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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04)화 (104/120)

# 103화

그녀를 선망하는 무인들이 세계적으로 많다는 점. 그 명성과 미담이 그만큼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다는 점. 평민들에게 사랑받는 모범적인 귀족이라는 점. 심지어 왕국인들마저도 뮌제 로헤올을 그럭저럭 좋아한다는 점.

뮌제 로헤올의 그런 사실들이 황제의 철권 정치로부터 왕국들의 반발을 막아 내는 역할을 했다.

뮌제 로헤올을 향한 좋은 평가는, 그런 뮌제 로헤올을 가진 온느발레의 외교적 무기가 된 것이다.

그렇게 로헤올은 온느발레 외교의 최고 최후의 방패가 되었다.

아리오의 왕자를 뮌제가 맡게 된 건 그즈음이었다.

먼저 온느발레에 심어 둔 그의 사람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그 이후 며칠이 지나 뮌제에게서 서신이 도착했다.

뮌제가 에흐베의 정보가 담긴 서류를 모두 불태운 이후 만날 때마다 함께 만든 암호 체계 중 하나로 적힌 편지였다.

엉망이었다.

한 번도 제대로 연습해 보지 않은 체계였고, 반 장난으로 만들어서 귀여운 그림이 몇 개 들어간 암호이기도 했다.

작은 그림이 알파벳을 대신한 문장을 읽다가 라파엘은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미치겠다. 못 살아.

내용은 물론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낑낑거리면서 이 그림들을 하나하나 그렸을 뮌제를 생각하니 웃음이 앞섰다. 어린아이가 적은 것처럼 줄이 삐뚤빼뚤해서 더 웃겼다.

서명까지도 암호로 하고, 그 아래로 적은 추신은 에흐베어였다.

이건 미쳤어. 때려치우자.

대공은 웃다가 사레들렸다.

그리고 라파엘은 때려치우자는 추신은 무시하고 같은 암호로 답신을 작성했다. 그가 보기에도 뮌제의 것보다는 나은 글씨였다. 아마 뮌제는 이 서신을 받고 상당히 열 받아 할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이 되기 전에 뮌제로부터 답장이 왔다.

“…….”

세상에 로헤올 공작에게서 이런 편지를 받아 본 사람은 그 말고 다시 없을 것이다.

이것뿐이야?

온느발레 수도에서 에흐베 본령까지 먼 길을 오는 편지에 쓸 말이 이것뿐이었어?

황당해하며 라파엘은 헛웃음을 흘렸다.

뮌제에게 의미가 있는 타국인은 자신만으로도 충분한데, 또 누굴 곁에 두려는 거냐며 장난스럽게 부린 투정은 묻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가 약 올렸다고는 하나 이렇게 아예 묵살할 정도로 화가 났을 리는 없다.

일부러 무시했을 터.

이럴 땐 가끔 심장이 내려앉는다.

라파엘은 쓰는 데 일 초도 걸리지 않았을 글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다시 피식피식 웃었다.

그의 옆에 있어 주었듯이 아리오의 왕자의 옆에 있어 주겠다는 뜻일까.

그녀에게 그가 특별해졌듯이 왕자도 특별해지리라는 뜻일까.

청년의 것이 된 긴 손가락이 툭 글자를 건드렸다.

이미 왕자는 온느발레에 도착해서 로헤올 저택에 있을 것이다.

이제 뮌제는 라파엘과 만났을 때처럼 어리지 않았다. 아리오의 왕자도 젊다. 같은 저택에 머물게 된 젊은 이성.

연애 감정…….

“…….”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라파엘의 눈이 살며시 커졌다.

순식간에 명치가 비었다.

얼떨떨한 긴장이 뒷목을 서늘하게 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건하게 내려앉지 못하고 추락해 힘겨울 정도로 뛰었다.

사랑을…… 하는데.

뮌제가 그를 사랑하고, 그가 뮌제를 오래도록 사랑해 왔는데.

그런데, 사랑.

“…….”

갑자기 그 단어가 생경한 느낌이 되어 그를 덮쳤다.

이거.

아니.

잠깐.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 * *

그는 깨달았다.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 왔던 감정을.

테라스에 아리오의 왕자와 뮌제가 함께 앉아 대화하고 있는 광경을 눈에 담는 지금, 부정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깨달았다.

라파엘은 싸늘하게 식은 두 손에서 장갑을 벗었다.

그를 발견한 뮌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왔어?”

“…….”

대답을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라파엘은 애써 미소하고 뮌제가 내민 손 위에 손을 올렸다.

뮌제는 그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잠, 깐만. 뮈즈, 잠깐만.”

끌려가던 라파엘은 더 참지 못하고 멈춰 섰다. 잡힌 손에서부터 온기가 박동하며 번져 나가는 느낌이 버거웠다. 심장도 지나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구석구석에 작은 심장이 생긴 것처럼 온몸에서 심장이 뛰었다.

이러다 터져서 죽을 것 같다.

모든 느낌이 버거웠다.

그는 장갑을 쥐고 있던 잡히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함께 멈춘 뮌제는 놀란 눈으로 그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

얼굴에서 손을 내린 라파엘은 힘겹게 숨 쉬며 뮌제와 눈을 마주쳤다. 입을 열었지만 금방 닫았다.

[사랑해.]

몇 번이고 그녀에게 속삭였던 그 말이 지금은 나오지 않았다.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라파엘. 야, 왜 그래. 어디 아파? 무슨 일 있어?”

“…….”

심각해진 뮌제를 내려다보던 라파엘은 천천히 그녀를 잡아당겼다. 문이 열려 있어 왕자가 두 사람을 보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왕자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뮌제를 품에 안은 그는 그대로 한동안 호흡했다.

더 묻지 않고 그를 마주 안은 뮌제가 사랑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떡해야 하지.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하지.

* * *

라파엘이 그 왕자를 처음 만났을 때 왕자는 서툴게 뮌제와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원수와도 같은 온느발레의 대귀족이니 뮌제를 마냥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왕자는 뮌제 앞에서 웃었다.

싱글거리는 웃음. 여유 있는 걸 넘어서서 능글거리는 태도.

그의 언행이 원래 그리했다는 건 보고로 들었지만, 그럼에도 라파엘은 왕자의 그런 언행 전부가 마뜩잖았다. 모국인 아리오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해 만들어진 방어기제와 가면이라는 걸 대략 짐작했기 때문이다.

광대를 보는 것 같다.

예전의 라파엘 그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역겹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왕자가 점점 뮌제를 특별하게 여기는 게 느껴지니 라파엘은 가끔 눈살을 찡그려야 했다.

그와 많이 비슷해서.

모든 게 같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어서.

뮌제도 어릴 적 라파엘을 돌아보았던 것처럼 이 왕자를 돌아보고 있었다.

윌리엄이 거절하여 왕자와 뮌제, 라파엘만 함께한 이 티타임이 라파엘에게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대공은 뮌제와 제이 왕자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어느 순간 눈을 감았다. 삼킨 한숨이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조금만 이대로 쉬고자 하였다. 뮌제가 있는 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지는 않으므로.

“잘 보았습니다. 그 두 분 사이에 어떤 긴장이 있는 게 맞습니다.”

“역시 그렇지요? 묘하게 한두 단어씩 쏘아붙이는 느낌이었다니까.”

“하지만 더 파고들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뮌제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미지근한 손이 그의 이마를 짚었다.

라파엘은 눈을 떴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아리오의 왕자에 불과한 분이 섣불리 건드려도 될 문제가 아니니까요.”

뮌제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느린 발음으로 제이와 대화하면서 제이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아니니까요.’ 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라파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뮌제의 눈가가 살짝 구겨지자 반대로 라파엘은 옅게 웃었다. 뮌제는 그의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의 손등을 라파엘의 뺨에 대면서 엄하게 말했다.

“웃지 마. 피곤하면 피곤하다고 말을 했어야지.”

“괜찮아.”

“괜찮긴 무슨. 일어나. 올라가자.”

왕자에게 온느발레 사교계에 관해 차분하게 가르쳐 주고 있던 사람 같지 않았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라파엘에게 집중했다.

아, 널 어떻게 해야 하지.

라파엘이 버거운 마음을 억누르는 사이, 뮌제는 먼저 일어난 뒤에 그제야 왕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오늘은 그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아, 음. 예.”

제이 왕자는 웃는 얼굴로 어색하게 대답했다.

뮌제는 라파엘을 손님방 침대에 눕히면서도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쩌지. 에흐베에서 네 태의를 데려와야 하나.”

“아픈 거 알았네. 눈치 못 챈 줄 알았더니.”

‘피곤하면 피곤하다고 말을 했어야지.’라고 말해서.

짓궂게 말하자 뮌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왕자 앞에서 네 건강에 대해 다 말할 수는 없잖아.”

“…….”

“하여간, 이왕 아티팩트를 써야 한다면, 주치의를 데려오기보다는 네가 가는 게 낫겠다. 라파엘.”

“아니야. 괜찮으니까 네 주치의에게 진찰하게 해.”

“한 나라의 군주께서 무슨 헛소리세요.”

“…….”

라파엘은 떨떠름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한 나라의 군주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괜찮고?

라파엘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올려 준 뮌제는 몸을 세웠다. 그에게서 벗긴 겉옷과 베스트를 자기 팔에 건 그녀가 한숨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았어. 일단 쉬고 있어.”

“조금만 쉬면 나을 거야. 피곤해서 이러는 거니까.”

“베. 베.”

뮌제는 알겠다고 건성으로 에흐베어로 대답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라파엘은 잠긴 목소리로 나직하게 웃었다.

뮌제까지 나간 침실에 홀로 누워 있자니, 신기하게도 열이 확 온몸을 덮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할 만한 미열이었는데 슬슬 크게 어지러웠다. 대공은 천장을 보고 있던 눈을 감았다.

해가 떠 있는 오후에 잠든 그는 새벽이 되기까지 몇 번 눈을 떴다.

열에 앓은 탓이었다. 해서 눈뜰 때마다 괴로웠다.

그러나 그때마다 뮌제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손을 잡아 주고, 그를 안고 토닥여 주고, 그의 이마를 쓸어 주고, 물수건을 갈아 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눈뜰 때마다 라파엘의 옆에는 뮌제가 있었다.

새벽에 눈뜬 그의 옆에도 그녀는 있었다.

촛불 하나에 의지해 어떤 종이를 읽고 있던 뮌제가 마침 몸을 기울였다.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그 손끝에 얼굴을 기댄 그녀가 눈을 감았다. 몹시 피곤해 보이는 흰 얼굴에 촛불 그림자가 일렁였다.

로헤올 공작은 하루 종일 저택 안에 붙박여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일어날 때마다 뮌제가 옆에 있던 건 우연은 아닐 텐데.

이 하루를 위해 뮌제가 얼마나 무리했을지 모르겠다.

라파엘은 고르게 쉬고 있던 호흡을 일부러 흐트러트렸다. 뮌제는 곧바로 눈을 떴다.

눈이 마주쳤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뮌제는 종이를 내려놓은 손을 뻗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라파엘의 이마를 짚고 열을 재는 것이었다. 뜨거운 손으로 한참 그러고 있던 뮌제는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다가 푸스스 웃었다.

“좀 괜찮아?”

그녀의 음성은 잠기다 못해 갈라졌다.

라파엘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뮌제는 그 움직임을 돕지 않고, 대신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자리끼를 그에게 건넸다.

뮌제는 조용히 물을 마시는 그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한번 앓으면 이렇게 크게 앓는 녀석이 매번 무슨 배짱으로 에흐베에서 여기까지 돌아다녀.”

잔을 내린 라파엘은 머쓱하게 웃었다.

“미안. 피로가 쌓였었나 봐.”

“글쎄…….”

“…….”

“씻을 수 있게 준비시킬게. 자세한 건 에흐베 태의에게서 듣고.”

뮌제는 그에게서 잔을 가져가며 툭 말했다.

라파엘은 그녀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서류를 챙기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가만히 물었다.

“태의를 불러왔어?”

“응. 이제 나도 가서 쉬어야겠다. 너도 나도 제정신 차린 다음에 이야기하자.”

지친 얼굴을 한 뮌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떠났다. 급히 떠나는 기색이었다.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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