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뮌제는 빙긋 웃었다.
“예를 들면 전하는 생명이 위험하실 때 제게 비밀로 하셨었고, 지금 전 하루 만에 가는 자세한 이유를 비밀로 하고 있잖아요.”
“……예.”
“근데, 그래도 전하께선 제게 가장 친한 친구일 테고, 제가 세상에서 가장 격의 없을 수 있는 분일 거예요. 제가 또 누구 앞에서 그런 모습으로 굴러다니면서 투덜거리겠어요. 가족 앞에서도 안 그러는데.”
‘그런 모습’을 떠올린 라파엘은 피식 웃었다. 뮌제도 그 웃음을 보고 더 큰 웃음을 지었다.
“서로에게 말하지 말아야 할 게 있고, 모르는 척해야 할 게 있고, 선을 그어야 할 게 있을 거예요. 평생 그런 친구이면 좋겠습니다, 전하.”
“…….”
“제게 에흐베 내정에 간섭해 달라 요청하신 공자님께는 죄송하지만요.”
“제가 선친을 살해했다고 생각합니까?”
“듣는 귀가 있는데도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예.”
“제가 지금보다 어릴 적에 전하께서 우시던 모습을 자주 봐서요…….”
그렇게 마음 여린 그가 죽이지 않았다고 믿는다는 뜻이었다.
낮게 웃음을 흘린 라파엘은 뮌제를 끌어안았다.
처음 만났을 땐 뮌제가 더 컸는데, 어느새 역전하여 라파엘은 뮌제를 품에 넉넉히 안을 수 있었다.
한 사람에게만 다정한 존속살인자는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배웅했다.
* * *
닷새 후.
로헤올령에서 로헤올 공작 부부가 사고사했다.
뮌제 로헤올은 공작이 되었다.
* * *
죽어 가던 라파엘이 살아나고, 대신 죽어야 했던 뮌제가 생존한 그날.
뮌제는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분명 함께 라파엘의 빛 위에 있었지만, 그 빛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생명의 근원을 옮기면 죽는다는 걸 알고도 했을 텐데 ‘어째서 내가 살아 있느냐’는 질문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느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뮌제는 라파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 라파엘은 뮌제가 그가 마법사임을 알고도 침묵하는 줄 알았다. 그녀가 침묵하길 원한다면 그도 그러기로 했다. 2년을 그렇게 아슬아슬한 선 위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걸 안 건 뮌제가 공작이 된 후였다.
* * *
공작이 된 뮌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로헤올 ‘본령’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본령 포기.
거점이 되는 영지를 포기.
미친 소식이었다.
세수로 곳간을 채워야 하는데, 그 세수를 거둘 곳을 포기하다니 미쳤나. 재산은 권력의 주춧돌이기도 했다.
이건 로헤올이 흔들리는 일이며, 더 나아가서는 어쩌면 이 나라가 흔들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로헤올만큼 뿌리 깊고 유서 깊게 버티고 있는 최고위 귀족 가문이 흔들리면 정세가 어떤 식으로 변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로헤올의 정적이 되는 다른 귀족 가문들까지도 토끼눈이 되었다.
‘어린 새 공작이 치기 때문에 나중에 죽도록 후회할 결정을 내린다’ 하여, 몇몇 가주들은 직접 로헤올 공작을 알현했다. 로헤올의 방계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새 가주를 찾아뵙고 정중하게 비꼬고 비난했다.
로헤올이 포기한 영지를 반납받게 될 황제는 고심했다.
로헤올이 권력을 유지해야 현재 친척인 황실에 힘이 된다.
그러나 영지를 돌려받으면 그만큼 황실의 재산이 채워지는 것이다.
멀리 두고 보았을 때 어느 쪽이 이익인지 황제는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기를, 로헤올령을 일단은 그가 받아 두되, 세수의 7할을 로헤올이 가져가도록 허락하겠다고 하였다.
대단히 배려심 있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로헤올 공작은 고개를 젓고 완전한 포기 각서까지도 제 손으로 써서 자발적으로 제출했다.
뮌제와 윌리엄이 태어나고 그들의 부모가 죽은 땅인 로헤올 본령은 순식간에 황제의 것이 되었다.
영주가 자신들을 포기했다는 소식에 영지민들은 조금은 반발했다. 조금은 절망했다. 조금은 실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살아갔다. 저희가 반발해봤자 높은 분들의 결정이 바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타국의 침략이었다면 농기구라도 들고 일어났겠으나, 이건 온느발레 제국 내부의 일이었다.
라파엘은 이 모든 소식을 에흐베에서 들었다.
새 공작으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결코 온느발레에 오지 말라 하는 당부가 있었던 까닭이다.
사실, 아무리 제국 온느발레의 공작이라 하더라도, 일국의 군주가 자신이 통치하는 국가를 잠시 떠나면서까지 만나러 간다는 건 지나친 일이다.
그럼에도 라파엘은 갔을 것이다. 뮌제로부터 이런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면.
그가 그녀에게 달려올 것을 확신했기에 날아온 이 편지가 그는 기꺼웠다.
두 달이 지나고 나서 어느 날의 오후, 라파엘은 뮌제에게서 다시 편지를 받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걸 부탁하려고 해. 여기로 나를 만나러 와 줘. 마지막으로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내용은 냉정했고 필치는 차분했다.
기억하는 것보다는 약간 날카로워진 감이 있는 글씨를 내려다보던 대공은 잠시 생각했다. 마지막?
에흐베 대공은 바로 그날, 그 이후의 일정을 전부 비웠다.
뮌제가 함께 보낸 아티팩트를 사용하자 그는 어느 방에 서 있었다. 그가 아는 방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뮌제가 보였다.
“…….”
그녀를 부르려던 라파엘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목이 메었기 때문이다.
이 방은 온느발레 수도에 있는 로헤올 저택 안,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로헤올 저택에서 가장 엄중하게 보안을 유지해야 하는 곳 중 하나. 그곳에 라파엘이 곧바로 발 디디게 했다는 사실은 특별하고도 특별했다.
대공은 벽난로의 불을 보고 있는 뮌제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아직 그를 눈치채지 못한 뮌제를.
불그림자가 어둡게 일렁거리는 옆얼굴을 시선으로 따라 그려 갔다. 뮌제의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고 불에 고정되어 있었다. 넋을 잃은 듯 보이기도 했고, 진이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라파엘은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붉었다. 온느발레와 에흐베의 시차는 한 시간이다. 아직 해 밝은 오후였던 에흐베와 다르게 온느발레에서는 노을이 진하게 들고 있었다.
그가 다시 뮌제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말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뮌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라파엘.”
옅게 웃는 얼굴이 하얬다.
라파엘도 미소지었다.
“쉬고 있었어?”
“응. 네가 오늘 바로 올 것 같아서. 그냥 작정하고 쉬기로 했어.”
이리 와 앉으라고 옆자리를 두드렸다.
아직 청소년의 나이인 두 지배자는 사이좋게 바닥에 앉아서 불을 보았다.
잠시 후 뮌제는 무릎을 꿇고 일어났다. 옆에 쌓아 두었던 상자 두 개를 끌어오기 위해서였다. 그가 저희 앞에 놓인 상자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뮌제는 두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여러 개의 서류철로 정리된 무수한 종이들이 있었다.
상자를 옆에 내려놓은 뮌제는 손바닥으로 탁탁 종이들의 위를 두드렸다.
“네가 보는 앞에서 하려고 여태 기다렸어.”
“응?”
“봐봐. 뭔지.”
뮌제가 서류철 하나를 빼서 그에게 건넸다.
라파엘은 의아해하며 그것을 폈고, 잘 정리된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한 줄 한 줄 지나갈 때마다 그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그가 온느발레로 ‘쫓겨나기’ 직전의 에흐베가 여기에 있었다.
“…….”
에흐베의 정보다.
라파엘은 자신이 읽던 것에서 고개를 들어 상자를 보았다. 설마 이게 다 에흐베에 관한 것들인가? 물론 에흐베에도 로헤올에 관한 정보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특히 어릴 적 라파엘이 온느발레로 오기 직전부터 더 특별하게 관리하고 모아 온 정보들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가 의아해하는 건, 뮌제에게 이것들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가 아니었다.
“이걸 왜…….”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고 했잖아.”
“이걸?”
“아니, 이거.”
그렇게 대답한 뮌제는 그의 손에서 빼낸 서류철을 그대로 불에 던졌다.
라파엘은 그대로 굳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류철 끝에 불이 단단히 옮겨붙었다. 아주 조금씩 검게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뮌제는 상자에서 또 다른 서류철을 꺼냈다.
“뮌, 잠, 뮌제? 아니, 잠깐만.”
라파엘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심장이 덜덜 떨렸다. 덜컥 떨어져서 가슴이 비었다. 부친이 보낸 자객을 상대하면서도 느끼지 않았던 원초적인 두려움이 그를 덮었다. 부친을 죽일 때도, 모친을 죽일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섞여서 그는 벌써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영지를 반납하더니 이제는 이……. 왜 그래.”
“…….”
“뮌제.”
꼭 삶을 정리하는 것 같다. 더는 살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그 말은 차마 입에 담지도 못했다. 대공은 애써 웃는 얼굴로 물었다.
뮌제는 잡히지 않은 오른손으로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괜찮아.”
그리고 그의 손에서 벗어나 다시 서류철을 불 속으로 던졌다.
이미 옆에 준비해 두었던 부지깽이를 잡은 그녀는 불과 장작을 살살 들쑤시기 시작했다. 장작 하나가 뒤집히자 불똥이 탁, 하고 튀었다.
“영지를 반납한 건 사정이 있고, 이것들은 전부 달달 외웠어.”
“……사정?”
“응. 사정.”
비밀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라파엘은 영지 쪽은 일단 포기하고 서류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도 저것들이 필요할 때가 있을 텐데.”
“응. 그러겠지. 그래도 태울 거야. 이 종이들이 내 손에서 벗어났을 때를 대비하는 거야.”
“이해가 안 돼. 다른 보고서들은 잘 보관하고 있잖아.”
라파엘은 반박했다. 어조는 침착했지만 숨이 아주 조금 떨렸다.
대공의 이런 모습을 보면 드비에 성의 모두가 놀랄 것이다.
그러나 뮌제는 놀라지 않았다.
공작이 잡은 부지깽이가 다시 한번 불을 들쑤셨다.
불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왼손을 다시 상자에 올렸다. 서류철을 꺼내려던 손길은 다시 한번 라파엘에 의해 막혔다.
뮌제는 이번에는 그에게 잡힌 손을 털어 내지 않았다.
탁, 탁, 불티가 튀었다.
벽난로의 불만 눈에 담으며, 뮌제는 천천히 말했다.
“윌리엄은 내 약점이야. 그 사실을 특별히 숨겼던 적이 없어. 앞으로도 그러겠지. 정말 절실한 약점이야.”
“…….”
“그런데, 너도 이미 다 알려진 내 약점이야.”
뮌제의 손등을 덮은 라파엘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우리가 친구인 걸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사실 크게 상관은 없지. 우린 이제 교류가 드물어질 테니까.”
“…….”
“그래도 나는 몇 년간 너와 나를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소수의 사람이 두려워.”
소수의 사람이라고 해 봤자, 이제는 로헤올 저택의 사용인들이나 윌리엄뿐이다.
뮌제는 사용인들에게 정보가 들어가게끔 이 서류들을 허술하게 관리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윌리엄을 두려워하는 건가. 그러나 그가 무언가를 묻기 전에 뮌제가 먼저 말했다.
“언제나 너는 내게 윌리엄의 다음이겠지. 지금까지보다도 더.”
그 말을 한 뮌제는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제 손을 덮은 라파엘의 손등 위에 입술을 눌렀다. 라파엘은 움찔하지도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뮌제가 라파엘에게 처음으로 한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