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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05)화 (105/120)

# 104화

씻은 뒤 태의에게 듣기로 라파엘이 앓은 건 독 때문이었고, 누워 있던 시간은 이틀. 뮌제는 그 이틀 내내 라파엘의 옆에 앉아 있었다 한다.

대인 일정을 다 밀어 버리고 윌리엄이 부를 때에만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 끼니마저도 라파엘의 옆에서 챙겼다고 했다.

라파엘은 깊은 한숨을 흘렸다. 뮌제…….

곁에 있어 준 게 고맙고 사랑스럽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당연히 염려되었다. 자기 몸을 우선하면 좋겠는데.

하지만 혹시 뮌제가 아프다면 그 자신도 뮌제처럼 하였을 것을 알았다.

대공은 다 입은 셔츠 위에 입을 베스트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뮌제 다음으로 중요한 부분을 드디어 물었다.

“독은. 무슨 독인지 알아냈나.”

“그, 공작이……. 전하께서 깨어나시면 사과해야겠다고 탄식하셨습니다.”

베스트를 걸치고 단추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잘못 들었나.

멈칫한 라파엘은 태의를 보았다.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을 노린 독이라고?”

“송구합니다, 전하. 공작께서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던 고로 소신도 더는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도 섭독하였나?”

“저도 모르겠습니다. 로헤올의 주치의가 따로 있어서…….”

뮌제가 아티팩트를 써 가면서까지 에흐베에서 태의를 괜히 불러온 게 아니었다. 각 가문 가주의 건강에 대한 정보는 기밀이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라파엘은 바로 뮌제의 침실로 향했다. 이미 로헤올의 의사가 들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뮌제는 곧 잠들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너…….”

그녀에게 다가가자, 뮌제의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던 의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파엘은 의사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고 그 의자에 앉았다. 뮌제는 아까와 같이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해독은 잘 됐어. 긴장이 풀려서 그래.”

“긴장?”

“그럼 네가 아픈데 내가 제정신이겠어?”

그녀는 축축 늘어지는 무거운 손을 들어 허공에서 휘저었다. 툭 떨어지는 그 손을 라파엘은 허공에서 잡았다. 뜨거웠다. 그러고 보면 아까 그의 이마를 짚을 때도 유난히 뜨거웠었다. 평소였다면 놓치지 않았을 이변이었는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왜 이렇게 미련해. 날 걱정한다고 네 건강을 해치면 어떡해.”

“됐어……. 미안. 일어나면 제대로 사과할게. 나 때문에 군주가 암살당할 뻔해서 에흐베인들에게도 미안하네.”

[나는 이제 윌리엄을 두고 죽을 수가 없어. 감히 그럴 수가 없어.]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중독되었던 몸으로 이틀 밤을 새면서 그의 옆을 지켰다.

에흐베인들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굳이 지금 잊지 않고 해야 하나.

눈빛이 파도쳐 분노와 애틋함으로 파도의 포말을 만들었다. 고이고 고였다. 대공은 금방이라도 잠들 듯한 뮌제의 얼굴을 눈에 담다가 입을 열었다.

“똑같이 해독을 위한 약을 복용한 건가?”

로헤올의 의사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의사는 반사적으로 뮌제를 보았고, 느릿느릿 눈꺼풀을 깜박이던 뮌제는 늘어지는 말로 허락했다.

“아는 건 다 대답해도 돼……. 난 잔다.”

“잘 자.”

라파엘은 속삭였다. 뮌제는 설핏 미소를 보였다.

그녀는 예고했던 대로 금세 잠에 들었다.

색색거리는 작은 숨결이 들리기를 수 분. 대공은 고개를 들었다.

의사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내가 이렇게 앓았다. 이 사람도 못지않게 고통스러웠을 텐데 그걸 여태 버틴 건가.”

“루미나리에단에서 일하신 이래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버틸 만하다 하셨습니다.”

루미나리에단의 단장, 온느발레의 방패로 이름날수록 뮌제를 원수로 여기는 마법사는 늘어 간다.

“…….”

마법을 사용하여 습격하거나 미쳐서 육탄전만 벌이는 줄 알았더니, 독살까지 시도를 한다…….

라파엘은 이틀간 자신을 살피느라 거칠어진 흰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

“왕자와 윌리엄은.”

“아……. 도련님은…….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도련님께서도 섭독할 뻔하셔서 각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섭독할 뻔?”

“예. 전하께서 음독하신 것 같다는 말을 듣자마자 식재료와 음식들을 전부 살폈는데, 도련님의 방에 두었던 음식에서 독 반응이 있었습니다. 도련님께서 식사를 거르신 게 이번에는 천만다행이었지요.”

윌리엄은 종종 고집스럽게 식사를 거르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뮌제가 발을 동동거리며 걱정해야 했다. 윌리엄의 몸에 무리가 가면 어쩌냐 하며.

따라서 이번에 윌리엄이 식사를 거른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의사의 말대로 차라리 다행이었다. 윌리엄에게마저 무슨 일이 있었다면 뮌제는 더 무리했을 것이다. 윌리엄이 섭독할 뻔한 것만으로도 진노할 정도니까.

라파엘은 잡고 있던 뮌제의 뜨거운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녀가 편하도록 이불 위에 내린 손을 아주 잠깐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던 의사는 침을 한 번 삼켰다. 답변 올릴 게 아직 남아 있었다.

의사는 존귀한 두 분 사이에 흐르는 편안한 긴장에 자신이 다 설레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왕자께서도 섭독하셨습니다. 감기라고 알고 계실 겁니다.”

대공은 뮌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두 분에 비하면 왕자께선, 음, 건강한 것도 약한 것도 아니셔서……. 왕자께 알릴 일은 없겠지만 사실 돌아가실 뻔했습니다.”

“…….”

“사실 지금도 꽤 앓고 계시는 중입니다.”

눈이 살짝 커진 라파엘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도 앓고 있다고?

아니, 물론, 건강한 뮌제와 라파엘이 이런 상태이니 왕자가 아직 앓고 있는 게 당연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놀랐다. 뮌제가 마음 놓고 여기 누워서 자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이 그쪽은 돌아보지 않았나?”

“한 번 들르셨습니다. 그 외엔 내내 전하 곁을 지키셨고요.”

의사가 온화하게 빙긋 웃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타국의 왕자는 내버려 두고, 넉넉히 여유롭게 건강을 찾을 라파엘의 곁을 내내 지켰다.’

뮌제에게 라파엘은 그렇게 특별하다.

라파엘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뮌제가 일어날 때까지 조용히 그녀의 옆을 지켰다.

뮌제는 점심 즈음에 일어났다. 밤새 식은땀을 흘린 그녀의 이마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열을 잰 그의 손이 떠나가자 그녀는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나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밤을 새.”

“낫지도 않은 몸으로 내 옆에 있던 사람은 누군데.”

“……너 싫어.”

“그래.”

살짝 웃은 라파엘은 짓궂게 대답했다.

* * *

두 사람이 사이좋게 아팠던 탓에 라파엘이 귀국할 날이 이번에는 유독 빠르게 다가온 듯 느껴졌다.

라파엘의 옆을 지키느라 미룬 일정 때문에 뮌제가 몹시 바빠져서 더더욱 그랬다.

두 사람의 아쉬움과는 별개로 출발은 가차 없이 내일이다.

라파엘은 뮌제가 집무를 보는 책상 뒤편에 있는 창의 턱에 걸터앉았다. 집무 중인 뮌제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서류를 읽고 있었다.

그가 훔쳐 읽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걱정은 하지도 않는 것처럼.

오히려 뮌제의 곁에 시립해 있는 그녀의 보좌가 더 라파엘을 신경 쓰는 눈치였다.

몸을 조금 비튼 대공은 벽 모서리에 등을 기대었다.

말없이 창문 바깥을 내려다보기 시작한 그의 귀에 곧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뮌제의 잠긴 목소리도 이어졌다.

“이 두 개는 경이 직접 전달하게.”

“예. 이번에도 꽃다발을 준비해야겠습니까?”

“그래. 적당히. 후작가에 가는 꽃다발에 조금 더 값나가는 보석을 넣고.”

“후작가라 하시면……, 도련님 쪽이신데…….”

남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라파엘이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준 직후 뮌제는 대답했다.

“실수한 거 아닐세. 후작가에 더 좋은 꽃다발을 보내.”

“그리하겠습니다.”

“일단은 다 끝났지? 자작이 오기까지…….”

“삼십 분 정도 남았습니다.”

“그래. 잠시 쉬겠네.”

“예. 각하.”

옅게 웃은 남작은 봉투 두 개를 받아든 뒤 정중하게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뮌제는 앉은 그 자리에서 두 팔을 위로 뻗었다. 라파엘은 크게 기지개를 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낮게 웃었다. 뮌제는 팔을 내리며 의자를 빙글 뒤로 돌렸다.

그렇게 마침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라파엘은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서신이길래 꽃다발을 보내?”

“아…….”

뮌제가 눈을 굴렸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표정을 구겼다.

“비밀이다. 조용히 마무리해야 하니까.”

“응.”

“혼담.”

대답을 들은 라파엘은 빙긋 웃었다.

“승낙하려고?”

“아니. 윌리엄이 싫다고 했어.”

“너는?”

“나야 뭐……. 윌리엄이 건강해질 때까지는 딱히.”

뮌제는 그렇게 말하면서, 집무를 위해 묶었던 머리칼에서 리본을 풀었다. 머리채가 완전히 흘러내리지도 않았는데 그대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은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쥐고 있는 붉은색 리본이 그녀의 손과 허벅지, 의자 팔걸이에 길게 걸쳤다.

살짝 내리뜬 뮌제의 눈 아래가 약간 거뭇했다.

갸름하게 깎인 뺨과 턱, 한결 날카로워진 눈매. 긴 손가락. 젖살도 이제는 전부 빠져서 피차 어린 티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둘 다 그런 나이였다. 다 자란 후의 혼인을 위해 미리 약혼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혼담이 성사될 시 일 년 내에 혼인하게 될 약혼을 생각할 나이.

물끄러미 뮌제의 얼굴을 눈에 담던 라파엘은 손을 뻗었다.

붉은 리본의 끝을 잡고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을 리본이 휘감았다.

뮌제가 눈을 살짝 치뜨고 그를 보았다. 아직 리본 반대편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였다. 라파엘은 말했다.

“사랑해.”

그 다정한 고백에 뮌제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나른해진 음성으로 그녀는 대꾸했다.

“네에. 감사합니다.”

“아니야. 그거 말고. 뮈즈.”

감으려는 듯 내려가던 그녀의 눈꺼풀이 올라왔다.

라파엘은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며 다시 말했다.

“사랑해.”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던 뮌제는 그의 말뜻을 깨달았는지 숨을 훅 들이켰다. 응, 뮈즈. 연정을 말하는 거야.

라파엘은 잠이 깬 것처럼 또렷해진 뮌제의 연회색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이 서렸다. 평온은 사라졌다. 숨이 떨렸다. 심장이 명치로 내려가 요동쳤다. 잠깐의 침묵 후 라파엘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눌러 가며 그녀에게 고백했다.

“널 사랑하고 있어.”

“착각이야.”

그 잠깐의 침묵이 뮌제에게는 결론을 내릴 긴 여유시간이었다.

뮌제는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차갑게 잘랐다.

“착각이야, 라파엘.”

“그런 게 아니야.”

“라파엘.”

뮌제가 그의 이름을 부른 일 중 이 부름만큼 무겁고 냉정한 부름이 없었다.

그녀의 미소는 사라졌다. 따스하게 긴장되어 있던 분위기가 완전히 싸늘하게 식었다.

눈을 내린 뮌제는 자기 손가락 사이에 구부러져 있는 리본을 엄지로 한 번 쓰다듬고는,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널 살린 일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그 마음을 이성적 사랑으로 착각한 것일 테지.”

뮌제는 리본에서 손을 뺐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의 손등을 가만히 두드렸다. 그녀는 라파엘의 눈을 피하지 않고, 차분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나중에, 진심으로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거야.”

라파엘은 그녀의 턱이 순간 떨리는 걸 보았다. 뮌제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가 착각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라파엘이 이 순간 진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뮌제는 거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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