같이 하겠다고 했잖아.
이번에야말로, 나의 끝까지 함께 하기로 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후작을 살리고자 정말 널 죽이려고 하다니, 이게 뭐야.
“너……, 마법사였어……?”
에흐베 대공은 그 질문을 하는 뮌제의 표정에 무너지지 않았다. 여태 숨겨 왔던 그 사실에 대해 묻는 뮌제의 표정에는.
뮌제의 눈빛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뮌제의 목소리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뮌제의 떨림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얼굴에 범벅인 뮌제의 피에 라파엘은 무너졌다.
뮌제. 네가 진심으로 죽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