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뮌제는 돌발 상황을 자주 일으키는 마법사들조차도 제압하여 체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저 정도는 뮌제도 그도 상대하기에 어렵지 않다. 그럼 불안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뮌제의 저 질린 얼굴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그러면 안 돼.
라파엘은 달려가며, 그 어디에도 소지하고 있지 않았던 검을 손에 들었다. 그가 무얼 하기 전에 뮌제가 저들을 처리할 것이다. 그래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상황 역시 대비했다.
아니, 실은, 뮌제가 처리하지 못하리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바랐다.
그러지 않을 거지?
설마, 그러지 않을 거지?
그러나 뮌제는 그렇게 했다. 복면인들을 처리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윌리엄의 앞을 향해 뻗은 손으로 막아섰다. 윌리엄 대신 그 손에 검이 박혔다. 그 손을 가지고 뮌제는 지체하지 않고 복면인을 발로 차서 밀어냈다.
그러나 곧바로 다른 복면인이 덤벼들었다. 뮌제는 거기까지 방어할 정신은 없었다. 멈칫한 그녀는 그대로 윌리엄 앞에서 버텼다. 정말 윌리엄 대신 죽으려 했다.
그 직후 라파엘은 검을 휘둘렀다.
뮌제의 앞을 베려던 검이 튕겨져 날아갔다. 한 생명이 피를 튀기며 순식간에 꺼졌다. 복면인을 베는 것과 동시에 뮌제의 앞에 성큼 선 라파엘에게만 철벅거리는 피가 튀었다.
털썩, 무거운 것이 가라앉는 소리를 앞에 두고 라파엘은 피 떨어지는 검을 옆으로 내렸다.
“…….”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홉 남은 복면인들이 주춤거렸다.
그들이 어찌 반응하든 말든 라파엘은 뮌제를 등지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무감정한 연회색 눈이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복면인들은 서로 눈짓을 하는 듯하더니 놀랍게도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라파엘은 일국의 군주였다.
공식적으로 아티팩트를 가지지 못하는 귀족들과 다르게, 라파엘은 몸을 지키기 위해서 항시 아티팩트를 소지하고 다닐 수 있는 존귀한 이였다.
그리고 그건, 그가 무얼 해도 아티팩트의 힘으로 포장될 수 있다는 뜻이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라파엘이 턱을 들었다. 뮌제로 인한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함이었다. 그 순간 아홉 남은 개들 중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의 목이 단숨에 잘려 떨어졌다. 퍽. 데구르르.
살아남은 하나는 그대로 꿇어 앉힌 라파엘은 그제야 뮌제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잠시 그들 사이의 세상이 멈춘 듯했다. 그가 가진 검의 날을 타고 내려간 피가 또 떨어졌다. 뚝.
말없이 그를 보던 뮌제는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느새 주저앉은 윌리엄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윌리엄.”
순서는 명백했다. 윌리엄이 우선.
라파엘은 손에 가벼운 검이 박혀 있는 뮌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오른발을 반걸음 정도 물렸다. 뮌제를 대신하여 주변을 정리해야 했다. 달려오는 루미나리에단 단원 몇과 황궁의 정문을 지키는 병사 몇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빌. 나 좀 봐봐.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거지? 응?”
“겨우 이 정도로도 널 죽일 수 있구나.”
그 잔잔한 말을 들은 사람은 뮌제와 라파엘 뿐이었다.
자리를 뜨려던 라파엘은 멈춰 섰다. 다시 뮌제와 윌리엄 있는 자리를 돌아보았다.
피 흘리고 있는 뮌제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대꾸했다.
“너에 관한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내가 눈이 멀어서 그래.”
잠긴 음성으로 그녀가 말한 건 그런 고백이었다.
여태 무표정이었던 라파엘은 그제야 살짝 찡그린 눈으로 뮌제의 뒷모습을 보았다. 뮌제의 머리 옆으로 윌리엄과 눈이 마주친 건 그 직후였다. 스쳐 지나간 시선이었다.
뮌제가 이렇게 물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살아 있는 거지?”
윌리엄은 뮌제의 이마 위에 흩어진 잔머리를 살살 옆으로 쓸어넘겼다. 가만히 이어진 손길의 끝에서 윌리엄은 다정하게 대답했다.
“응. 보다시피.”
윌리엄 로헤올은 뮌제에게 다친 곳이 어떠냐고 걱정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
* * *
뮌제는 저택에 돌아와 윌리엄이 침대에 눕기까지 보살폈다. 로헤올의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제발 정식 치료부터 먼저 받으시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뮌제는 의사가 급히 검을 빼고 간단히 지혈해 준 것만으로 두 시간을 버텼다.
윌리엄이 잠들고 나서야 그녀는 치료받았다.
그동안 뮌제는 라파엘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인사조차 없었다.
동생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는 뮌제를 대신하여 루미나리에단의 단원들과 온느발레 병사들에게 지시하며, 묵묵히 뮌제를 뒷받침했던 라파엘 역시 굳이 뮌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뮌제의 집무실에도 찾아가지 않았다.
대공은 로헤올 저택에 올 때마다 머무는 방 발코니에 한참 앉아 있었다. 노을이 번지는 저녁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식사해야지.”
허락 없이 들어오는 걸 듣고 뮌제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라파엘은 앉은 자리에서 뒤를 돌아보고는 살며시 미소지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하늘을 보고 있으면서 그걸 몰랐어? 무슨 생각 중이었길래.”
발코니 입구에 서 있던 뮌제가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파엘은 빈 의자를 끌어와 앉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저희 두 사람 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이대로 조용히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건 서로 알고 있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손은 어때.”
“괜찮아. 한동안 불편하겠지만.”
“뮈즈.”
“응.”
“너는 윌리엄을 지키기 위해 마련된 수단이라고, 우리 어렸을 적에 네가 말한 적이 있어.”
“……응. 그랬던 것 같네.”
잠시 망설이던 뮌제는 미소지었다. 애써 쓴 가면이다.
라파엘의 눈이 차가워졌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그는 입을 열기 전 이를 사리물었다가 놓았다.
“로헤올의 사정은 몰라. 그렇게 말한 이유도 분명 있겠지. 네가 윌리엄에게 각별한 것도 알아. 하지만 윌리엄의 일이라 해도 이성을 잃지 마.”
“…….”
“제발 윌리엄을 감싸고 대신 죽을 생각일랑 하지 마.”
뮌제는 죽으려 했다.
윌리엄을 살리려 한 게 아니라, 뮌제 그녀가 죽으려 했다.
그곳에 우연히 라파엘이 있지 않았다면 뮌제는 죽거나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사실 이미 왼손은 상당히 무거운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피에 젖은 바람에 먼저 씻어야 했던 잿빛 머리카락이 저녁 바람에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뮌제는 약간 흐트러진 그를 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윌리엄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내게 중요한 사람이야.”
“너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내게 중요한 사람이야.”
토씨도 빼놓지 않고 같은 말이 나왔다.
뮌제의 손끝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잠시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가 조금 떨어지고, 떨리는 두 손이 얼굴을 감쌌다.
피곤해 보였던 창백한 얼굴이 손에 가렸다.
왼손에 감은 흰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손을 잠시 뚫어져라 보던 라파엘은 숨을 삼켰다. 라파엘의 나직한 음성은 그 상태의 뮌제에게 또 물방울처럼 떨어졌다.
“너는 내게 유일한 사람이야, 뮈즈.”
그리고 그런 사람이 눈앞에서 죽을 뻔했다.
너를 잃을 뻔했다.
네가 죽으려 했다.
너 없는 세상에 내가 잠시라도 있을 뻔했다.
광장에서부터 내내 차분한 얼굴이었던 라파엘은 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아까 그 복면인들을 살해했던 것처럼 잔혹하게 살해해본 적이 오늘 이전에는 없었다. 그 정도로 그는 분노했고, 흔들렸다.
“미안해. 고마워, 친구야.”
그녀가 남긴 말은 그것뿐이었다.
* * *
이날 그는 마법사이기에 뮌제를 구할 수 있었다.
또다시.
마법사이기에.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마법사가 뮌제를 적대하여 뮌제에게 해가 간다면, 또다시 그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에 진저리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그는 벗어나고자 하지도 않을 것을 결정했다.
더럽다면 더러운 대로, 이곳이 천하고 저열한 곳이라면 그런 대로, 그는 이곳에 빠져 있기로 했다. 더는 고민하지 않겠다. 더는 초조해하지 않겠다.
그 밤, 라파엘은 호문클루스를 만들었다. 그렇게 그는 남의 생명을 앗아 제 마법을 부리는 완전한 마법사가 되었다.
뮌제가 진저리치는 그 더러운 마법사가.
* * *
뮌제가 새로 들여온 책들을 찬찬히 살피던 라파엘은 책 한 권 앞에서 눈을 멈추었다. 큰 책들 사이에 꽂혀 있어 잘 보이지 않는 책.
라파엘은 그 책 옆의 큰 책을 엄지로 살짝 눌렀다.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제목이 제대로 보였고, 그는 잘못 보지 않았다.
드물게도 아리오어로 된 책이 맞았다.
그리고 그가 알기로 뮌제는 아리오어를 하지 못한다.
대공의 눈이 약간 차가워졌다.
오로지 에흐베어만 할 줄 안다고 능청스럽게 포장하는 로헤올 공작은 사실 더 많은 외국어에 능숙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다섯 국어 중에 아리오어는 빠져 있었다. 제이 왕자가 가르치려 해도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새 공부하였을까. 아니면 읽지 못하는 걸 그저 들여온 걸까.
시력까지 일시적으로 잃을 정도로 몸을 축내면서, 독서는 여전히 놓지 않았나.
그는 그 작은 판형의 책 제목을 잠시 눈에 담다가 손을 거두었다.
이쯤 겪으면 뮌제가 무슨 주제에 관심이 있는지는 알 수밖에 없다. 다른 주제의 책들도 들여와서 눈속임을 하려는 모양이지만.
라파엘은 시선을 옮겼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길은 또다시 멈췄다.
아래쪽 책장을 살피느라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그는 눈을 의심했다. 그는 앓듯이 뮌제를 불렀다.
“뮈즈…….”
“어엉.”
쿠션에 뺨이 눌린 대답이 날아왔다.
바닥에 누워 있지만 저래 봬도 업무 중이었다.
로헤올 공작은 보좌가 가까이 오는 듯하면 바로 의자 위로 올라가서 품위 있는 자세를 취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공은 그런 뮌제를 향해 책을 한 권 꺼내 들어 보였다.
“이거 어떻게 봐도 수상한 제목인데.”
옆으로 누워 있던 뮌제는 고개만 살짝 들어 그 책을 확인하고 또 누웠다.
“어어. 그거 필요해서…….”
“이게?”
라파엘은 애매한 표정으로 그 책을 보았다. 《덴트 젠비세르》. 짐승의 이빨. 딱 봐도 수상한 제목이다. 미약한 마법이 느껴지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아티팩트였다.
실제로 뮌제는 바로 대답했다.
“응. 아티팩트니까 만지지 마.”
아티팩트라면 질색하는 뮌제가 아티팩트를 서재에 보관해 둔다……. 혹시라도 윌리엄이 만져 일이 생기면 대경할 사람이 책들 사이에 태연하게 끼워 놓기까지 했다.
라파엘은 책을 펴며 대답했다.
“이미 만지고 있어. 그럼 이게 원본인 모양이네.”
“응.”
“일레인이라 하면 온건한 편인 그 독 마법사일 텐데, 이런 것도 썼나?”
“지난번에 너랑 나 중독시킨 장본인으로 추정되는 마법사니까 딱히 온건하지는 않아.”
“…….”
라파엘의 표정이 사라졌다.
그걸 보지 못한 뮌제는 폭폭 한숨을 쉬었다.
“내가 한번 보고 싶은 책을 그 마법사가 가지고 있는 것도 같아서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좀처럼 찾지를 못하겠네.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그것까지 들여 왔는데 도움도 안 되고.”
“도와줄까?”
“됐어. 마법사와 연관되지 마. 하등 좋을 게 없어.”
팔꿈치를 바닥에 댄 뮌제가 손을 들고 휘적거렸다. 그 손에 꼼꼼하게 감긴 붕대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