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99)화 (99/120)

# 98화

“난 힘이 있어.”

“…….”

“난 충분히 널 도와줄 수 있어.”

뮌제는 라파엘을 살게 한다.

그를 나아가게 한다.

그를 안도하게 하고, 쉬게 한다. 뮌제만 옆에 있으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파엘은 잡고 있는 뮌제의 손을 놓고 뮌제를 안았다. 뒤로 넘어가는 뮌제가 다치지 않게 그녀의 머리 뒤를 손으로 감쌌다. 그것도 부족했기에 그는 곧바로 몸을 굴렸다. 뮌제를 안은 라파엘의 등이 바닥에 닿았다.

“사랑해.”

“오냐.”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댄 뮌제가 일부러 꾸민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라파엘은 키득키득 웃었다.

뮌제는 라파엘이 마음을 추스를 만한 시간만큼만 그에게 안겨 있다가 일어났다.

그게 열세 살 어느 날의 일이었다.

뮌제가 그렇게 라파엘에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도 라파엘은 딱히 뮌제에게 무언가를 부탁하지 않았다.

열네 살.

에흐베 대공이 수면 중에 사망했다.

정확히는, 세 차례의 독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라파엘이 처음으로 자객을 맞이했던 밤으로부터 세 시간 후, 에흐베 대공이 수면 중에 사망했다.

라파엘이 좀처럼 죽지 않자 교묘한 계획은 포기한 대공이 처음으로 거친 방법을 쓴 날. 하필이면 그날. 참 묘하게도 그날.

푹 자고 일어난 아침, 뮌제는 공작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라파엘에게 찾아갔다.

“……친구야.”

“응?”

“친구야.”

“응.”

“…….”

뮌제는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저택에서 홀대를 당하면서도 어지간하면 유순한 얼굴로 에흐베인들을 대해 왔던 소년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앞에 놓인 젤리를 집어 그녀의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던 뮌제는 어색한 발음으로 말했다.

“오늘 에흐베에 어떤 일이 생겼어. 넌 최대한 빨리 에흐베로 돌아가야 해.”

그 말을 들은 라파엘은 살짝 웃었다.

“난 아무 소식도 못 들었는데.”

“응. 로헤올이 좀 빨라.”

“…….”

에흐베에 사람을 심어 두었고 본디 황실에 귀속되어야 하는 마법 아티팩트도 쓰고 있다고 그냥 대놓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라파엘은 한참을 웃었다. 뮌제가 맑게 웃는 그를 무거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웃음기를 어느 정도 정리한 후에 물었다.

“무슨 일인지도 들었어?”

“응. 곧 부고가 올 거야. 와야 해. 하지만 오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넌 바로 출발하는 게 좋겠어.”

라파엘의 모친은 라파엘이 대공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공이 사망한 그시부터 라파엘은 이미 새 에흐베 대공이었다.

따라서 선대 대공비는 라파엘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여기에서 죽기를 바라고 있을 터.

이리로 부고 대신 죽음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에 대공비가 죽지 않은 이유는…….

뮌제를 보며 잠시 침묵하던 라파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뮌제가 앉은 의자 옆에 섰다. 고개를 내린 에흐베 대공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이의 뺨에 입 맞추었다.

“자주 올 거야.”

“미쳤네. 군주가 어딜 와.”

간지럽다고 눈을 찡그린 뮌제가 투덜거렸다.

라파엘은 누가 사망했는지 묻지 않았다. 침통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친구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뮌제는 마지막으로 라파엘을 꽉 안았다가 놓았다.

그녀는 이제 정말 라파엘을 자주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이젠 정말 숨이 막혀도 쉬러 갈 곳이 없겠구나.

울음을 삼킨 뮌제는 일단 라파엘에게 가장 중요한 걸 권해 보았다.

“같이 갈까?”

“어?”

“아니, 너……. 혼자 가서 위험할 수도 있고…….”

“…….”

라파엘은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정말 얘를 어떡하지.

사랑스러워서 어떡하지.

한숨 같은 웃음을 흘린 라파엘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고는 그녀의 다정한 제안을 거절했다. 방법이 있다며.

뮌제는 그날 오후에 출발하는 마차를 끝까지 배웅했다. 텔레포트가 담긴 아티팩트를 빌려주고는 싶었지만 라파엘의 수행원들에게까지 로헤올이 아티팩트를 가졌다고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그날 오후 에흐베의 드비에 성에 도착했다.

온느발레에서 함께 출발했던 에흐베인 여섯 사람은 없이, 오로지 그 혼자만.

* * *

에흐베 대공이 사망하였으니 그시부터 라파엘이 새 에흐베 대공이었다.

대공비는 남편의 사망 소식을 라파엘에게 알리지 않으려 했으나, 거짓말같이 라파엘이 돌아왔다. 정말 거짓말처럼, 대공이 사망한 날 바로.

마법일 수밖에 없었다.

대공비는 몸을 떨었으나 대공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소년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온느발레에 있는 저택에서 소년이 얼마나 주눅든 채로 유순하게 굴었는지 종종 듣곤 했던 덕분이었다.

그러나 대공비는 두 가지를 물었다.

“널 시중 들던 이들은 어찌하고 혼자 왔느냐.”

“저는 도중에 마차에서 내려 왔고, 그들은 마차를 끌고 오기로 했습니다.”

“……소식은 어찌 들었느냐.”

“감사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새 대공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막연한 대답이었으나 대공비는 짐작했다. 로헤올이겠지.

로헤올을 보호하는 꼴을 보아하니 그래도 머리는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는 했더랬다.

작았던 일곱 살 아이를 회상한 라파엘의 모친은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를 어찌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 그럼 방을 준비하라 이르겠다.”

“장례식에.”

“너는 참여할 것 없다.”

라파엘의 말을 차갑게 끊었다.

그녀는 라파엘이 장례식에 참석할 귀족들의 눈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직 온느발레에 있다 하기를 원했다. 그녀는 라파엘이 아니라 막내아들이 대공을 잇기를 원했고, 그건 작고한 남편이 평소 가진 생각이기도 했다. 마법사가 에흐베를 잇는 치욕을 겪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러려면 라파엘은 조용히 죽어야 했다.

선대 대공비가 새 대공에게 명령했다.

유순하게 컸다 하는 라파엘은 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오후부터 장례식이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얌전하게 손님방에 머무르고 있어야 했던 라파엘은 그 장례식에 모습을 드러냈다.

죽은 대공의 측근이었던 가신 몇과 대공비는 당황했다.

그러나 이미 일은 일어났다.

새 대공은 장례식에 걸음한 귀족들의 눈에 들었고, 그들에게 자신을 밝혔으며, 놀란 그들의 어색한 인사를 받았다.

그가 버림받은 것과 다름없음을 알고 있어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귀족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라파엘이 잘 성장한 소년이라는 걸 알고 미소했다. 온느발레에서 여기까지 이리 빨리 올 수 있었다면 아마 라파엘의 모친이 지원을 하여 불러 온 것일 테며, 그렇다면 그들이 가타부타 말을 얹을 일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대공비는 라파엘을 세워 놓고 분노했다.

“방에 있으라 하지 않았더냐!”

“새로 대공 된 자로 마땅히 그 선대를 존중하였습니다. 노하실 일이 아닙니다.”

오전에는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던 아이는 여전히 순한 얼굴로 일축했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말을 이었다.

“에흐베의 후계로서 교육받은 시간이 짧아 에흐베의 어른으로부터 많은 지도가 필요합니다.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밤그림자와 밤 그늘이 진 하얀 얼굴이 그 순간 어쩌면 그리도 소름이 끼쳤는지.

대공비는 이를 악물었다가 놓았다.

그녀가 라파엘을 반대하기 시작한다면, 라파엘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녀의 의견에 힘을 실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라파엘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공연히 알리지 않는 한 대공비의 반대는 명분 없는 반대에 불과했다. 라파엘은 대공을 잇도록 태어난 장남이었다.

알릴까.

알리고 이 소름 끼치는 마법사를 에흐베의 명예로운 길에서 배제시킬까.

그러나 결국 그녀는 그러지 않기로 완전히 마음을 정했다. 오늘 하루종일 끌다 이 자리에서 끝맺은 고민이었다.

존귀한 귀부인은 아직 쓰고 있던 베일 드리워진 검은 모자를 벗었다.

그녀는 말했다.

“네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

“지금 아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더는 안 된다. 고귀한 에흐베에서는 마법사가 나와서는 안 된다.”

라파엘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한 건, 라파엘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마법사를 낳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치욕스러웠다. 마법사를 낳은 몸, 마법사의 모친으로 마법사와 함께 싸잡아 모욕당하길 원치 않았다.

에흐베에서 마법사가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 역시 치욕스러웠다. 그녀는 존귀한 에흐베의 명예를 지켜야 하는 에흐베의 안주인이었다.

또한 라파엘은 이미 대공이 된 몸. 그녀를 적대하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이제부터 권력은 빠르게 새 대공에게로 옮겨 갈 것이므로.

라파엘은 한때 같은 눈동자 색을 가졌던 여자를 바라보다 또 유순하게 대답했다.

“그리하겠습니다.”

장례 본식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라파엘은 선대 대공비의 도움을 받아 대공의 일에 적응해 나갔다.

로헤올의 도움을, 정확히는 뮌제의 도움을 받아 지난 몇 년간 특별히 교육을 받아 오긴 했으나, 그가 선대 대공비에게 말했듯 ‘에흐베의 후계자로서 교육받은 시간’은 몹시 짧았다. 단 한순간도 없었으니까.

로헤올에서 라파엘에게 제공한 건 모든 지도자가 가져야 하는 공통된 지식과 교양 정도에 불과했다. 에흐베에 특정된 지식을 채우는 건 그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었다.

라파엘은 정말 영리한 편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모든 것을 단시간에 습득하기는 불가능했다. 괜히 가문의 후계자들이 어릴 때부터 수업을 받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습득하면 되는 건지 감을 잡는 건 단시간에도 해낼 수 있었다.

라파엘은 그렇게 했다.

반년쯤 지나자 어느 정도 토대가 닦였다.

그즈음 선대 대공비가 사망했다.

어느 날부터 시작된 고열에 시달리며 서서히 약해져 가다가 그 ‘원인 모를 병’을 결국엔 이기지 못하고.

마치. 마치…….

온느발레에서 라파엘을 시중 들던 이들은 여태 소식도 없었지만, 이 성에도 선대 대공이 라파엘을 죽이려 했다는 걸 아는 이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대공이 조언을 얻었던 대공가 주치의.

의사는 선대 대공비의 상태가 독으로 인한 것임을 알았으나 감히 치료하지 못했다. 전에 있던 일의 내막을 알고 있는 자들 보란 듯이 같은 방식으로 대공비가 죽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 에흐베의 주인은 라파엘이었다. 이미 반년을 지내며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으로 국정을 이끌고 있는 마법사.

의사는 왕에게 감히 항거할 용기도 힘도 없었다.

대공비는 그야말로 언젠가의 누군가처럼 에흐베인들에게 외면당해 죽었다.

라파엘은 그날부터 더는 에흐베인들에게 미소짓지 않았다. 그는 더는 유순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라파엘이 마법사임을 알고 있는 소수는 입을 다물었다. 이미 권좌를 잡은 군주는 마법사였다. 그에게 대섰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될 수 있다는 걸 그들 정치가들은 잘 알았다.

* * *

대공비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반년이라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라파엘의 눈동자 색이 바뀌었다는 점조차 끝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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