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베렐의 손을 주무르는 손길에 아주 잠시 강한 힘이 들어갔다. 점점 주위에 덮인 눈과 같은 안색으로 변하고 있는 베렐은 힘없이 하늘을 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티팩트로는 파훼가 안…….”
“안 된다고 하기보다는, 글쎄,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는 편이 좋겠네.”
“…….”
“무슨 마법을 파훼할 정도로 많은 힘을 부은 아티팩트를 만들 마법사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 많은 힘을 가지고도 부서지지 않을 아티팩트를 만드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서.”
“……대공께서…….”
기사의 숨이 넘어간다.
바로 직전까지 그럭저럭 대화를 나누어갈 수 있었던 힘이 단숨에 소훼된 것처럼.
뮌제는 상체를 조금 더 굽혔다. 머리가 흰 기사의 손을 주무르던 두 손 중 한 손을 들어 기사의 이마와 머리를 쓸었다.
베렐의 눈동자가 쉼 없이 흔들렸다. 초점을 잃어 가는 눈이지만 그 안에서도 어떤 의지가 보였다. 뮌제의 조부, 뮌제의 부친, 뮌제로 이어지는 세 공작을 모셔 온 기사.
뮌제가 살기를 바라서 그녀에게 항명하였던 기사.
라파엘을 그녀에게로 인도하였던 기사.
“각하를 살리…….”
“…….”
“사셔야…….”
이 사람을 실없는 대화로 더 붙잡아 둘 수 없음을 직감했다.
뮌제는 기사의 손을 더 주무르지 않았다. 그저 힘주어 지그시 잡았다.
“어떻, 게든……. 사셔야…….”
“그래. 약속하겠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아마 죽어 가고 있는 것 같은 시간에 하기에는 비현실적으로 낙관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베렐은 주름진 입가로 웃음을 그렸다.
“마지막까지……. 모, 모실 수……. 있어서…….”
“경의 마지막 주군이 되어 영광이네.”
주군은 부드럽게 치하했다.
기사의 마지막 호흡은 특별히 크지도 특별히 작지도 않았다. 어느 한숨이 평범하고 조용하게 빠져나갔고, 더 이상의 숨은 없었을 뿐이다.
뮌제는 무거워진 손을 기사의 몸 옆에 고이 내려놓았다.
“…….”
잠시 기사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전 공작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렐의 검도 한 손에 잡았다.
방금 기사를 잃은 사람이 타국의 귀족을 돌아보았다. 엘르시어는 묵묵히 그 시선을 마주했다.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그런데 뮌제가 차분하게 말했다.
“답답했을 텐데 옆에서 기다려 주어 고맙습니다. 이제 주변을 살펴봅시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돌렸다.
누워 있는 기사의 곁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던 뮌제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엘르시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기사의 시신을 일견했다.
혼자 죽게 두지 않으려고 했었나 보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았었나 보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눈을 밟으며 걸어가는 전 공작에 따라붙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뮌제는 그가 자기 옆에 도달하자 입을 열었다.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건, 제가 여기가 어딘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예?”
“여기.”
그녀가 그의 팔꿈치 부근을 잡고 옆으로 툭 끌었다. 그리고 멈췄다.
그에게서 손을 뗀 뮌제는 아까 유심히 보던 부근의 나무부터 시작하여 오른쪽까지 둥글게 호를 그리며 손가락질했다. 그녀는 말했다.
“내가 죽은 곳입니다.”
엘르시어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알아듣지 못했다. 손을 내린 뮌제는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폭사하여 죽은 곳입니다.”
“공이……. 이곳이 온느발레란 말씀이십니까?”
이해한 그의 눈이 커졌다.
눈 덮인 길을 응시하고 있던 뮌제는 그 목소리를 들고 낮게 웃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휘어진 눈으로 엘르시어를 보았다.
“지금의 계절에 이곳에는 눈이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안 겁니다.”
“…….”
“여긴 나와 베렐 경과 관계있는 곳이지만, 황제와 관계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 마법 때문인지 황제의 아티팩트 때문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겠고요.”
“아.”
“만약 내 마법 때문이라면, 내 마법에 다른 마법이 간섭했기 때문일 겁니다.”
“마법이?”
“예를 들면 당신이 가진 왕의 반지.”
그 말을 하며 뮌제는 엘르시어가 반지를 넣은 상의 겉옷 주머니 쪽을 보았다. 거기에 넣는 걸 보지 못했을 텐데도 시선은 정확했다.
뮌제는 그 직후 자신의 타이 핀을 매만졌다.
“혹은 이것.”
엘르시어는 탑의 학자들을 제외하면 각국 왕실에서만 가져야 하는 아티팩트를 어째서 그녀가 가지고 있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유감이지만, 내가 보기에 당신이 가진 반지보다는 황제의 그 관이 더 강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보호받지 못했던 거고.”
“그럼 그 핀은 어떻습니까?”
“간직한 마법 자체는 황제의 관보다 강합니다. 보호 마법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만.”
“그렇다면 공의 그 핀이 간섭했을 확률이 높군요.”
“그래요. 정말 마법이 간섭한 거라면.”
뿌연 입김이 번졌다.
이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뮌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엘르시어도 그녀를 따라 하늘을 보았다. 눈꺼풀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산길에는 한동안 정적만이 흘렀다. 눈송이가 눈 위에 사각, 떨어지는 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리는 듯도 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뮌제는 입을 열었다.
“……그날, 이야기를 허락한 두 번째 이유는.”
“…….”
엘르시어는 점점 하얘지는 목소리를 듣고 그녀를 보았다. 긴 입김을 흘린 뮌제도 엘르시어를 보았다.
“당신의 이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
“내가 내 이야기를 당신에게 허락했으니, 후작도 후작의 이야기를 내게 주었으면 합니다.”
“…….”
“당신의 이야기를 당신과 마주 본 상태에서 당신에게 듣고 싶습니다. 마침 우리는 죽어 가는 중일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럼 마지막 기회인 것 같아서.”
“무슨 이야기를 원하십니까.”
그건 허락이었다.
뮌제는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처럼 항상 웃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속을 알고 싶었습니다.”
엘르시어는 그 말을 듣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 반사적인 웃음을 본 뮌제는 한 차례 더 짙어진 웃음을 지었다가 풀고는 말을 이었다.
“정말 웃고 싶은 건지. 내가 싫어 죽겠는데도 숨기고 웃는 건지. 왜 내게 화 한 번 내지 않는 건지. 화내야 할 상황인데도 웃는다면, 그건 속을 숨기는 게 분명한 것 같은데, 그럼, 날 증오하는 것도 숨기고 있는 건지. 얼마나 무리하고 있는 건지.”
“…….”
“날 죽이고 싶어 할 정도였다는 건 알았습니다.”
윌리엄 로헤올의 이야기였다.
[맹목적으로 사랑했지만 그런 상황이라 해서 윌리엄의 이면을 아예 보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그리고 나도 사람이라고.]
사람으로서 힘들어하고, 사람으로서 매정하게 윌리엄의 명예를 끌어내리는 말을 서슴지 않고, 사람으로서 이제는 버렸지만, 또한 사람으로서 뮌제는 여전히 윌리엄을 가슴에 얹어 놓고 있었다.
윌리엄이 그녀 가슴에 맺혔다.
한이었다.
일레인이 불태워 읽지 못한 책 한 권. 그게 평생 가슴에 남아 있을 것처럼, 윌리엄 그 자체가 뮌제에게는 한 형태의 한이었다.
뮌제는 엘르시어에게 답변을 들어도 한평생 놓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물었다.
“당신은, 죽은 누이동생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
엘르시어의 역린을 물었다.
“죽은 당신 여동생. 마법사였던 동생.”
* * *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엘르시어는 얼어붙은 입으로 천천히 반문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제이 왕자가 온느발레에 있을 때, 내가 은여우단의 기사를 살려서 귀국시켰던 적이 있지요. 그때 그 기사를 살려 보낸 이유 중 하나가 당신이었습니다.”
“예?”
그럼 로헤올 공작으로 건재할 때부터 이미 엘르시어를 알고 있었단 말이다.
충격을 받은 그는 마치 마비된 것만 같이 뻣뻣한 손을 들었다. 차가운 얼굴을 한 번 훑어내리자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우연이었습니다. 내가 쫓고 있던 마법사의 물건 중 하나가 아리오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았고, 그래서 은여우단에 관심을 가졌었거든요.”
“하지만 제 누이는 마법에 휘말려 죽었다고만 알려졌을 텐데.”
“당신의 누이가 꽤……, 장난스러운 마법사였던 건 압니까?”
순화한 표현이었다.
‘각국의 특수 수사기관 소속 공무원들이 이를 갈 만한 마법사였다’는 걸 극도로 순화한 표현.
알고 있다. 그의 죽은 여동생은 악독한 마법사였다.
엘르시어는 조금은 허탈해하며 대꾸했다.
“그리고 당신은 마법사에 대해서는 잘 아시는 분이시지요…….”
“나도 당신 누이동생이 어쩌다, 어째서 작고하였는지 정확한 내막은 모릅니다. 다만 동생이 마법에 휘말려 죽었다고 알려진 후에 당신이 은여우단의 단장이 된 것. 그건 정말 특이한 일이었어요. 클리포드는 본디 공작 가문이니까.”
“…….”
“당신이 군주에게 이리 예속되는 걸 공작이 허락했습니까? 클리포드는 아리오에서도 특히 긍지 높은 가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공작이면서 황제에게 예속되는 특수 수사기관의 장을 맡았던 사람이 이걸 묻는다.
따지고 보면 엘르시어는 아직 후계자일 뿐이라 가주인 사람보다는 행보의 무게가 가벼웠다.
[죽은 누이동생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조금 전 뮌제의 질문을 곱씹은 엘르시어는 잠시 침묵했다.
죽어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지금.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의 입술 사이로 희부옇게 입김이 번졌다. 그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되는 것이다. ‘당신처럼 항상 웃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속을 알고 싶었습니다.’
정말 웃고 싶은 건지.
후작은 손을 들어 미소 없는 입가를 한차례 쓸어내렸다. 그는 한숨 섞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부친이 크게 반대하긴 하셨었습니다.”
“한데?”
“제게 은여우단을 맡기겠다는 영을 이미 전하께서 발표하신 후였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에 뮌제가 입꼬리를 올렸다.
“먼저 저지르고 나서 후에 부친에게 말했다고요?”
“미리 말씀드려서 좋을 게 없으리라는 건 빤히 보였습니다.”
“후작. 이런 말은 실례지만, 당신, 장난꾸러기였군요.”
그 말에 엘르시어도 미소했다.
“지금과 별다를 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글쎄, 아닐 겁니다. 에흐베 대공만 해도 내가 기억하는 그와 그가 기억하는 그는 조금 다른 구석이 있어요.”
“…….”
“왜 은여우단을 맡았습니까?”
조금 풀린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물었다. 그리고 그건 뮌제의 첫 질문에서 이어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마법사였던 죽은 누이동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째서 은여우단을 맡았나.
소복소복 눈이 쌓인다.
얼굴과 입술에 눈송이가 닿고 닿았다. 엘르시어는 사각거리는 찬 것을 맞으며 입을 열었다.
“동생 때문입니다.”
뮌제의 눈동자가 살짝 흐려졌다. 그 눈을 보며 후작은 마찬가지로 흐린 표정을 지었다.
알 것 같았다.
당신도, 동생 때문에 루미나리에단을 맡았었던 모양이다.
마치 얼음 조각이 끼기 시작한 것처럼 목이 버석했다. 춥다. 이미 얼음장이 된 손을 가볍게 쥐었다. 몸을 감싼 통증은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뮌제는 내색하지 않고 잠잠히 들었다.
“그리고 그건 제 이유도 되고, 제 부친의 이유도 되고, 제 모친의 이유도 되어서. 그래서 제 부친도 결국에는 허락하시고 영지에 머물러 계십니다.”
“…….”
“제 동생이 선하지 않은 마법사이긴 했으나, 그래도 제 동생이었고, 부모님의 자식이었습니다.”
엘르시어는 자신이 한 말이 곧바로 저를 관통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아마, 뮌제 역시 관통했다.
자기 손으로 동생을 죽인 전 공작이 어떤 숨을 삼켰다. 몸이 한 번 들썩거렸다.
뮌제와 비슷하게, 엘르시어는 살아 있던 누이가 죽는 모습을 목격했던 오라비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누이가 몸의 반이 날아가며 죽는 모습을.
여기 서 있는 두 사람은 형제의 뜨거운 피를 온몸으로 맞은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