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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98)화 (98/120)

# 97화

사실 두 사람 다 자리보전하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한동안 푹 쉬어야 했다.

원칙적으로는, 이상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라파엘은 자기 저택에 있을 수 없었고, 뮌제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려 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울해하는 듯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산책을 하거나 가볍게 달리기를 했다.

덕분에 라파엘도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가 온느발레로 온 이래, 뮌제가 교양을 위해 무투 훈련을 받을 때 라파엘도 겸사겸사 함께 훈련받고 있었는데 그 시간보다도 더 길게.

이래서야 몸이 회복될 때를 기약하며 훈련을 중단한 보람이 없다.

그래도 라파엘은 뮌제를 크게 말리지 않았다.

“햇볕을 봐야 기분이 좀 나아지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말리겠는가. 뮌제도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잘 알고 있는 후계자였고, 그래서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았다. 그럼에도 이리 바깥을 나돌아다니니 그녀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라파엘은 책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찻주전자를 들었다.

이미 다 식은 차를 뮌제 몫의 잔에 따르자, 뮌제는 그걸 호쾌하게 들이켰다.

라파엘은 또 웃었다.

“천천히 마셔.”

“그렇지 않아도 이젠 우아하게 마실 거야.”

새침하게 말하는 얼굴에는 장난기가 있었다. 못 당하겠다. 라파엘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잔에 차를 따랐다.

쪼르륵 하며 찻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시원했다.

뮌제는 예고했던 대로 느긋하게 그 잔의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좋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우수수 이파리가 부딪히는 소리. 나무 그늘이 흔들리는 소리. 햇볕도 시원해지는 소리.

하나로 묶은 긴 금발도 흔들리며 약간 흐트러졌다.

그 한가로운 얼굴을 잠시 눈에 담던 라파엘은 눈길을 돌렸다.

이곳, 로헤올 저택의 두 번째 후원은 적당히 정돈된 곳이었다. 꽃보다는 나무와 수풀이 많은 곳.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첫 번째 후원이 있음에도 뮌제는 이곳을 더 자주 찾았다.

라파엘도 이곳이 좋았다.

그는 찻잔을 들었다. 찻잔이 소서에 닿는 소리가 달그락, 기분 좋게 났다.

한동안 평온한 침묵 속에 있던 그를 힐끗 본 뮌제가 입을 열었다.

“너 이번에 할 일 없으면 로헤올에 같이 갈래?”

“……영지에?”

“응.”

“…….”

라파엘은 물끄러미 뮌제를 응시했다.

초대할 만도 한데 여태 한 번도 초대하지 않더니, 이번엔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하지만 이 제안은 그에게 반가웠다.

뮌제가 태어난 곳에 가는 것이기도 했고, 뮌제가 수도에 없는 새 그의 저택에서 매일 매분 매초 경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해서.

일단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좋아. 그런데 공작님이 허락하시겠어?”

“아버지? 내가 데려간다는데 뭘.”

뮌제는 시큰둥하게 말하고 잔을 입에 댔다.

로헤올 공작은 뮌제가 하는 일이라면 거의 다 용납했다. 뮌제가 선을 지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공작은 뮌제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너라면 알아서 잘할 테니.’라는 뮌제를 향한 신뢰로 가득찬 말이 공작의 방패였다.

라파엘도 이젠 그 방치가 익숙하지만, 종종 뮌제의 이런 얼굴을 볼 때는 마음이 쓰렸다.

[내게 부모님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

사실 부모에 대한 기대를 버린 시간으로 치자면 라파엘보다 뮌제가 더 길었다.

그래도 자신이 슬픈 것은 얼마든지 참아도 뮌제가 슬픈 건 싫어서…….

“…….”

잠시 그녀를 보던 라파엘은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로 한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평온한 시간 끝에 뮌제는 문득 말했다.

“뭐 좀 먹을래?”

“응?”

“너 혈색이 영 돌아오질 않는 것 같아서. 이제 여행도 가야 하는데 몸에 좋은 걸로 좀……. 내가. 음.”

무슨 결심을 했는지 뻔히 보였다. 라파엘은 일어나는 뮌제를 보며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난 괜찮은데. 귀찮지 않아? 방금 산책하고 왔으면서.”

“괜찮아. 얼른 회복해야지. 너도, 나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가 해 줄게.”

“아냐. 쉬고 있어. 몸을 움직이고 싶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붙잡기도 그랬다. 오늘 간만에 혀가 난리 나겠구나. 절대 느긋하게 할 수 없는 감상을 느긋하게 하며 라파엘은 그녀를 순순히 보냈다.

뮌제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리장은 뮌제를 말리지 못한다. 가서 뮌제를 보조하며 재료를 차단해 보긴 해야 했다. 라파엘이라고 요리를 아주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뮌제보다는 잘했다. 뮌제를 자기 음식에서 살려야 한다는 일념 아래 배운 요리였다. 자기 음식을 먹고 토하는 뮌제를 또 보고 싶지는 않아서.

그리고 보름 뒤 뮌제가 데려간 곳은 로헤올령이 아니라 중앙탑이 있는 땅이었다.

“속았지? 으하하!”

마차에서 내린 라파엘의 표정을 보고 뮌제는 전에 없이 신나게, 실로 격의 없이 웃었다.

허탈한 눈으로 그녀를 보던 라파엘은 뮌제의 볼을 꽉 잡아당겼다.

“로헤올령에 간다며.”

“야아, 아, 아. 가긴 갈 건데 나만 잠깐 갔다 올 거야. 아아.”

아파하면서도 뮌제는 착실히 대답했다.

그 말에 소년의 손에서 힘이 살짝 빠졌다.

이제는 같은 색이 된 눈동자 두 쌍이 서로를 마주했다.

볼을 뺄 수 있음에도 그대로 잡혀 있으면서 뮌제가 어색하게 웃었다.

“로헤올 본령에는 가서 좋을 것 없어.”

“왜.”

“그냥. 웬만하면 거기엔 너 안 데려가고 싶어.”

“……그럼 난 여기까지 왜 데려왔어?”

“여기까지 오는데 심심하기도 하고. 너도 여행하면서 기분 전환 좀 하게 하고. 겸사겸사. 나 로헤올에 다녀올 동안 여기저기 다니면서 좀 놀고 있어. 나 다녀와서 시간 있으면, 여기 옆 지방이 우리 다른 영지거든? 거기 가자.”

“…….”

라파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더 수상해졌다.

눈치를 보던 뮌제는 자신의 볼을 잡고 있는 라파엘의 손을 살짝 감쌌다. 그에게서 자유로워진 뮌제는 그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나도 곧 출발해야 해.”

그들이 밖에 서 있는 사이 방을 잡은 로헤올의 하녀가 뮌제에게 열쇠를 건넸다.

객점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온 그들은 일단 문을 닫았다.

정말 급하긴 한 모양인지 뮌제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 여기, 중앙탑의 땅이거든.”

“응.”

“여기서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에흐베랑 중앙탑이랑 온느발레랑 다 같이 문제 생겨. 진짜 국제 문제 된다. 너 여기 데려온 로헤올도 문제 생기지만.”

라파엘이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다.

무언가를 직감했기 때문이다.

아직 뮌제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려고 하자, 뮌제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그를 놓아 주지 않고 단단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에선 에흐베도 어지간하면 너를 못…….”

“…….”

“못……, 음…….”

“못 죽인다고.”

뮌제가 좀처럼 완성시키지 못하는 말을 라파엘은 대신 말했다.

뮌제는 움찔했다.

라파엘은 잡혀 있던 손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그가 뮌제를 잡았다.

그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물었다.

“언제, 어떻게 알았어?”

“그냥 추측한 건데.”

“추측한 것치고는 너무 확신했던 것 같은데.”

뮌제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사정이 알려진 탓에 당황하여, 라파엘의 어조는 살짝 차가웠다.

그러나 뮌제는 당황한 눈치가 아니었다.

대답을 피하려는 기색 역시 아니었다.

눈을 살짝 찡그리고 잠시 침묵하던 소녀는 입을 열었다.

“애초에 우리가 온느발레에서 만난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잖아. 우리 둘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라곤 해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잘못된 거지. 왕의 후계자가 타국에 머문다니.”

“…….”

“거기서부터 생각을 해 본 거야.”

뮌제는 잡히지 않은 손을 들었다.

“넌 잠시라도 에흐베에 돌아가는 일이 없고. 그렇다고 에흐베 대공께서 널 보러 오는 것도 아니고. 동생 태어나고. 우리 싸운 날부터 네가 갑자기 아프고.”

뮌제의 손이 허공에 부드럽게 물결 모양을 그리며 옆으로 나아갔다.

라파엘을 후벼팔 수도 있을 만큼 가차 없는 말과 함께 흘러간 손은 다시 돌아왔다. 손장난을 그친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 아프고 일어난 다음부터 표정도 달라졌고.”

표정?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뮌제는 코를 찡긋했다.

“무엇보다,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공작님이?”

“네가 에흐베에 배상 받으라고 했다며.”

“겨우 그걸로……?”

“아니, 그건 아니지. 아버지가 아시는 정보가 뭐 더 있겠지.”

“…….”

“난 진짜 근거 빈약한 추측만 했고, 그걸 확신한 건 아버지가 동의하셨기 때문이야.”

로헤올 공작을 위시한 온느발레 최상위 가문 가주들의 정보력은 농담으로라도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은 라파엘은 맥이 풀렸다.

그는 한 번 심하지 않게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다리의 힘이 전부 풀린 건 아니었지만, 라파엘은 뮌제의 손을 잡은 채로 그 자리에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구부려 허공에 뜬 무릎이 흔들렸다.

“알고……. 알고 있었구나…….”

“…….”

“알고 있었어…….”

그를 내려다보던 뮌제는 그 앞에 비슷하게 쪼그려 앉았다.

간편하게 차려입은 연한 녹색 치맛자락이 그녀의 주변 바닥을 넓게 쓸었다.

그녀는 라파엘에게 잡힌 손을 장난스럽게 흔들며 침묵하다가, 불쑥 말했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척 할 수도 있었어.”

건조한 어조였다.

그는 이제부터 뮌제에게 어떤 식으로 ‘위험하기도 하고 네가 심력을 쏟게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부디 염려 말라’는 말을 부드럽게 돌려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뮌제의 치마 끝을 멍하게 보고 있던 라파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뮌제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천하의 로헤올 후계자가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련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건 없어. 네가 바란다면 그 정도로는 바보처럼 굴 수 있어. 괜찮아.”

“…….”

“근데 생명과 관련된 거라면 말이 다르잖아.”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라파엘을 살리려 했던 소녀가 말한다.

라파엘은 그녀를 잡고 있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그때 뮌제는 쪼그려 앉아 있던 자세에서 무릎 한쪽을 바닥에 내렸다. 자세에 훨씬 안정감이 서린 그녀는 빙긋 웃었다.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라파엘의 한쪽 어깨에 올린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웬만하면 말을 해.”

뮌제는 그대로 라파엘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강하지 않은 힘이었지만 라파엘은 스스로 그 불편한 자세를 풀고 바닥에 앉았다. 뮌제는 만족스럽다는 눈으로 그를 보고는 계속 말했다.

“물론 말하고 말고는 네 자유지만……. 말을 들은 후의 것은 내가 알아서 감당해. 멋대로 나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뮌제는 라파엘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뮌제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를 ‘뮌제를 걱정해서’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그 따뜻한 신뢰가 라파엘의 마음을 채우기 시작했다. 녹말이 엉긴 물이 끓는 것처럼 녹진한 공기 방울이 뜨겁게 부풀었다가 터지기를 반복했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따뜻했다.

“라피. 넌 결국 이곳에선 아무것도 아니야. 대공에게 버림받고 살해당하기 직전인 아이일 뿐이야. 심지어 온느발레는 네 모국조차 아니라서 네 기반이 있을 수도 생길 수도 없지. 너한텐 힘이 없어.”

“…….”

“근데 나는 내 모국에서, 다른 나라도 아닌 온느발레에서 나고 자라서 지금까지도 머물고 있고, 가장 힘 있는 가문의 후계자인 데다, 주변에서 강력하게 지지받고 있는 사람이야.”

사람이 이렇게 다정하게 빛날 수가 있다.

사람이 이렇게 빛나게 다정할 수가 있다.

뮌제가 그의 약하고 비참한 부분을 찔렀지만, 라파엘은 울컥하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이게 위엄이라면 찬란하다. 뮌제 로헤올. 라파엘의 앞에선 거의 항상 동등한 친구 뮌제이기만 하였던 사람이 온느발레의 로헤올로 말하자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뮌제 로헤올.

다정한 사람이 단단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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