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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97)화 (97/120)

# 96화

뮌제와 교류가 잦으니 살해당했다는 심증만 있어도 뮌제가 나설지도 몰랐다. 뮌제는 온느발레의 유력 가문의 후계자였다. 그 어린 입에는 힘이 있다.

그래서 에흐베는 귀찮더라도 이리 돌아가는 수를 택했을 것이다.

뮌제와 처음으로 냉랭하게 헤어진 날부터 아프기 시작하여, 뮌제가 이 저택에 오지 않는 새 차근차근 악화시켜 영리한 뮌제가 무언가를 이상하게 여길 요소들을 차단시켜 버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에흐베 대공가에서 태어난 마법사를 기어이 없애야 했을 것이다.

아우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들었었다. 그의 저택에 있는 에흐베인들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던 그 소식을 뮌제에게서 전해 들었었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 고통을 느낄 새조차 없이 단숨에 죽여 주실 사랑도 없으셨던가.

“뮌제……. 나…….”

“응.”

“…….”

부모가 나를 죽인다고, 뮌제에게 말해서.

말해서.

……말하면?

“…….”

뮌제는 그를 살리겠다고 움직이겠지.

그녀의 부친에게 말하여 어떻게든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아니면, 혹시 그사이 그가 죽는다면, 뮌제는 살해 의혹을 제기하여 에흐베와 척을 지겠지.

어느 쪽이든 뮌제가 크게 수고해야 했다.

마음고생도 반드시 따를 것이다.

네가 고통스러울 것이다…….

라파엘은 힘에 겨워하는 그를 끈질기게 기다려주는 뮌제를 흐린 눈으로 보고 보았다.

그는 마법사였다.

에흐베가 밉지만, 그리고 몹시도 슬프지만, 뮌제를 괴롭게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마법사였다.

라파엘은 더 말을 잇지 않고 눈을 감았다.

“……자?”

뮌제가 소곤소곤 물었다. 겁이 난 걸까. 그래서 라파엘은 가물어 가는 목소리로 신음으로 대답했다.

대답을 듣고도 뮌제는 떠나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인기척이 났다.

한참 뒤 으음, 하는 감탄사를 흘린 뮌제는 부스럭부스럭 움직였다. 제 위로 그림자가 지는 게 느껴졌다. 라파엘은 그제야 뮌제가 여태 침대 옆에 무릎 꿇고 있었던 점을 깨달았다. 그것마저 서러워서 그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가 흘러내렸다.

뮌제의 손이 다시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이어, 그 물기가 남은 손을 포함해 다른 손까지 올려 라파엘의 수척한 양 뺨을 감쌌다. 바로 직전에 눈물을 훔칠 때와 다르게 굉장히 서늘했다. 열 오른 얼굴에는 몹시도 쾌적한 손이었다.

뮌제는 말없이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라파엘의 열이 조금 식은 것 같을 때쯤 손을 떼었다.

“내일 또 올게.”

라파엘이 깰까 봐 조용히 속삭인 그녀가 침대 곁에서 벗어나는 게 들렸다.

몰래 왔다더니 문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문 열리는 소리는 끝까지 들리지 않았다.

눈을 뜬 라파엘은 뜨거운 손을 들어 손등으로 눈물을 완전히 닦았다.

다음날 뮌제가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 라파엘은 모른다.

그로부터 며칠간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그의 손을 잡은 채로 뮌제가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

눈을 감은 흰 얼굴에는 그림자가 강하게 진 채였다.

뮌제가 앉은 바닥에서 꺼져 가는 빛이 은은하게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빛?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움직이던 라파엘의 눈이 멈추었다.

누워 있던 그는 벌떡 일어났다.

몸이 아직 무거웠지만,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던 시간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라파엘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뮌제를 흔들었다.

“뮌제?”

“…….”

“뮌제?”

“…….”

숨이, 숨이 약하다.

라파엘의 손을 잡고 있던 작은 손이 풀렸다. 라파엘은 당장에 그 손을 다시 잡았다. 아니. 안 돼.

그는 거의 굴러 내려오다시피 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사라지고 있는 진을 라파엘은 눈에 담았다. 곤두선 신경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그는 진을 눈에 담았다. 외웠다.

마법은 익숙하지 않다.

연금술도 잘 모른다.

에흐베에 있을 때에는 부모의 눈치를 보느라, 이곳에 도착한 초반에는 마법이 증오스러워서, 그 후에는 뮌제가 서 있는 곳에서 같이 당당하고 싶어서.

그러나 그게 아예 마법을 쓰는 방법을 모른다는 건 아니었다.

마법사가 어떤 방식으로 생을 영위해 가는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게 마법사였다. 그게 간악함을 타고난 마법사였다.

무릎 꿇은 그의 아래에 진이 떴다.

미숙한 라파엘은 소녀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심장을 차단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미 그녀의 심장과 섞인 자신의 심장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는 뮌제를 가졌고, 뮌제는 라파엘을 가지는 중이었다.

뮌제의 손만 잡고 있던 라파엘은 어느 순간 그녀를 끌어와 꽉 안았다. 고마워. 행복해야 해.

뮌제를 살리고 죽을 작정이었다. 각오했다. 뮌제가 각오했었듯이.

이건 마법사가 태어난 이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법사 두 명이 서로를 살리겠다고 이리 생명의 근원을 움직이고 움직이는 일은. 그래서 이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라파엘은 정말 단순하게 생각했다. 심장을 옮겼으니 뮌제는 살 것이다. 살아야 한다.

소년은 품 안의 뮌제가 뜨거워지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그에 그치지 않고 뮌제는 조금 전과 다르게 강하게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것마저도 생명의 증거였다.

라파엘이 그녀를 살피기 위해 잠시 그녀를 품에서 놓고 침대에 기대게 했을 때, 뮌제가 눈을 떴다.

라파엘의 눈이 커졌다. 핏발이 선 연회색 눈동자가 그를 흐리게 담았다.

그녀는 미소했다.

분명 안도였다.

소녀는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빛을 내고 있던 라파엘의 진도 사라졌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뮌제가 살았다.

네가 살았다.

라파엘은 땀에 젖은 팔로 뮌제를 끌어안았다. 그럼 됐어. 네가 살았어.

소년은 설렁줄을 당겼다.

느릿느릿 방에 들어온 에흐베인은 대공자가 움직이고 있을 뿐더러, 로헤올의 후계자가 정신을 잃은 채로 대공자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광경을 이해하기까지 약간 시간이 걸렸다. 어떻게 로헤올 공녀가 이곳에 있나.

그런 그에게 라파엘은 힘을 잃은 목소리에 아득바득 힘을 실었다.

“당장 의사 불러와!”

점잖던 소년이 외치자 하인은 화들짝 놀라 달려나갔다.

그곳에서 일단의 진찰을 마친 뒤 뮌제는 로헤올 저택으로 이송되었다. 기별을 미리 받았던 로헤올 공작 부부는 경악하여 달려 나왔다.

뮌제가 어떻게 에흐베 저택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에흐베 대공자의 병이 로헤올 공녀에게 옮았다.’

옮은 것처럼 보였다.

생명의 근원을 옮긴 탓인지, 아니면 죽어 가던 라파엘의 근원을 옮겨 받아서인지, 뮌제는 라파엘이 아팠던 그대로 아팠다.

에흐베가 로헤올에게 사과하기에 충분했다.

로헤올 공작은 후계자가 의식 없는 이 심각한 상황에도 기회는 기회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라파엘은 로헤올 공작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을 쥔 에흐베 대공에게 값을 전부 받아 내라는 취지의 말을 예의 바르게 올렸다.

마법을 써서 뮌제를 조용히 로헤올 저택으로 옮길 수 있었음에도 이리 소란을 피운 이유가 그것이었으므로.

라파엘은 로헤올 공작의 허락을 얻어 뮌제의 옆을 지켰다.

공작은 처음에는, 옮는 병이니 다시 라파엘에게 옮으면 어떡하겠느냐며 거절했다. 이제 막 병이 나은 상태라 움직이기도 어렵지 않느냐며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라파엘이 고집스럽게 부탁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 허락이 공작의 본심이었다.

감히 로헤올의 후계자에게 해를 끼쳤으면 그 정도는 하는 게 당연했다. 라파엘이 에흐베 공국의 차기 군주라 하더라도 상관없다. 뮌제는 온느발레의 로헤올이었다. 에흐베에 비할 신분이 아니다.

라파엘은 뮌제의 친구로서 잠시 병문안을 오는 정도를 넘어서, 거의 하인처럼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뮌제의 곁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시간, 생각하고 생각했다.

“…….”

마침내 눈 뜬 뮌제가 그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순간, 남아 있던 라파엘의 벽은 전부 무너졌다. 뮌제의 눈동자는 전과 같이 연회색이었다. 그래도 저 색이 이제는 오롯이 뮌제의 색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저 색은 뮌제의 색으로 물든 라파엘의 색이었다.

뮌제.

그를 위해 목숨을 버렸던 친구.

그와 같은 마법사.

뮌제가 살아 있는 그를 보고 안도했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년은 소녀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이제 우리는 서로를 가졌어.”

가지 마. 내가 널 잃게 하지 마.

사랑해. 가지 마.

뮌제는 다시 눈을 감기 전 한 번 고개를 까닥였다. 이 고열을 이겨 내겠다는 약속이었다.

라파엘은 도로 잠든 흰 얼굴을 보다가 옅게 웃었다.

같이 죽지 말고, 같이 살자.

소년은 두 손으로 뮌제의 양 뺨을 감쌌다. 차가운 두 손이 소녀의 열을 식혔다. 뮌제가 라파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법으로.

뮌제가 마법사다.

너도, 마법사다.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가져 본 친구가, 유일한 친구가, 온느발레의 고귀한 가문의 후계자가.

더럽다며 결국 부모에게 죽임당할 뻔한 그와 같이 마법사였다. 세상이 적대하는 마법사.

그 진창에 우리가 함께 있다.

저열하지만 너무도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이 라파엘을 부여잡았다. 뮌제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는 아직 차가운 손으로 뮌제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넘겨 준 라파엘은 고개를 내렸다.

너와 내가 같은 진창에. 같은 늪에 있다.

그게 그에게 어떤 구원처럼 느껴지는지 뮌제는 모를 것이다. 나 있는 곳이 늪이라도 너와 함께 있다면 괜찮아. 다른 사람이 아닌 너와 함께 천박할 수 있다면. 너와 함께 더러울 수 있다면.

그는 뮌제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늘이 졌다.

* * *

갑자기 살아난 대공자로 인해 저택이 발칵 뒤집혔다.

티 내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지만 에흐베인들은 당황스러워했다. 라파엘을 시중들고 마주하는 내내 표현하기 어려운 긴장이 그들을 감쌌다.

라파엘은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첫 시도가 어렵지, 그다음은 쉽다.

그의 부모는 반드시 그를 죽일 것이다.

소년은 곤두섰다.

생각은 뮌제가 쓰러져 있는 일주일간 마치고, 결심도 했지만, 현실의 그는 아직 권력 없는 소년이었다. 유학과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온느발레로 유배를 온 대공자. 실질적으로 에흐베 대공에게 버림받은 대공자.

그쯤에서 그친다면 그가 한 나라의 왕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라파엘은 다행히도 마법사였다.

다행히도.

‘다행히도.’

“…….”

생각에 잠겨 있던 라파엘은 읽고 있던 마법과 관련된 책 귀퉁이를 쓰다듬었다. 햇빛 그늘이 잔잔하게 드리운 부분이었다.

그토록 혐오했던 마법사라서 그는 뮌제를 살릴 수 있었다.

그토록 꺼렸던 마법사라서 그는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마법사라 다행이었다.

마법사라…….

“라피.”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자, 라파엘은 흠칫했다.

그가 돌아볼 새도 없이 뮌제는 뒤에서 나타나 그에게 어깨동무했다. 앉아 있는 그에게 맞추기 위해 허리를 살짝 굽혔다.

“그러다 책 찢어진다. 내 책이야.”

뮌제는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톡, 라파엘의 오른손을 쳤다. 책장을 괴롭히고 있던 손이었다.

라파엘은 작게 웃었다.

“산책은 다 했어?”

“어어. 덥다.”

“땀 나는 거 싫다고 그렇게 실내를 좋아하는 애가 웬일일까.”

지나가듯 말하자 뮌제는 생긋 웃고는 팔을 풀었다.

그리고 라파엘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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