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02)화 (102/120)

# 101화

두 사람은 정말 친했고, 친밀한 접촉도 자주 해왔지만, 그러한 ‘친밀한’ 접촉은 전부 라파엘만이 해 왔다. 뮌제는 라파엘에게 항상 담백하고 간소하게만 닿아 왔었다.

라파엘의 손등에서 살짝 입술을 뗀 뮌제가 말을 이었다.

“나는 이제 윌리엄을 두고 죽을 수가 없어. 감히 그럴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술이 손등에 스쳤다. 말을 마친 뮌제는 다시 한번 그의 손등에 입 맞추고 허리를 폈다.

다시는 너를 위해 목숨을 걸 수는 없다는 고백을 이리도 정중하고도 착하게 한다.

그녀는 라파엘과 눈을 마주했다.

“라파엘. 내가 이러는…….”

“라피.”

라파엘이 뜬금없이 한 말에 뮌제가 멈추었다. 눈을 깜박이는 그녀에게 라파엘은 다시 말했다.

“라피라고 불러 줘.”

“…….”

“제발, 그렇게 불러 봐, 뮌제.”

“라파엘.”

공작이 된 뮌제는 더는 그를 전처럼 부르지 않았다.

심지가 단단히 세워진 음성으로 뮌제는 그에게 말했다.

“내가 이러는 건, 너도 똑같이 로헤올에 대한 것을 없애 달라는 게 아니야. 난 그냥, 네게 보여주고 싶었어. 내가 네게 가진 애정을.”

“…….”

“난 너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해. 앞으로 우리의 연이 끊겨도 나는 너를 생각하면서 힘을…….”

“끊길 일 없어.”

또다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너무도 간절했다. 너무도 화가 났다. 라파엘의 눈에 사납게 날이 섰다.

웃지 않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뮌제가 살며시 웃었다.

“응. 그런데 얼굴 볼 일은 없겠지. 난 에흐베에 가지 않을 거고, 너는 여기에 오지 않을 거니까.”

“올 거야.”

“그러지 마, 라파엘. 아티팩트를 써서 좋을 게 없어.”

“싫어. 매일 올 거야.”

마냥 어린아이처럼 고집스러운 대답에 뮌제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부지깽이를 내려놓은 그녀는 계속 킥킥 웃으면서 그 손을 움직였다. 잡혀 있는 손을 대신하여 서류철을 꺼내어 불 속에 던지는 손길은 깔끔했다.

다시 부지깽이를 든 뮌제는 불을 보며 말했다.

“마법은 더러운 거야.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어.”

라파엘은 숨을 멈추었다.

그를 모르는 뮌제는 말을 이었다.

“죽어 마땅한 자가 있다면 마법 같은 것을 쓰는 존재야.”

“…….”

“그로부터 비롯된 모든 게 싫다. 마법도, 마법사도.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더러운 것들이야.”

불그림자가 비친 눈이 비웃음을 담고 가늘어졌다. 올라간 입꼬리도 그저 조소만을 그렸다.

공작 부부의 사망은 마법에 의한 사고사로 알려졌다.

마법을 증오할 만도 했다.

그러나 라파엘이 아는 뮌제라면, 그녀가 라파엘이 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의 앞에서는 이리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파엘은 그가 마법사임을 뮌제가 모른다는 사실을 그 순간 깨달았다.

“마법을 가까이하지 마.”

* * *

[마법도, 마법사도.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더러운 것들이야.]

하지만 뮌제. 너도 마법사잖아.

* * *

라파엘은 그날 헤어지기 전에 교류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못 박았다.

‘너는 에흐베에, 나는 온느발레에,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방문할 것이다’라며.

일국의 군주가, 아티팩트를 쓰지 않고 며칠이나 걸려 가며, 타국에 수시로 방문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뮌제가 눈을 찡그렸다.

그러나 라파엘은 그렇게 했다.

뮌제가 가까이하지 말라 하는 마법으로 직접 텔레포트를 해 가면서, 그러나 뮌제에게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긴 여행 끝에 도착한 것처럼 속였다.

그러고도 온느발레에서 하루만 머물고 떠날 때도 있었다.

하루도 머물지 못하고 떠날 때도 있었다.

왕이 자리를 비운다는 건 그리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그는 그렇게 했다.

일 년간 라파엘은 온느발레에 다섯 번이나 다녀갔다.

뮌제는 패배를 선언했다.

일주일의 시간을 만든 로헤올 공작은 마차가 아닌 말을 직접 타고 달려 출국해, 에흐베 본령으로 왔다. 녹초가 되어 꼬박 하루를 내리 자고 나서야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춥다고 온몸에 담요를 덮고 어기적어기적 복도를 걷는 모습을 본 모든 이가 당혹을 금치 못했다.

절대 로헤올 공작이 보일 만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던 에흐베 대공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군주의 선명한 활기를 본 보좌와 시종장, 여러 시종과 시녀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막상 뮌제는 몸을 더 움츠리며 꿍얼꿍얼 말했다.

“웃지 마세요……. 으, 피곤해.”

“움직이기 싫으면 업히겠습니까?”

“미치, 됐습니다.”

뮌제의 에흐베어 발음은 굉장히 좋다. 그래서 그녀가 말하다 만 그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주변의 모든 사람이 눈치챘다.

왕에게 미쳤느냐고 묻고 싶었던 거다.

그 무례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도 라파엘은 그저 웃기만 했다.

하기야, 따지고 보면, 업히겠느냐고 권유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다. ‘감히 누가 일국의 군주의 등에 업힌단 말인가’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금 더 일차적인 문제가 있었다.

대공은 선대 대공비가 죽은 이후부터 그 ‘순순한 태도’나 ‘예의 바른 미소’는 즉시 내던졌다. 성인이 되지 않은 나이임에도 거침없이 사람들을 상대했다. 그저 쌀쌀맞고 차갑다는 정도를 넘어서서, 어딘가 상대를 섬뜩하게 만드는 싸늘함이 있었다.

온느발레로 떠나기 전에는 많이 움츠러들어 있었던 아이가 에흐베로 귀환할 때는 그런 성격으로 성장하여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렇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온느발레에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유배된 천덕꾸러기로만 대우받으며 성장했다면 이렇게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는 성장하기가 힘들었을 터.

대공의 보좌인 루시안은 그 ‘환경’이 되어 준 이의 뒷모습을 새삼스럽게 관찰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곳에 오고 나서야 드디어 웃고 있는 대공 또한.

그러나 이런 놀랍도록 화목한 분위기도 금세 깨졌다. 뮌제가 던진 질문 때문이었다.

“전하. 그런데 그 어린 공자님은 어디 계십니까?”

대공과 공작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라파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쭉 걸어가는 뮌제를 잠시 응시하다가 살며시 웃었다.

“죽었습니다.”

뮌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를 고쳐 들었다. 그녀의 뒤통수만이 보이지만 라파엘은 그 반응이 뮌제가 이 소식을 처음 듣는다는 뜻임을 알았다.

에흐베에 사람을 붙이지 않았구나.

대공은 쓴웃음을 숨겼다.

그는 천천히 로헤올의 사람을 포섭하는 중인데, 뮌제는 그냥 아예 에흐베에서 손을 뗐다.

그게 그녀가 표하는 우정이고 애정이라면, 그가 하는 일 역시 그가 표하는 감정이다. 더러워서 뮌제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뮌제는 묵묵히 걸어가다가 직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어조로 대꾸했다.

“조의를 표합니다.”

“그게 끝입니까? 절 위로해 주지는 않고?”

멈춰 서서 그를 마주 보지도 않고, 앞서 걸어가면서 툭 던지는 조의가 끝?

장난스럽게 묻자 뮌제는 말없이 담요로 감싼 몸을 움츠렸다. 다른 말은 끝까지 없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따라가다가, 라파엘은 입을 열었다.

“사고로 죽었습니다.”

“…….”

뱀과도 같고, 실크와도 같고, 벽난로의 불 온기와도 같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어느 자작가의 방계 출신인 젊은 시종 한 사람이 침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이 자리, 그 일에 대해 자세한 사항까지는 모르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아예 짐작하지조차 못한 사람은 없었다.

‘어린 공자는 대공께 살해당했을 것이다.’ 하는 짐작은 아주 무섭지만 아주 간단한 것이므로.

뮌제는 드디어 멈추었다.

그녀가 멈추자 라파엘도 멈추었고, 두 사람을 따르던 모두가 멈추었다.

대공을 돌아보는 로헤올 공작의 앳된 얼굴엔 미묘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로헤올이 에흐베의 내정에 간섭할 일 없습니다. 저로서는 조의를 표하는 것이 최선이군요.”

“음……. 친구 동생의 죽음인데?”

“전하께서 위로가 필요하시다면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한 뮌제는 못 말리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미묘한 웃음기가 어린 얼굴을 지어 보였다.

“필요하신 것 같았다면 제가 이미 진심으로 위로해 드렸겠지만요.”

그러자 이번에는 라파엘의 표정이 묘해졌다.

“위로가 필요 없는 것 같습니까?”

“…….”

“왜?”

“…….”

“뮈즈.”

라파엘에게 처음으로 불린 애칭에 뮌제는 멈칫했다. 아니, 실은, 뮌제가 살면서 처음으로 불린 애칭이기도 했다. 그녀는 여태 누군가에게 애칭으로 불린 적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살짝 열렸던 입은 곧바로 닫혔다.

뮌제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는 말도, 위로가 필요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한 까닭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말도, 아무것도 입에 담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던 대공은 무언가를 짐작했다.

그는 처연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제가 우는 걸 기억한다면서.”

“…….”

“그래서 부모님을 살해했을 것 같지는 않다면서.”

“…….”

“그런데 동생은 제가 죽인 것 같습니까?”

그 적나라한 질문에 수행원 전부가 흠칫 놀랐다.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뮌제는 한숨을 쉬고는 그에게 손짓했다. 다가오라는 손짓이었다.

대공에게 하기에는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누가 놀라기도 전에 라파엘이 먼저 뮌제에게 다가갔다. 뮌제는 라파엘의 한 손을 꼭 잡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까까지 가던 길을 다시 느릿느릿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떨떨해하느라 라파엘이 조금 뒤로 빠지자 뮌제는 그를 잡아당기기까지 했다. 그가 옆에 서서 걷기 시작하자, 뮌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뒤를 따르는 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리 죽인 음성이 복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 전하께서 우시는 걸 자주 봤다고 했지, 전하께서 부모님을 살해했을 것 같지 않다고 답변드린 적은 없습니다.”

“……어?”

“전하께서 어릴 적에 누구 때문에 자주 우셨는데요.”

라파엘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한 손으로 힘들게 담요를 잡고 있는 뮌제는 한 번 코를 훌쩍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선대 대공 부부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아직 제 선친이 로헤올 공작이셨을 때고, 그때는 아직 로헤올이 에흐베를 살피던 때이기도 해요.”

“……어? 아니.”

“…….”

“아니. 잠깐. 잠깐만.”

멍하게 중얼거리던 라파엘이 어느 순간 우뚝 멈추었다.

“어……?”

넋 잃은 소리를 흘리는 그를 따라 멈춰 선 뮌제가 그를 보았다. 그녀는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다시 한번 코를 훌쩍거린 뒤 말했다.

“저번에 전하가 보고 계시는 동안 태웠던 서류 중에 선대 대공비의 상태에 대한 보고도 있었어요.”

“…….”

“사실 선대 대공의 별세에 대해서는 저나 아버지나 별생각이 없었는데……. 전하께서 어떻게든 하신 게 맞나 봅니다. 아티팩트를 쓰셨나 보죠.”

“내가…….”

“…….”

“내가 살…….”

“…….”

같은 마법사라는 걸 알았을 땐, 똑같이 더러운 마법사일 수 있어서 기뻤다. 같은 마법사라서 기뻤다. 같은 수렁에 있어서 기뻤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뮌제에게는 되도록 다정하고 선한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뮌제는 항상 따뜻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뮌제는 부모님은 몰라도 동생인 윌리엄만은 끔찍하게 여기는 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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