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06)화 (106/120)

# 105화

두 사람의 다음 만남은 미뤄지고 미뤄졌다.

뮌제가 라파엘을 보러 오기로 약속했었지만, 루미나리에단의 일로 바빠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던 탓이다.

중독되었던 일을 기점으로 라파엘은 로헤올의 사용인을 포섭하여 뮌제를 살피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 그의 방식대로 더 진행하다가는 뮌제에게 들킬 위험이 컸다.

너의 모든 걸 알고 싶어.

너의 모든 걸 알고 있길 원해.

네가 안전하기를 원해.

하지만 이걸 과연 뮌제가 허용할 것인가.

라파엘이 아는 그녀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지나친 간섭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라파엘이라도, 아무리 그라도, 이 정도까지 뮌제가 과연 허용할 것인가.

라파엘을 위해 태의까지 불러왔던 그녀다.

[서로에게 말하지 말아야 할 게 있고, 모르는 척 해야 할 게 있고, 선을 그어야 할 게 있을 거예요. 평생 그런 친구이면 좋겠습니다, 전하.]

괜히 선을 그은 게 아닐 것이다. 선이라곤 없는 것처럼 다 허용할 것이었다면 애초에 선을 긋지도 않았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뮌제에 대해 알고 싶은 건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모든 것.’

대공은 그 간단한 말에 담긴 무게를 알았다.

뮌제가 온느발레의 로헤올 공작이고, 라파엘이 에흐베 대공이기 때문에.

생각 끝에 라파엘은 자신의 마음을 뮌제에게 서신으로 전했다. 그가 여태 뮌제를 살펴 왔던 것도 토설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온느발레어 암호 중 하나로 쓴 서신이 두 장을 가득 채웠다.

뮌제는 그에 답장했다.

이걸 가지고 가는 기사를 허락할게. 로헤올의 기사인데, 너도 알다시피 내 보좌의 호위 겸 부관으로 붙인 사람이야. 따라서, 많은 걸 아는 사람이지만, 나 홀로 알아야 할 건 모를 사람이기도 해.

라파엘은 잠시 서신에서 눈길을 떼었다. 책상 앞에 서 있는 중년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뮌제에게 이미 명령을 듣고 왔는지 남자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상대적으로 대공 앞에서 표정 변화가 적은 드비에 성 사람들에 비해, 뮌제 휘하의 사람들은 그들의 주군 앞에서 웃거나 우는 걸 주저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라파엘은 중년 남성의 저 어색한 미소에서마저 뮌제의 흔적을 찾았다.

그는 다시 암호문으로 시선을 내렸다.

내가 농담할 수 있을 만한 경상을 입는다면 이 사람은 그 부상에 대해 세세히 알 거야. 내가 숨길 수 없는 중상을 입는다면 이 사람은 어느 정도 적당하게 알 테지. 하지만 그 중간 정도의 부상은 이 사람이 모를 거야. 그 정도야.

이 기사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의 수위를 미리 설명해 주기까지 했다.

또 어쩌면, 이 사람이 아는 정보가 거짓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너를 의식하여 일부러 이 사람에게 거짓을 알려 주는 일은 없을 거야. 이 사람이 아는 정보가 거짓이라면, 그건 그럴 필요가 있어서 이 사람에게 정보를 숨겼기 때문일 뿐이야.

알아들었다.

이 사람이 모르는 건 너 역시 모르고 넘어가도 되는 일이거나 로헤올 내부 기밀 중의 기밀이라는 뜻이야. 이 사람에게 언제든 연락하여 나에 대해 알아봐도 돼. 능력껏 해. 이 사람이 주인을 헷갈릴 정도만 아니면 돼.

잊지 않고 들어간 뮌제의 뼈 있는 농담이 그를 살며시 웃게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나를 걱정해 줘서 고마워, 라파엘. 내 소중한 친구.

“…….”

라파엘은 ‘내 소중한 친구’라는 단어를 한동안 보았다.

[착각이야.]

차분한 연회색 눈동자가 잠시 눈꺼풀에 가렸다가 드러났다. 대공은 뮌제의 글씨가 담긴 편지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로헤올의 기사에게 가장 먼저 이것을 물었다.

“그 사람의 건강은 어떤가.”

그러자 기사는 양다리 옆에 풀어놓고 있던 두 손을 갑자기 슬며시 맞잡았다.

기도하듯 깍지 낀 두 손을 움찔거리던 남자는 조심스럽게 대답을 시작했다.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대공은 약간 당혹스러워하며 기사를 보았다.

귓가에 뮌제가 신나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뮌제는 대공의 측근 중에 이런 종류의 조심스러운 성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라파엘은 기사가 안절부절못하며 깍지 끼고 있는 손에 시선을 주었다. 심지어 배포가 기사들에 비해서는 작은 그의 태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 기사가 그의 사람이었다면 불호령을 내렸겠지만, 이 기사는 뮌제의 사람이다. 적당히 다독여야 했다.

다 계산하고 보냈겠지. 뮈즈……. 그러나 에흐베 대공이 속으로 앓는 사이, 기사는 직전과 꽤 다르게 심지가 세워진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요즘 많이 피곤해하십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는지 깍지 낀 두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라파엘은 눈길을 올려 기사의 얼굴을 보았다. 다시금 눈이 마주치자 기사는 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직 바깥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종종 일시적으로 실명하십니다.”

라파엘의 표정에서 색이 빠졌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나와서도 안 되는 말이 나왔다.

“실명?”

“예. 잠시 쉬시면 괜찮아지시기에 지금까지는 어찌 숨겨 오셨습니다만……. 요즘 들어 빈도가 늘어나서 아무래도……. 루미나리에단 일로 출장이 잦으시다 보니 아무래도 시력을 잃으실 때 옆에 있는 이들이 대부분 루미나리에단 기사들이라…….”

“…….”

“슬슬 루미나리에단 단원들도 눈치챈 것 같습니다.”

로헤올 공작의 건강과 관련한 정보가 바깥으로 흘러나간다는 건 심각한 일이었다.

그러나 라파엘에게는 그러한 사실보다 뮌제의 건강 그 자체가 더 중요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대공은 물었다.

“오로지 피로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까닭이 있나.”

그건 아주 미련하고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뮌제와 함께 중독되었던 사람이 하기에는.

통찰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조급한 물음. 평소의 에흐베 대공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물음. 사실 라파엘조차도 질문을 던지는 순간 답을 찾았을 정도였다.

뮌제의 기사는 아랫입술을 물고 쓴웃음을 지었다.

“마법사들 때문이지요.”

내심 떠올랐던 답을 남에게서 듣는 순간, 라파엘의 심장은 내려앉았다.

“놀라울 정도로, 정말 놀라울 정도로 마법사들은 각하에게 살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하를 해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것입니다.”

뮌제를 편애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마법사의 입장에서 보면 마법사가 뮌제에게 살의를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그러나 마법사인 라파엘은.

“…….”

마법사인 라파엘은.

[네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마법사인 라파엘은.

[지금 아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더는 안 된다. 고귀한 에흐베에서는 마법사가 나와서는 안 된다.]

뮌제의 기사를 내보낸 라파엘은 홀로 남은 집무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잠시 앉아 있었다.

마법사가 뮌제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에 든 감정은 자기 파괴적인 것이었다.

[마법도, 마법사도.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더러운 것들이야.]

마법사인 뮌제조차 그렇게 평했던 존재들.

마법사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법사라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마법사라서 뮌제를 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마법사들이 뮌제를 감히 해하려 한다…….

그것들이 감히 뮌제를 해했다.

라파엘이 포함되어 있는 그 집단이 감히 뮌제를.

* * *

라파엘은 그로부터 3주 만에 온느발레의 영토를 밟았다.

[그러지 마, 라파엘. 아티팩트를 써서 좋을 게 없어.]

뮌제의 말을 마음 깊이 이해했다. 마법은 더럽다.

하지만 아티팩트를 쓰지 않는다면 뮌제를 볼 시간도, 기회도 줄어든다. 아티팩트가 있기에 에흐베를 비울 수 있었던 것이며, 아티팩트 없이는 일 년에 한 번 자리 비우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뮌제는 우리가 앞으로 만날 일이 별로 없을 것이라며 작별을 고했었던 바.

사실 매일 들러 아침 인사와 저녁 인사를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매일 식사도 함께하면 좋을 것이다.

휴식 시간에 뮌제가 그에게 기대고 조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바깥에서 그리도 예의 바른 사람이 그의 앞에서는 바닥에 드러누워 구르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책을 읽다가 잠든 그에게 담요를 덮어 주는 뮌제를 매일 만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전과 다르게 그것을 뮌제가 거절한 지금,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적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차마 그리할 수가 없다.

그래서 대공은 이번에도 아티팩트를 써서 왔다.

로헤올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라파엘은 이변을 느꼈다.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게 마법이라는 건 거의 바로 알 수 있었다. 반쯤은 본능적인 깨달음이었지만, 무엇보다, 로헤올이 비밀리에 아티팩트를 보관하는 장소에서 강력한 마법이 느껴졌다.

그 비밀 창고가 아니더라도 저택 곳곳에 작게 고인 마법들도 느껴졌다. 아마 로헤올에서 저택의 보호를 위해 비밀리에 박았을 아티팩트일 것이다.

생소한 느낌이다. 그리고 무언가가 이상했다.

처음에 그는 길을 잃은 것처럼 우뚝 섰다.

대공을 안내하려던 집사는 로비에 멈춰 선 그를 보고 함께 멈추었다.

“전하?”

“뮈즈.”

라파엘은 저도 모르게 신음처럼 그녀를 속삭였다. 뱉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대공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싸늘한 기분이 들자 퍼뜩 정신 차렸다. 그러나 그는 재차 그녀의 이름을 흘렸다. ……뮈즈.

오자마자 물은 게 뮌제였고, 지금은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외출 중이라고 답변도 이미 들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불안했다.

이런 이상한 일이 그저 일어날 리가 없었다.

라파엘의 단정한 얼굴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어디에 갔나, 그 사람.”

“……황궁에 가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시각입니다. 도련님께서 바깥바람을 너무 오래 쐬셔도 좋지 않으니 크게 지체하지 않으실 겁니다.”

“말을 빌리지.”

대공은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이 저택에서 라파엘이 할 수 없는 일은 거의 없다. 윌리엄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뮌제는 라파엘에게 거의 전부를 허락하여, 라파엘은 심지어 주인이 자리를 비운 시간에 로헤올 공작의 집무실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따라서 말을 빌리는 것쯤이야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집사에게 말을 남길 필요도 없고.

집사는 단정한 차림의 대공의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대공이 로헤올의 것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 까닭이 오로지 저희 주인 때문이라는 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때는 종종 염려가 되곤 하였다.

어차피 두 분 다 각자에게 ‘맞는’ 배우자를 찾으실 터. 이리 서로를 아끼시는 건 두 분과 미래의 배우자들께 좋을 게 없는데.

하지만 이내 집사는 시선을 거두었다. 저 존귀한 분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실 일. 그가 감히 평가하고 입을 댈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집무실로 돌아갔다.

* * *

황궁 부지 근처에 있는 광장에서 라파엘은 먼저 뮌제를 보았다.

윌리엄을 향해 달려가는 뮌제였다.

검은색 일색의 차림인 복면인 열 명.

황제를 만나고 온 건지 화려한 성장을 한 뮌제가 뛰고, 뛰었다. 즉각 멈춘 라파엘은 말에서 내렸다.

윌리엄은 분수대 근처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겁에 질린 듯 덜덜 떠는 얼굴이 잠시 보였지만, 라파엘은 뮌제에게 더 집중했다. 어쩌면 윌리엄보다도 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창백한 얼굴. 핏발이 섰는지 멀리서도 보이는 붉은 눈.

라파엘은 걸음을 옮겼다.

점점 빨라지는 걸음이 마침내 뜀박질이 되어, 대공은 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