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라파엘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 줄기들을 관찰했다. 말이 관찰이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멀뚱하게 보고만 있었다 하는 게 옳은 말이다.
그때 뮌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내가 혼날까 봐 걱정한 거지?”
“……응.”
“난 윌리엄에 대한 일로만 혼나.”
“응?”
“내가 윌리엄을 화나게 하면 혼나. 윌리엄의 건강……, 윌리엄의 몸을 더 아프게 만들면 혼나. 그럴 때 혼나.”
“…….”
“이런 건 안 혼나. 괜찮아.”
“…….”
“그리고 내가 네 옆에 있으니까, 온느발레에서 그 누구도 널 혼내지 못해. 난 온느발레의 로헤올이야.”
뮌제는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말했다. 건강 정도의 단어는 그도 알았지만, 라파엘은 뮌제의 다정함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너도 나도 혼날 일 없어. 걱정하지 마.”
“응…….”
“그리고 부모님을 너무 무섭게 생각할 필요 없어.”
“공작님?”
“아니. 그냥. 부모님. 그냥 부모님들. 세상의 부모님들.”
소녀의 음성은 물결도 일지 않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라파엘은 반사적으로 자기 부모님을 떠올렸고 그 직후 슬퍼졌다. 코가 매워졌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에게 부모님은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뮌제가 말했다.
“있잖아. 나는 부모님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
“내게 부모님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
뮌제는 이 와중에도 말을 쉽게 고쳐 주었다.
그러나 그다음 문장은 그녀가 라파엘에게 했던 말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어려웠다.
“난 윌리엄을 지키기 위해 마련된 수단이야. 그분들 앞에서 난 인격이 없어.”
라파엘은 침묵했다.
마찬가지로 침묵하던 뮌제는 그, 음, 이라며 감탄사를 흘리고는 다시 말했다.
“난 윌리엄을 지키는, 아카.”
아카? 더 못 알아들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 말을 듣고 누운 자리에서 휙 뮌제를 보았다.
“부모님께 난……. 움브라 앙글루스. 논.”
떠듬떠듬 말하는 그건 에흐베어였다.
문법은 틀렸지만, 뜻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언제 이렇게. 어떻게. 에흐베어를. 라파엘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비스듬히 누운 탓에 간신히 보이는 뮌제의 옆얼굴을 보고 있는데 그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갔다.
그가 우는 걸 모르는 뮌제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랑을 주시는 만큼 나도 주면 되지. 아무것도 안 준다면 나도 안 주면 돼. 조금 주면 나도 조금 주면 돼.”
“부모님이……. 날, 미워한다면……?”
누가 들어도 우는 사람처럼 목소리가 떨렸다.
멈칫한 뮌제가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 상체를 약간 일으켰다. 애써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소년을 본 소녀는 다시 누웠다. 그리고는 이상한 앓는 소리를 내면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똑같이 미워해도 되고.”
“…….”
“미워하면 네가 힘들어지니까, 그냥 무시해도 되고.”
“…….”
“그래서 나는 부모님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하지 않게 만들었어. 그래야 무시하기 쉬우니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나를 안 사랑해 봤자 나도 사랑 안 하고 무시하면 그만이야.”
훗날 이날에 대해 듣기로는, 뮌제는 라파엘이 대공 부부에게 쫓겨나듯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했다. 사실 부친에게 들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부모님에게 혼나는 걸 자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서, 그것 역시 아마 그리 쫓겨난 것 때문이지 않을까 했다고. 눈치 보는 게 꼭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결국 폭발한 게 그날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 * *
바로 그날이 라파엘에게도 어떤 장벽이 무너지는 날이었지만, 뮌제에게도 그랬음이 틀림없었다.
그날부터 뮌제는 라파엘에게 조금씩 무언가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힘들다.’ 하는 간단한 넋두리에 불과했지만 그런 속내라도 털어놓기 시작했다는 게 중요했다.
태도도 점점 살가워졌다. 그래 봤자 서로 침묵하는 시간은 여전히 길었지만, 그건 서로가 함께하는 침묵이 서로에게 휴식이었던 덕분이다.
뮌제는 라파엘이 보는 데에서 바닥에 누워 다리를 바둥거리며 놀다가 종종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네가 있어서 내가 좀 숨을 쉰다.”
아이가 하기엔 거창한 말이었지만, 로헤올의 어린 후계자가 했다 하면 납득이 가는 말이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그 ‘숨을 쉰다’는 말이 후계자로서 성취해야 하는 과제가 막중하기에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전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쉽게 지나쳤던 일들이 이제는 이상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와 뮌제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윌리엄이 나타날 때.
“뮌제.”
서고에 들어온 윌리엄이 말간 얼굴로 뮌제를 부르면, 뮌제는 무얼 하고 있었든지 간에 윌리엄에게 대답하며 웃었다.
“아, 빌!”
“바빠? 같이 산책 갈 수 있어?”
“당연히 갈 수 있지.”
뮌제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며 바닥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던 애가.
그게 당연하다는 듯 놀라지도 않고 은은하게 미소한 윌리엄은 라파엘에게 사과했다.
“미안, 라파엘.”
그제야 뮌제도 라파엘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라파엘의 존재를 망각했던 것처럼 굴었다. 윌리엄의 앞에서는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반드시.
뮌제는 살짝 웃으며 라파엘에게 사과했다.
“미안. 오늘은 못 놀겠다. 다음에 만나자.”
“괜찮아. 가 볼게.”
라파엘은 순순히 그 자리를 피해 주었다.
이러한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이제 뮌제가 라파엘에게 몹시 살갑기 때문이었다.
전에야 그리 친하지 않은 라파엘보다는 당연히 가족이 우선일 거라 생각해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관계가 정말 많이 나아진 지금도 이러는 건 이상했다.
뮌제는 윌리엄에게 정말 유난하게 굴었다.
“뮌제. 동생을 사랑해?”
“사랑해. 온 마음 다해. 나보다도 더.”
뮌제에게 물으면 대답은 툭 튀어나왔다. 일순도 망설이지 않고 뮌제는 대답했다.
친구를 놀려 보겠다며 뜸 들이는 장난도 치지 않았다.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꼭 세뇌된 것처럼, 뮌제는 윌리엄에 대해서라면 간단한 대답조차도 유난하게 했다.
뮌제에게 일 순위는 항상 윌리엄이었다.
윌리엄과 라파엘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뮌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윌리엄을 선택할 것이다.
[난 윌리엄을 지키기 위해 마련된 수단이야. 그분들 앞에서 난 인격이 없어.]
부모님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서, 윌리엄에게는 왜 이렇게…….
윌리엄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뮌제는 서고에서 나가기 직전, 윌리엄이 보지 않는 사이 휙 라파엘을 돌아보았다. 뮌제는 그제야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라파엘이 아는 뮌제의 표정을.
미. 안.
라파엘은 입모양으로 사과하는 뮌제를 위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뮌제는 그걸 보고 씩 웃고는 바로 윌리엄을 쫓아갔다.
* * *
어느 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말다툼을 했다.
그는 뮌제에게 윌리엄에게 왜 그리 몸을 낮추느냐며 물었고, 뮌제는 윌리엄이 사랑스럽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거기까지는 평범한 분위기였다.
“정말 사랑스러워?”
라파엘이 그렇게 물었을 때 분위기는 무너졌다.
슬쩍 지었던 미소가 뮌제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살얼음이 덮인 표정으로 뮌제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되지도 않는 걸 왜 묻지?”
“…….”
“예의를 지켜. 에흐베가 감히 내게 뭘 묻는 거야.”
뮌제가 알게 모르게 라파엘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이 그 말에서 드러났다.
제국 온느발레의 로헤올 공작 가문. 대공국에 ‘불과한’ 에흐베.
온느발레의 귀족들이 타국에게 가지고 있는 그 가치관.
온느발레로 온 이래 라파엘은 다른 어른 귀족, 아이 귀족에게서 여러 번 그 가치관에서 비롯된 언행을 당했다. 그들이 라파엘을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그들이 그렇게 배우고 자라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뼛속까지 온느발레인이었다.
그래서 라파엘은 뮌제를 참 신기한 아이라고 느껴 왔었다. 라파엘을 에흐베 사람이라는 이유로 낮추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교류해온 지 몇 년이 지나도 좀처럼 그런 모습을 보인 적 없던 뮌제는 이날 라파엘을 낮추었다.
그래. 이게 정상이라면 정상이었다.
온느발레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자랐다면, 이 태도가 정상이었다.
라파엘은 오늘에서야 드러난 뮌제의 이 태도를 마음 아프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을 제외하고는 뮌제는 여태 라파엘을 단 한 번도 ‘제국인이 아닌 자’로 무시한 적이 없었다.
진심이 이랬다 하더라도, 그녀는 어린 나이부터 정말 많이 노력해 왔다.
정말 많이.
“미안해.”
라파엘은 네가 걱정되어서 물었다는 변명도 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사과했다.
뮌제는 분을 참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떨다가 그에게서 등 돌렸다. 그녀는 그대로 그 방을 나섰다.
에흐베의 대공자는 조금 시차를 두고 방에서 나와, 뮌제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뮌제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가 머무는 저택을 떠났다.
라파엘은 계단 위의 문에서 뮌제가 탄 마차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
바깥의 뮌제는 자신이 로헤올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어린 나이임에도 차분했고, 예의 발랐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실수를 했더라도 아주 큰 실수가 아니라면 느긋하게 용서해 주거나, 뜬금없이 자신의 잘못으로 돌려 상대가 마음에 짐 지지 않도록 배려했다. 바깥의 뮌제는 그렇게 하고도 항상 우월했다.
최상위 지배자가 될 사람의 여유였다.
그 여유를 뮌제는 방금 잃었다.
단 한숨도 참지 못하고 왈칵 분노한 것이다.
라파엘은 뮌제의 그 매서운 반응이 어떤 방어기제 같다고 느꼈다.
다시는 그 질문을 하지 않으리라.
그는 뮌제가 다시 오늘처럼 괴로워하기를 원치 않았다.
로헤올의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도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들어왔다.
두 존귀한 소년 소녀가 처음으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헤어졌다는 건 그가 머무는 저택의 사용인들 전부가 알았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라파엘은 그날 저녁부터 앓기 시작했다.
* * *
일주일간 라파엘의 상태는 적당한 빠르기로 차근차근 악화되었다.
그 일주일, 뮌제는 단 한 번도 라파엘을 찾아오지 않았다.
보고 싶다고 편지를 썼지만 뮌제는 오지 않았다. 힘없는 손으로 쓴 그 짧은 글은 애초에 이 저택에서 벗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프다.
힘이 들었다.
온기가 그리웠다. 제발. 뮌제.
고열에 들뜬 신음 사이로 간구했다. 뮌제. 제발.
“…….”
그때, 이불 위에서 덜덜 떨고 있는 손을 누군가가 잡았다.
구색을 맞추기 위한 최소한의 간병만 받고 있어, 일주일 동안 누구도 그를 위로해 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건 누구인가. 열 때문에 살갗이 예민해져서 그 온기가 따끔따끔거렸다.
그런데 그에 그치지 않고 라파엘의 이마에도 손이 올라왔다.
땀에 젖은 이마에는 물수건조차 올려져 있지 않았다.
라파엘은 무거운 눈꺼풀을 올렸다. 뿌옇게 안개가 낀 시야에 찬란한 금발이 걸렸다. 뮌제는 그가 눈을 떠서인지 가만히 말했다.
“처음엔 감기라길래 다 나으면 오려고 했는데…….”
“…….”
“이젠 뭐, 알 수 없는 병이라더라. 그래서 왔어.”
“뮈……. 뮌, 제…….”
열에 들뜬 눈물이 흘러내렸다.
뮌제는 이마를 덮고 있던 손으로 라파엘의 관자놀이를 슥슥 닦아 주었다.
“조용히 해야 해. 몰래 들어왔어.”
“보고 싶었어…….”
“나도.”
부드럽게 말한 그녀는 바로 입을 비죽거렸다.
“바보야? 보고 싶으면 말을 했어야지. 그럼 더 빨리 왔을 거 아니야.”
“…….”
“약은 먹었어?”
“뮌제…….”
“응.”
“…….”
말할까.
알 수 없는 병?
아니다.
살인이었다.
차라리 단숨에 죽여 주시지.
아버지. 차라리 단숨에 죽여 주시지.
라파엘은 다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 죽여 흐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