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00)화 (100/120)

# 99화

선대 대공비의 장례식이 모두 끝나고 한 달쯤 지났을 때, 라파엘은 뮌제를 초대했다.

뮌제는 흔쾌히 초대를 받아들였다. 대신 텔레포트 아티팩트를 제공해 달라 요청했다. 이제는 한 국가의 군주인 라파엘은 에흐베에서 찾아내는 모든 아티팩트의 주인이었다. 아티팩트를 드러내 놓고 사용해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뮌제는 라파엘이 제공한 아티팩트를 사용하여 생애 처음으로 에흐베 땅에 발을 디뎠다.

정확히는 드비에 성 본성 안. 어떤 화려한 방 안에.

이만큼 파격적인 초대는 다시 없을 것이다.

드비에 성 바깥에 도착하게 하여 거기서부터 모셔 오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드비에 성 내부에 나타나게 하다니.

뮌제를 어지간히 믿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었다.

심지어 뮌제조차도 이곳이 실내라는 걸 알고는 처음엔 당황하여 어색한 미소를 지었을 정도였다.

“테흐쥐 로헤올.”

그리고 그런 그녀를 초조하게 올려다보던 남자아이가 불쑥 그녀를 불렀다. 로헤올 후작. 에흐베 억양이 섞인 어색한 온느발레어였다.

남자아이의 뒤로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뮌제를 맞이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인 것 같긴 했다. 그러나 어쩐지 이 자리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뮌제는 잠시 이들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에흐베인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매끄러운 에흐베어로 묻는 온느발레 귀족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 놀라서 바로 대답하지도 못했다. 아이조차도.

잠시 기다리던 뮌제가 말없이 미소하자, 그제야 중년 사내 한 명이 급히 입을 열었다.

“갑작스…….”

“로헤올. 내게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아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기사 한 명의 표정이 약간 나빠졌다. 아하……. 이 묘한 분위기가 이 소년 때문인 것을 알아차린 뮌제는 아이에게로 눈을 내렸다.

간절한 어린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손짓했다.

“인사도 없이 처음부터 미안하지만, 잠깐 자리를 좀 비워 줘요.”

“……예.”

중년 남자가 잠시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그가 이 자리에서는 가장 신분 높았는지 다른 이들은 반발하지 않고 방을 비웠다.

뮌제는 창백한 아이의 앞에 몸을 굽혔다.

“어린 공자님. 내게 하고 싶은 말은요?”

“형님이 부모님을 죽였어요.”

다시 없을 기회라는 걸 아는 건지 아이는 망설이지 않았다. 여기 멋대로 밀고 들어왔을 때부터 각오를 했을 터.

뮌제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봤어. 봤어요…….”

“봐요? 무얼?”

“…….”

“아무것도 못 봤구나?”

앙큼한 거짓말을 한 남자아이가 움찔했다. 표정에 더 긴박한 간절함이 어렸다. 소년은 긴장으로 파들파들 떨리는 작은 두 손으로 뮌제의 손을 꽉 찾아 잡았다.

거기에 순순히 잡혀 준 뮌제는 부드럽게 아이를 달랬다.

“어린 공자님. 내가 에흐베의 내정에 감히 간섭할 수는 없어요.”

“후작. 제발. 제발…….”

“음. 내가 어떻게 해 줄까요. 뭘 바라는 건지 모르겠는데.”

“절 구해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제발.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형님은 저도 죽일 거예요.”

“…….”

뮌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곧 여섯 살이 될 다섯 살 아이가 이렇게 생존하고자 바둥거리는 모습이 좋아 보일 수는 없다.

죽은 대공 부부가 이 아이를 얼마나 혹독하게 교육시켰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이 아이를 위해서이기도 했을 테며, 하루라도 빨리 라파엘을 죽이기 위해서이기도 했을 터다.

그녀는 어린아이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죽을까 봐 무서워요?”

“예…….”

“부모님이 공자님 많이 사랑해 줬어요? 부모님이 계실 때 행복했어요?”

아이의 눈이 슬슬 눈물에 젖어 가기 시작했다. 꾹 참고 있던 울음이 솟기 시작한 듯했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뮌제는 살며시 웃었다.

“공자님. 공자님의 형님이 온느발레에 계셨던 건 알고 있었어요?”

“……예.”

“이걸 알아야 해요. 공자님이 여기서 행복할 때요, 대공께서는 온느발레에서 어떻게 살아남으셨는지 알아요?”

“…….”

“공자님께 다정하셨던 부모님이 대공을 죽이려 하셨어요. 그때 대공께서는 정말 죽을 뻔했어요.”

“죽어……요? 형님이……?”

“네. 근데 그게 언제냐면요.”

뮌제는 아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라파엘과 전혀 다른 금발이 흩뜨러졌다. 너무도 오랜만에 받아 본 다정한 손길은 아이를 무너지게 했다. 후계자 수업을 받으며 나이에 걸맞지 않는 의젓함을 가져야 했던 아이의 눈에서 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로헤올의 후계자는 손수건을 꺼내 그 눈물을 상냥하게 훔쳤다.

그리고, 그리하며 말했다.

“공자님이 똑똑하게도 단어를 조합해서 문장을 만들 수 있게 되었을 때였어요.”

이는 라파엘은 모를 정보였다.

“그러니까, 형님이 죽어도 공자님이 그분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겠다고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 때요.”

선대 대공은 그만큼 급하고 절박했다. 부인이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라파엘을 향한 부정은 부스러기 한 톨 남지 않고 사라졌으며, 오로지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대공을 잇기에 큰 결점이 없는 걸 확인하는 데에 집중했다.

이 아이에게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한 후에는 라파엘은 사라져야 할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뮌제는 너무 어렵지 않은 단어들을 부드럽게 말해 가며 이 영특한 아이를 이해시켰다.

그래도 어리기에 전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텐데.

그래서 그녀는 물었다.

“공자님. 죽을까 봐 무서워요?”

“네, 네.”

“그걸 대공께서는 자기 고향도 아닌 곳에서 혼자 겪으셨어요. 그래도 공자님은 지금 공자님을 사랑하시는 몇몇 분들과 함께 계시잖아요. 그렇지요?”

“아니, 아닌데. 아무도. 아무도 없어요.”

“…….”

“아무도 없어요…….”

아이는 이제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서러워 보였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끅끅 울던 아이는 잠시 후 꺽, 꺽,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무릎 꿇었다.

“살려 주세요. 로헤올 후작. 제발 저를 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

정말 몹시 겁에 질렸구나.

아이가 절박하게 잡은 제 손을 내버려 두고 뮌제는 난처해하는 얼굴로 눈길을 올렸다.

이제 막 문을 연 라파엘이 가장 먼저 찾은 이는 당연히 뮌제였다. 라파엘은 뮌제를 살피고는 눈웃음을 그렸다. 뮌제도 빙긋 웃었다.

라파엘은 그녀에게 다가가며, 울고 있는 아이의 뒤통수를 보고 뮌제와 시선을 교환했다.

동생 윌리엄을 그토록 떠받들며 사랑하는 뮌제가 보기에 이 상황이 어떨까.

심지어 저희 두 사람이 한 첫 다툼도 윌리엄이 주제였던 바. 뮌제에게 윌리엄은 특별했다.

라파엘은 뮌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그런 시선을 어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뮌제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하. 두 분 굉장히 많이 닮았네요.”

“인사도 없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그겁니까?”

미소 지은 라파엘이 마찬가지로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뮌제를 보는 눈빛이 달았다.

뮌제를 붙잡고 울고 있던 아이는 뻣뻣하게 굳었다.

얼굴이 하얗게 되어 잠시 숨을 쉬지도 못했다. 직후 숨을 헐떡이는 게 심상치 않아 보였다.

죽는다는 공포가 어쩌다 이 지경으로 아이를 쥐고 흔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뮌제는 그런 아이를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안 닮아도 될 걸 닮네. 괜찮아요, 공자님. 괜찮아.”

“닮았다는 게 얼굴 말하는 거 아니었어?”

“얼굴? 그건 그냥 딱 봐도 안 닮았는데, 뭘요. 성격 말씀드린 거예요.”

다가온 라파엘은 그렇게 말하는 뮌제의 머리에 입 맞추고 고개를 들었다.

열린 문을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표정 관리에 힘썼다. 대공이 지난 한 달 간 보였던 무표정은 어디로 가고 언행에 훈풍이 불었기 때문이다. 선대 대공비가 작고하기 전의 육 개월간 보였던 애매한 순순함과도 다른 느낌이었다.

라파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성격?”

“어쩌면 두 분 다 이렇게 여리지?”

“…….”

대공은 침묵했다.

* * *

울었다고 열이 오르기 시작한 공자를 유모가 데려갔다.

차려입은 옷을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뮌제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한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 살겠네, 좀.”

라파엘은 소리내어 웃었다.

주섬주섬 신발을 벗은 그녀가 소파 위로 두 발을 올렸다. 딱 온느발레에서 그와 함께 있을 때 보이던 그대로였다. 어느 정도 대공을 향한 예의를 갖추던 아까와 다르게.

라파엘은 명치보다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말을 웃는 얼굴로 흘렸다.

“응. 정말, 살겠다.”

뮌제를 보니 살 것 같다.

널 보니 숨이 쉬어진다.

두 사람은 그 ‘너와 함께 있으니 살 것 같다’는 공통된 평온 속에서 한참 침묵했다. 그들은 최근 들어 가장 안정된 마음으로 쉬는 중이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기분 좋은 바람이 들어왔다.

방에 들어오는 햇빛도 맑고 눈부셨다.

모은 발끝을 꼼지락거리던 그녀는 어느 순간 팔짝 두 발을 내렸다. 조용히 눈 감고 있던 라파엘은 그 소란스러운 기색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왜?”

“나 여기 오래는 못 있어. 빌이 간만에 로헤올에 갔거든. 그 애 옆에 있어야 해.”

“……이해를 못하겠는데.”

윌리엄이 로헤올에 간 게 어째서 그 애 옆에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연결이 되는지 모르겠다.

그간 윌리엄은 로헤올이 가진 두 영지 중 하나인 중앙탑 옆의 땅에는 퍽 자주 드나들었었다. 휴양을 겸한 그 행차에 뮌제가 함께하지 않았던 적도 많았다.

라파엘이 의아해하자 뮌제는 손을 휘적거렸다.

“있어, 그런 게.”

“…….”

“그래서 내일 아침에 가려고.”

여전히 뮌제에게 라파엘은 윌리엄의 다음이다. 간만에 만난 지금도 그 순서를 바꾸지는 않았다.

라파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쉽네. 그럼 이럴 게 아니라 여기저기 구경하는 게 나을까?”

“뭐 꼭 소개해 주고 싶은 거 있어?”

“그건 아니야.”

“그럼 이대로 있자. 그냥 너랑 있는 게 좋아.”

그 말을 하는 뮌제는 태연하게 말간 얼굴이었다. 순간 미소 짓지 못한 라파엘은 말없이 잠시 목덜미를 매만졌다. 이상하게도 더워서 힘이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은 금세 밝았다.

출발을 앞둔 뮌제를 배웅하는 사람 중에 어린 공자는 없었다. 그러나 뮌제는 그 부분을 짚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어제 그 공자와 헤어진 이후 단 한 번도 그 아이에 대해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살려 달라 애원한 아이인데도.

망설이던 라파엘은 다정하게 물었다.

“그 애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공자님이요? 전하께서 부모님을 살해하셨고 곧 자기도 죽일 테니 저보고 살려 달라 하던데요.”

“…….”

조심스러웠던 질문과 달리 답변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호쾌하고 명쾌하고 살벌했다.

배웅하기 위해 모여 있던 에흐베인들은 라파엘을 제외하고 전부 움찔했다.

라파엘은 흐리게 웃었다.

“뮌제. 그게.”

“전하. 우리는 서로에게 비밀이 있는데 없고, 비밀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해요.”

라파엘의 말은 듣지 않겠다고 고개를 흔든 뮌제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다정하게 느껴지기보다는 당당하게 느껴졌다. 친구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둘만 있을 때와 같지는 않았다.

대책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아이의 말을 이 자리에서 터트린 게 아니었을 것이다.

라파엘이 다른 이들이 듣고 있는 이 자리에서 대책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아이에 대해 물은 게 아니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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