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바로 그제 ‘마법사가 고용한 듯한 복면인들’에게 동생을 잃거나 자신이 죽을 뻔했던 당사자가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무게가 느껴졌으리라. 하지만 라파엘은 조금 다른 생각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도 널 죽일 수 있구나.]
라파엘은 뮌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덴트 젠비세르》를 덮고 도로 책장에 꽂았다.
그리고 다시금 새로운 책들을 모두 눈으로 훑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늘어져 있는 뮌제에게로 다가가서 그녀의 한쪽 팔을 부드럽게 눌렀다. 옆으로 누워 있던 뮌제의 몸이 느리게 넘어갔다. 잡고 있던 서류는 허공으로 올라갔다.
“안압 높아지니까 누우려면 편하게 눕자.”
“네에.”
라파엘은 나른하게 대답하는 뮌제의 이마를 살살 쓸었다. 이마에 손끝이 닿는 즉시 전과 다르게 뮌제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이마 위에 흐트러져 있던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 준 그는 서류에 붙박여 있는 뮌제의 눈동자를 잠깐 들여다보았다.
그의 것과 같은 연회색 눈동자는 그의 눈길을 눈치채고는 라파엘을 보았다.
“왜?”
“눈은 괜찮나 해서. 내가 대신 볼까?”
로헤올 공작이 봐야 하는 서류를 대신 보겠다 하는 말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알 수 없는 눈으로 라파엘을 올려다보던 뮌제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눈은 다시 살짝 움직여 서류로 향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말했다.
“……그럼 그래 줄래?”
라파엘은 침묵했다. 그 침묵을 어찌 받아들였는지 뮌제는 다급하게 서류를 가리켰다.
“아니, 그, 엄청 중요한 것들은 아니야.”
그런 건 상관없다. 중요한 내용이든,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든. 라파엘은 그저 뮌제가 이 권유를 받아들인 것에 동요했을 뿐이다.
공사 철저하게 구분하고, 그에게도 어느 정도 선을 긋는 뮌제가 로헤올 내부 업무를 타인에게 맡긴다는 건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라파엘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피곤하면 이럴까.
그는 뮌제에게 가만히 물었다.
“침실로 갈래?”
“아니.”
“가자. 거기서 보면 돼.”
“아니, 아니야. 여기 있자.”
전이었다면 못 이기는 척 라파엘의 말대로 했을 것이다. 얼마 전 그가 한 번 수면초를 태워서라도 재울 사람이라는 걸 겪은 이후로는 항상 그랬으니까.
‘전이었다면’, ‘전과 다르게’가 어째서 나왔는지를 라파엘은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착각이라며 선을 그었지만, 착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나오는 반응일 터다.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 가자. 나 있을 때에라도 좀 쉬어야지.”
“…….”
눈을 굴리던 뮌제는 그의 손에 손을 올렸다.
라파엘은 누워 있는 뮌제를 안정감 있게 일으켜 세웠다. 뮌제가 보던 서류들까지도 모두 챙긴 그는 뮌제의 손을 잡고 서재를 나왔다. 손을 빼려 하는 걸 알면서도 놓아 주지 않았다.
공작의 침실 안쪽까지 함께 들어갔다.
입고 있던 옷에서 베스트만 벗은 뮌제는 주섬주섬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서류를 티 테이블에 놓아 둔 라파엘은 그녀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주었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뮌제는 또다시 멈칫했다.
라파엘은 그만 가만히 웃고 말았다.
그는 다정한 눈으로 뮌제를 담으며 말했다.
“뮈즈. 괜찮다면 잠시 손 좀 줄래?”
“…….”
버석거리는 소리가 나며 이불자락 아래에서 뮌제의 팔과 손이 나왔다.
그에게 주지 않고 이불 위에 놓인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라파엘은 뮌제와 눈을 맞추었다. 그는 눈을 휘고 살며시 웃었다.
“우리 지금, 말도 안 되는 사이인 거, 알고는 있지?”
“……뭐, 그렇지. 어렸을 때부터 말도 안 되는 걸 겪어 왔으니까.”
그게 뮌제에게는 두 사람 간의 특별한 관계를 설명하는 모든 것이었다.
라파엘을 살린 일에 대해 착각하지 말라던 말과 같은 맥락으로.
별것 아닌 것처럼 대답한 뮌제도 이제는 물끄러미 라파엘을 보기 시작했다. 나른한 방 안을 기묘한 긴장이 채웠다. 어쩌면, 라파엘만 느끼는 긴장이었다. 베개와 이불에 파묻힌 뮌제는 이내 졸린 눈을 깜박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 이상하게 특별하긴 하지?”
“…….”
라파엘이 뮌제에게 고백을 하고, 뮌제는 그걸 착각이라고 차단해 버린 지금. 전과는 달라졌다.
이제 뮌제는 라파엘의 말을 기회 삼아 완전히 한 걸음 물러서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제부터 보여 온 멈칫거리는 선, 움찔거리는 선, 눈치를 보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완전히. 점선도 삐뚤거리는 선도 아닌 실선으로 완전히.
그리고 라파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조급하지 않게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에는 우정, 신뢰, 애정, 비밀, 선, 참 많은 게 있잖아.”
“응.”
“긴 시간도 있고.”
“응.”
“목숨도 있지.”
“…….”
적나라한 단어가 나오자 뮌제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녀의 생명을 주려던 일만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 대공의 손에서 라파엘을 구해 주려던 일도 있었다. 뮌제는 전자에만 신경이 쏠려 있는 것 같지만.
라파엘은 상의 겉옷의 주머니에서 반지를 두 개 꺼냈다. 드비에 성에서부터 품고 왔던 물건이었다.
반지 상자는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격을 갖추어 고백하는 모습은 분명 아니었다.
뮌제는 라파엘이 내민 반지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눈에서는 졸린 기색이 완전히 사라졌다.
움푹 베개에 파묻혀 있던 머리를 드는 걸 본 라파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뮌제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일어나 앉았다.
그런 뮌제에게 라파엘은 말했다.
“그런 우리의 관계를 기념해서.”
“…….”
“받아 줄래?”
창백한 얼굴의 뮌제는 어째서인지 라파엘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또, 잠시, 그의 손, 혹은 반지도 보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입을 열었다.
“라파엘. 너는 한 나라의 주인이지.”
“응.”
“지켜야 할 게 많다는 것도, 버려야 할 게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
“응.”
“그래. 알면 됐어.”
손을 올렸다. 약간 따뜻해진 손이 라파엘이 내민 반지 위에 올랐고, 싸늘한 손그림자가 라파엘의 손을 덮었다.
지난 사흘간 내내 그를 어색해 했던 뮌제는 한 손으로는 반지를 잡고, 다친 손으로는 라파엘의 목을 살살 안고 끌어당겼다. 방으로 들어오는 산들바람이 있었다.
끌려가 주는 그를 꼭 안은 뮌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라파엘. 넌 이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거야.”
“…….”
앉은 뮌제의 옆을 손으로 짚은 라파엘은 멈칫했다.
너야말로 이게 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텐데.
우정을 담은 반지, 신뢰를 담은 반지, 포장은 이리 담백하게 할 수 있다. 마치 뱀처럼, 마치 악마처럼, 그는 뮌제를 미혹하여 이 반지를 끼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반지가 바깥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비쳐질 것을 알았다. 실은 미혹당하지 않았을 뮌제 역시 알 터.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은 정말 특별한 짐을 나눠 가지는 것이다.
존귀한 이들이기에 짐이 되는 관계였고, 또 한편으로는, 존귀한 이들이기에 허락된 특별한 관계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반지를 나누었다.
거기에서도 마음의 차이는 있어서, 라파엘은 항상 오른손 약지에 꼈고 뮌제는 손에 끼기보다는 목걸이 팬던트 삼아 목에 거는 일이 많았다.
출장을 다니고 무기를 들거나 손을 써서 수사하는 일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목에 거는 편이 편했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 잠시라도 손에 끼긴 했는데, 반지는 왼손 약지, 검지, 오른손 약지, 검지. 수시로 그 네 손가락을 옮겨 다녔다.
그즈음 제이 왕자가 라파엘을 향한 질투를 조절하지 못하고 질질 흘리기 시작했지만, 라파엘은 신경 쓰지 않았다.
드비에 성으로 돌아간 라파엘은 가장 먼저 뮌제가 현장에 나갈 때 가지고 다닐 만한 검을 한 자루 주문했다. 황제가 루미나리에단의 단장이 아티팩트를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 준다고는 하나, 라파엘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부족했다. 애초에 뮌제는 아티팩트를 잘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뮌제가 윌리엄을 살리고 그녀 자신은 죽으려 하더라도 무조건 뮌제를 살릴 방법이 있어야 했다. 대공은 직접 검에 강한 방어 마법을 심었다. 그걸 뮌제에게 선물로 보냈다. 아티팩트는 싫다고 하는 뮌제에게는 이게 아티팩트라는 설명은 하지 않았다.
뮌제는 답신을 보내 왔다.
널 만나서 다행이야.
* * *
라파엘은 자신이 마법을 느끼게 된 건 말하지 않았다.
이게 결코 상식적인 일이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고, 그는 그 변화가 로헤올 저택 본관에 들어서자마자 생긴 것임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또한 그 자신이 뮌제에게 몹시 소중한 사람이라는 점 역시.
마법과 마법사라면 진저리치며 혐오하는 뮌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되길 그는 원치 않았다. 뮌제가 그를 위해 하는 걱정은 달지만, 지금의 뮌제에게 다른 염려를 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랑해. 윌리엄.
그의 옆에서 저것을 쓰고 있는 지금의 뮌제에게는.
* * *
드비에 성 근방에 잠시 시찰을 다녀올 일이 있었다.
드비에 성에서 가장 가까운 첫 마을을 지나, 다섯 번째 가까운 마을까지 왕복해야 했기 때문에 만일 ‘정상적으로’ 말을 탔다면 꼬박 하루가 걸릴 것이다. 그는 옥타브에게서 연락을 받았고, 때문에 적당한 곳에서 바로 텔레포트 하려다가, 멈추었다.
“…….”
[마법과 가까이 지내지 마. 더럽고 끔찍한 거야.]
[아티팩트를 써서 좋을 게 없어.]
[마법은 더러운 거야.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어.]
이제는 호문클루스까지 만들어 버린 마법사로서, 그는 뮌제가 가까이하지 말라던 더러운 마법과 더 가까워졌다.
라파엘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아티팩트를 쓰는 걸 뮌제에게 숨기면서까지 뮌제와 함께 하려는 시간을 1분이라도 늘려 왔었지만…….
잠시 하늘을 보던 대공은 다시 말에 올랐다.
뮌제와 함께 하는 시간은 매분 매초가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그러나 지금까지처럼 아티팩트를 쓰기에는 거리꼈다. 전과 다르게 그는 이제 호문클루스까지 가진 마법사이기 때문에.
그가 어딜 다녀온 건지 아는 측근들은 모두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뮌제가 왔다 하는데도 예정했던 시각에 귀환을 한 군주를 보고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딱 그쯤에서 그쳤다. 놀랐다 운운하는 말을 실제로 입에 담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라파엘은 클로크를 벗으며 물었다.
“그 사람은.”
“방에 계십니다.”
옥타브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라파엘의 뒤를 황급히 좇다가 망설이는 기색으로 말했다.
“아마도 씻고 계십니다.”
신분 낮은 자, 신분 낮은 타인으로서는 보고하기 껄끄러운 내용이 맞았다. 상대가 뮌제 로헤올이기 때문에.
그러나 라파엘은 옥타브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뮌제 로헤올의 타인이 아니었다. 그의 걸음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대공은 뮌제가 드비에 성에 올 때마다 머무는 방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리고 스스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열려고 다가오다 멈추는 어린 시녀가 보였다. 대기하고 있는 하녀들도 대공을 보고 당황한 눈치였다.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그들을 본 라파엘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뮌제가 여기 드비에 성에서도 ‘이런’ 적은 없으니 저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할 만도 했다. 그는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