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그의 동생이 최근에야 죽은 것은, 사실은 그가 뮌제를 생각하며 망설였기 때문이었다.
과연 뮌제는 동생을 죽인 라파엘을 어찌 생각할 것인가.
그 두려움이 있었다.
선대 대공 부부의 죽음은 그렇다 쳐도, 동생의 죽음만큼은 라파엘과 관계있을 것을 짐작할 텐데.
하지만 어릴 적 그토록 자주 울던, 마음 여린 그가 동생을 죽였을 리 없다고 생각해 줄 가능성도 있었다.
어떻게든 그렇게 유도해 보리라고 마음 단단히 각오했다.
이미 라파엘에게 분노와 두려움을 품은 동생을 처리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강행했다.
동생의 장례식에서도 뮌제만을 생각하며 입술 깨물었던 그였다.
그런데. 알고 있었다고.
마치 에흐베가 라파엘을 죽이려 하는 걸 알고 있었다 하던 그때처럼. 이번에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저한테 계속 확인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하.”
“…….”
“서로에게 말하지 말아야 할 게 있고, 모르는 척해야 할 게 있고, 선을 그어야 할 게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이건 모르는 척해야 할 일이고요.”
이번에도 그때처럼 넌 조용히 날 지켜 주고 있었다고…….
라파엘이 표정을 어찌하지 못했다.
웃으려다, 울상이 되려다, 떨려다, 계속해서 얼굴을 타고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뮌제는 아직 잡고 있는 라파엘의 손을 조금 더 꼭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녀는 조금도 변한 게 없다는 것처럼 평소처럼 다정하게 물었다.
“처리를 해야 했지요?”
“……예.”
“공적인 이유로든 사적인 이유로든요.”
“예…….”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그 어린 공자님이 저한테 살려 달라고 했을 때 제가 뭐라 했냐면요.”
라파엘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가 허리를 살짝 굽히자 뮌제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공자님이 여기서 행복하게 살 때 대공 전하는 자기 고향도 아닌 곳에서 혼자 살아남으셔야 했다고 했어.”
라파엘의 호흡이 순간 멈추었다.
뮌제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으로 냉혹한 말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기 위해 허리를 세우려는데, 뮌제는 그의 손을 다시 한번 잡아당겼다. 그가 멈추자 뮌제는 소리 죽여 가만히 말했다.
“라파엘. 내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면, 네가 그 공자를 죽일 게 뻔히 보이는데도 그 공자를 놓고 가지는 않았을 거야.”
“…….”
“내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면, 네가 살인을 하게 두지는 않았을 거야.”
“…….”
“나는 이리 악한 사람이야.”
뮌제는 그 말을 끝으로 라파엘의 손을 놓았다.
실내의 서늘한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 위로 칼 같은 각을 재며 떨어졌다.
로헤올 공작은 라파엘을 지나쳐 홀로 걸음을 옮겼다.
아주 잠깐 그대로 멈춰 있던 라파엘은 뮌제를 따라가려 하는 수행원들을 손짓으로 멈춰 세웠다.
그리고 그는 혼자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녀를 멈춰 세운 라파엘은 먼저 그녀에게서 담요를 벗겼다. 뮌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박거리면서도 그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는 제 겉옷을 벗어 뮌제에게 입혔다. 본디 입고 있던 자기 겉옷에, 라파엘의 온기로 따뜻하게 데워진 그의 겉옷까지 입은 뮌제는 가볍게 재채기를 했다.
앞섶의 단추를 채워 주던 라파엘은 눈을 약간 찡그렸다.
“너 온다고 해서 성을 따뜻하게 한다고 했는데 부족하네.”
“아니, 제가 체력이 떨어져서 그래요. 전하는 안 추우세요?”
“예. 저는 괜찮습니다.”
그는 대답하며 오른손의 손가락 등을 뮌제의 뺨에 살짝 대 보았다.
차갑다.
들고 있던 담요까지 마저 뮌제의 어깨에 걸쳐 준 뒤, 양 끝자락을 잡아 뮌제의 목 앞까지 끌어왔다. 단단히 매듭짓는 동안 뮌제는 얌전히 기다렸다.
매듭에 집중하다가 문득 그 멀뚱한 얼굴에 시선을 준 라파엘은 작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입 맞추었다. 멀리서 보는 눈이 많은 걸 앎에도.
라파엘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나직하게 물었다.
“내가 살인자여도 괜찮아?”
“응. 괜찮아. 네가 아는 것보다 나는 더 많이 나쁜 사람인데 괜찮아?”
“응. 괜찮아.”
너는 항상 괜찮아.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너는 내게 항상 괜찮아. 내 친구. 내 햇살.
내 구원자.
* * *
새 황제가 등극했다.
아직 청소년의 나이였으니, 젊다 못해 어린 황제였다.
그러나 워낙 어릴 적부터 특출났던 후계자였던지라 새 황제의 능력 자체를 의심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다만 그 메마른 성정을 많은 이가 염려했다.
능력은 뛰어나나 인간을 향한 공감력 따위가 부족하여 폭군이 될 가능성이 있는 황제.
황제가 되기 몇 달 전부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그나마 조금씩 미소를 짓기 시작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많은 이가 염려했다.
정말 많은 이가.
그러나 걱정과는 다르게 황제는 나라를 잘 이끌어 갔다.
확실히, 때때로 섬뜩한 언행을 하곤 하였지만, 그것도 점차 나아졌다. 미소하는 횟수도 늘어 갔다. 그저 보이기 위한 미소라 하더라도 괜찮다. 아예 내면 외면 모두 잔혹한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리고 황제는 즉위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았던 어느 날, 뮌제에게 루미나리에단을 맡기겠다고 선언했다.
로헤올의 가주나 되는 인물이 황제에게 확실하게 무릎 꿇게 된 것이다.
다른 가문도 아니고 로헤올이다. 로헤올의 가주가 황제에게 부복하는 공직자가 되다니 미쳤나!
대귀족 가문의 가주들은 로헤올을 방문하여 뮌제에게 항의하였다.
로헤올 공작이 공직자가 된다는 건 상징성이 있었다.
본령을 황실에 바친 뒤 서서히 권력을 잃어 가고는 있다지만, 로헤올은 여전히 대귀족 가문 중에서도 특별한 가문임에 틀림이 없었다. 적어도 이번 대 공작까지는 현재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 텐데 그런 가문의 주인이 황제의 수족이 되는 건 말이 안 된다. 다른 대귀족 가문까지도 한데 묶여 묘한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부디 이러지 말라고 누군가는 정중하게 부탁하였으나, 뮌제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로헤올 공작은 루미나리에단의 단장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사실, 마법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로헤올 공작이 그 자리를 맡는 건 논리적으로 꽤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그 논리가 옳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로헤올 공작은 가차 없이 일했다.
그녀가 가진 마법사를 향한 혐오가 루미나리에단을 통해 완전히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로헤올 공작은 가주들의 반발이 결국 사그라질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뮌제 로헤올이라 하면 마법사의 원수, 마법사의 원수라 하면 뮌제 로헤올이라 할 정도로 혁혁한 공을.
그런데 또,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마법사들과 마법 아티팩트를 막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뮌제는 직접 출장을 가는 곳마다 미담 하나씩은 남기고 왔다. 딱히 의도한 게 아니었음에도 그녀는 누군가를 구하고, 누군가를 살리고, 누군가를 위로했다.
그에 따라 뮌제는 자연스럽게 온느발레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귀족이 되었다.
그러나 그 말은 곧 뮌제가 그만큼 일한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피곤해…….”
늦은 시각에 퇴근한 뮌제가 꿍얼거리며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라파엘은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실핏줄이 터진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라파엘은 흐리게 미소지었다. 그 쓴웃음을 본 뮌제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편안한 얼굴로 눈 감고 있던 그녀에게서 이내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공은 잠든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는 그녀가 루미나리에단을 맡는 걸 반대했었지만, 그 이상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에흐베의 군주일 뿐이었고, 뮌제는 온느발레의 귀족이었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데 무작정 그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뮌제가 가지고 있던 마법을 향한 혐오감을 알고 있었지 않은가.
“…….”
그러나 이런 지친 뮌제를 볼 때면 그날 조금 더 반대를 해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마법사를 그렇게 끌어내리면 네가 뭐가 돼.
마법사이면서도 마법사를 혐오하는 그게 싫었다.
라파엘은 뮌제의 이마에 내려온 잔머리를 손끝으로 치워 주며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
마법사를 그렇게 끌어내리면 네가 뭐가 돼.
마법사이면서도 마법사를 혐오하는 그게 좋았다…….
뮌제가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 자기혐오가 싫었다.
그러나 자신을 혐오하며 마법사라는 진창에 스스로 내려오는 그게 좋았다.
같은 곳에 있어 좋았고, 같은 곳에 있어 싫었다.
그녀가 빛나길 바랐지만, 또 한편으론 빛나지 않고 그와 함께 있기를 바랐다.
뮌제를 내려다보는 라파엘의 얼굴에 어두운 실내 그림자가 떨어졌다. 눈길로 조용히 뮌제의 얼굴을 따라 그려 가던 그는 소리 없이 물었다.
뮈즈.
내가 마법사라는 걸 고백하면, 넌 그래도 계속 마법사의 원수로 남아 있을까.
* * *
온느발레의 루미나리에단은 여타 왕국들이 가진 특수 집단과 다르게 문인이 무인 행세를 하는 집단이 아니었다. 무인이 문인 행세를 하는 집단이었다.
루미나리에단은 사실상 가장 특출난 무인들이 모인 집단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인식은 뮌제가 루미나리에단을 맡은 이후 정착된 것이었다.
뮌제는 루미나리에단을 맡자마자 단원들을 물갈이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 봐서 들어온 공무원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그러나 이번 단장은 지금까지 있던 단장과 다르게 귀족들조차도 쉬이 대서지 못하는 귀족들의 정점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엘리트라 하여도 일개 공무원에 불과한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책상물림은 필요 없다. 세상의 모든 마법사를 잡아 족칠 각오를 한 이들이 필요하다.’
잡아 족치다.
그 적나라한 표현을 그 로헤올 공작이 정말 입에 담았다.
세상을 잘 아는 자들. 그러면서 아예 멍청하지는 않은 자들. 그러면서도 무술에 능한 자들.
문무에 능통한 사람들이 새로 들어왔다.
기존의 단원 중에서도 루미나리에단에 남을 수 있던 자들이 꽤 많았다.
또한, 새 선발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소수의 기존 단원들이라 하더라도 루미나리에단에서 완전히 쫓겨난 것도 아니었다. 현장에 나가지 못하고 서류 업무에 집중하게 된 것만 달라졌다.
로헤올 공작이 이끄는 새 루미나리에단은 정말 거칠게 밀고 나갔다.
지금까지 루미나리에단이 얼마나 온건했는지 마법사들이 깨달을 정도로 거칠었다.
마법사들을 위협하는 로헤올 공작을 죽이기 위해 재야의 마법사들이 몇 나섰지만 오히려 로헤올 공작에 의해 죽었다.
황제가 사용을 허락한 아티팩트 두어 개를 사용해 가며 검 하나로 재야의 마법사 한 명을 끝장내는 모습을 본 제국인들이 많았다. 온느발레의 수도인 르와셔에서 있었던 그 전투는 박진감이 넘쳤고 아슬아슬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공작이 승리했다.
그러나 라파엘은 뮌제가 마법사이기에 그게 가능했다는 걸 알았다. 또한 르와셔에서 있었던 그 전투는 뮌제가 보여주기식으로 일부러 보인 전투라는 것도 짐작했다.
그때쯤, 뮌제가 지나치게 강하고 마법적인 지식에 능통하니 그녀를 마법사로 의심하는 시선이 슬슬 생겼었기 때문이다.
뮌제는 아티팩트 몇 개와 검만으로 전투했고, 그것만으로 승리했다.
이후 그 의혹을 제대로 입 밖에 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법사가 마법사를 핍박한다는 건 비마법사들의 상식에 맞지 않았을뿐더러, 뮌제가 재야의 강한 마법사를 상대하며 마법을 쓴 적이 분명 없었기 때문이다.
뮌제는 그저 아티팩트를 적재적소에 쓸 수 있는 비마법사, 강한 무인이다.
그녀를 선망하는 무인들이 생겼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 자체가 뮌제를 다른 의미로 온느발레의 방패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