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일단…….”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뮌제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사과부터 하겠습니다. 말려들게 해서 미안합니다.”
“…….”
“사적인 대화를 나눌 건데도 황제가 당신을 나가지 못하게 할 때부터 짐작하긴 했습니다. 어차피 죽일 거니 들어도 상관없었다는 뜻이었겠지요. 어차피 당신도 언젠가는 해할 생각이었을 테니.”
“황제가 저를, 말씀이십니까?”
예상치 못했던 말에 엘르시어는 의아해했다. 뮌제는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기억합니까? 내가 후작에게 윌리엄에 대해 이것저것 말했던 날. 산책하면서.”
“아……. 예. 기억합니다.”
“그날 당신이 내게 물었던 게, 왜 그런 이야기를 허락하였느냐는 거였어요. 그것도 기억합니까?”
“……예.”
엘르시어는 불길한 느낌을 받으며 대답했다. 뮌제 로헤올이 아니라 위즈 스미스를 대할 때처럼 스스럼없는 불길함이었다.
뮌제는 거기에 대고 정말 위즈가 지을 만한 미소를 지었다. 엘르시어의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이유가 두 개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때 황제의 사람이 가까이에서 따라오고 있었거든요.”
“…….”
“내가 그런 이야기를 황제도 대공도 아닌 사람에게 했다는 사실은 황제를 도발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문제가 있다면, 음, 당신이지요.”
엘르시어는 이를 꽉 윽물었다가 놓았다.
“전 영문도 모르고 당할 뻔했다는 말씀이시군요. 심지어 제가 위험하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후작에게 귀띔을 해 주자니, 그, 음, 황제가 당신을 노리지 않을 수도 있어서. 그렇게 되면 내가 후작에게 미리 말해 준 게 긁어 부스럼이잖습니까.”
“…….”
그는 결국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위즈가 아니라 뮌제였다. 직전에 느낀 스스럼없는 불길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버릇처럼 짓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뮌제에게 물었다.
“저희는 죽은 겁니까?”
뮌제는 태연하게 엘르시어를 긁었었음에도, 미소와 함께 아예 말을 돌려 버린 엘르시어를 잠깐 살폈다.
엘르시어는 그 연회색 시선을 묵묵히 견디며 기다렸다.
어째서인지 잠시 후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린 뮌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묻기 전에 뮌제는 대답했다.
“사실 나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를 모르겠네요. 이러려던 게 아닌데.”
약간 가벼운 감이 있었던 어조는 사라졌다. 일부러 넣은 것 같았던 음 따위의 감탄사도 더는 끼워 넣을 것 같지 않았다.
이쪽이 엘르시어가 틈틈이 겪어 왔던 뮌제 로헤올이었다.
다만, 도로 차분해진 언어와는 별개로, 그녀는 여전히 그저 난처해 하는 기색을 보이는 것에 그쳤다.
넓은 반경으로 움직여 주변을 탐색해 볼 생각도 없는 듯 보였다.
혹시 이미 포기한 걸까.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엘르시어가 생각에 잠긴 사이, 힘이 많이 빠진 목소리가 발치에서 올라왔다.
“각하.”
뮌제는 멀리 눈으로 덮인 앙상한 나무들 사이를 응시하고 있던 눈을 돌렸다. 부상으로 인해 열에 들뜨기 시작한 기사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금세 심각해진 얼굴로 그에게 집중했다.
몸을 굽힌 전 공작이 물었다.
“경. 왜 그래. 아픈가?”
“그게 아니라…….”
약간 쉰 목소리 사이사이로 색색거리는 숨이 새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하여 말씀을, 올리는 건 아니지만.”
“그래.”
“이곳이 아티팩트의 어딘가든, 호문클루스의 어딘가든, 어찌 되었든 마법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까?”
“마법과 관련된 건 맞지.”
주군의 답을 들은 베렐은 힘겹게 침을 삼켰다.
“그 마법을……, 파훼하실 수 있으신지요.”
“아.”
그 외마디 소리를 흘린 뮌제는 어째서인지 고개를 젖혔다. 잠시 하늘을 보던 그녀는 다시 베렐에게로 눈을 내리고 말했다.
“무얼 시도하려 하든 지금 내 상태로는 무리일세.”
하기야 그가 생각해 본 방안이라면 그의 주군께서는 당연히 생각해 보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으셨던 까닭이 이랬던 것이다.
베렐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던 뮌제는 어째서인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 때문에 옷이 젖을 텐데.
그러나 전 공작은 그런 부분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베렐의 피 묻은 왼손을 들어 올려 두 손으로 감쌌다. 마디 굵고 두터운 기사의 손을 그녀는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베렐은 이 친밀하다 못해 황송한 접촉에 당황했다.
그대로 뮌제는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실은 공간을 이동한 건 내 마법일 수도 있어.”
“예?”
베렐뿐만 아니라 엘르시어까지도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런데 내가 우리를 옮기려고 했던 장소는 여기가 아니거든. 여기가 어딘지를 모르겠어.”
“그럼 그건 저희가 아티팩트에게 잡아먹힌 게 아니라는 겁니까?”
듣고 있던 엘르시어가 다급하게 묻자 뮌제는 그를 올려다보고는 미소했다.
“그걸 저도 모르겠습니다. 황제가 쓴 아티팩트가 무슨 아티팩트인지를 모르니. 잡아먹힌 것일 수도 있고요.”
“…….”
“그런데 분명한 건 현실은 아니라는 겁니다.”
“…….”
“경우의 수를 전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렇게 현실 아닌 곳으로 이동했다는 건 결국에는 공간과 관련된 마법이 있다는 거고, 우리는 그 마법이 발동한 영역 속에 있다는 겁니다. 아니면 마법 그 자체의 속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마법의 속…….”
엘르시어가 중얼거리자 뮌제는 대꾸했다.
“막연하지요.”
“…….”
“물리적인 영역 안에 있다면, 그래, 맞네, 경의 말대로 마법을 파훼할 수 있어. 그런데 마법 속에 있다는 건 그 개념 자체도 너무 막연해서 나도 사실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일세. 지금 처음으로 생각해 보는 개념이기도 해서.”
“…….”
“나도 지금 이 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네.”
뮌제는 순순히 부지不知를 인정했다.
엘르시어는 기사의 손을 계속해서 주무르는 전 공작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뮌제는 계속 베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물론, 여기가 물리적인 영역 속이든 마법 속이든, 일단 마법을 파훼할 시도든, 다시 이동 마법이든 무엇이든 해 보는 게 좋긴 해.”
“…….”
“그런데 주군된 자로 경 앞에서 인정하기에는 많이 민망하지만, 내 상태가 좋지 않네.”
“아니…….”
“건강이 좋지 않고 호문클루스도 없어. 미지의 것을 시도할 힘이 충분하지가 않네. 한 번 정도 시도해 볼 수야 있겠지만 그게 끝일 걸세. 그러니 신중해야 해.”
이동 마법을 사용해서 통할 공간에 있는 건지, 아니면 파훼만이 방법인 공간에 있는 건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만약 파훼해야 하는 공간에 있다면, 이동 마법을 한 번 시도하는 것 자체가 괜한 낭비였다. 뮌제의 힘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무얼 하든 신중해야 했다. 파훼 마법은 힘 한 방울, 한 조각이 아쉬운 마법이기 때문에.
마법을 파훼한다는 건, 그 근본을 따지자면 결국 파훼 대상 마법보다 강한 힘을 퍼부어서 마법을 깨뜨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파훼 마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강한 마법사가 마법을 파훼할 작정으로 힘을, 자기 생명을 퍼붓는 것이다.
그래서, 곤란한 상황에 빠진 마법사들도 어지간해서는 어떤 마법을 파훼하는 건 하지 않으려 했다. 괜한 생명력을 재미없게 파훼하는 데에 쓰느니 차라리 다른 마법을 시동하는 데에 써서 그 곤란함을 헤쳐 나오는 편이 나으니까.
뮌제는 어떻게든 의식을 차리고 있으려 애쓰는 기사를 들여다보며 미소했다. 차가워지는 그의 손도 계속 주물렀다.
노년의 기사는 갸륵하게도 숨을 헐떡거리며 물었다.
“그럼 제가 해볼 수 있는 건 없겠습니까……?”
“마음은 갸륵하고 고맙지만, 마법은 마법사만이 사용할 수 있고, 파훼 역시 마법사만 할 수 있네.”
“아.”
이해했다는 듯 침통하게 눈이 감겼다. 거의 다 내려갔던 눈꺼풀은 어느 순간 번쩍 뜨였다. 베렐은 그렇게 멈칫했다.
뮌제는 그 유난한 반응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주무르고 있는 손의 손끝이 살짝 구부러졌다. 기사는 주군의 손을 잡으려다 주춤한 것이다. 주저하던 베렐이 물었다.
“저……. 그럼, 그, 악마가 쓰는 그 마법도 그렇습니까?”
요술?
베렐이 엘르시어가 있는 자리에서 악마에 대해 말을 꺼낸 건, 부상 당해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탓이라고 납득했다. 윌리엄의 이름을 꺼내지만 않으면 괜찮았다.
갑자기 악마가 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뮌제는 대답했다.
“그걸 파훼하려면? 아마도 그렇겠지.”
악마의 요술에 마법으로 받아치기만 했을 뿐, 그것을 파훼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마법의 근원이 요술이니 마법과 같지 않을까 싶었다.
확신은 없이 대답하자, 베렐이 다시금 물었다.
“검……, 으로 마법을 파훼할, 수는, 없는 겁니까?”
정신을 차리고 있어 준다면 이런 질문에는 얼마든지 답해줄 수 있다.
뮌제는 조금은 재미있어 하면서 말했다.
“마법은 마법으로 파훼하는 걸세. 보통은 검으로는 안 되지.”
“그렇……지요……. 그렇지요, 역시…….”
이 반응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뮌제는 구별해 내지 못했다.
떨떠름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쩐지 안도한 것 같기도 하고. 기사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기사의 주군은 농담을 떨어뜨렸다.
“왜. 경이 검으로 시도해 보고 싶나?”
“…….”
“검으로 아예 안 된다는 건 아니야. 비마법사는 불가능하다는 건 같지만.”
여전히 경은 못한다고 희망을 없애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베렐은 자신에게 필요 없을 것들을 캐물었다.
“가능, 가능합니까?”
“가능이야 하겠지. 마법을 그냥 퍼붓는 게 아니라 검을 한 번 거쳐서 퍼붓는 거지. 검을 일시적으로 아티팩트로 만든다는 느낌으로.”
“그렇게……. 마법사가 그렇게 하는 일은 없습……니까?”
“글쎄. 없지 않을까. 쓸데없이 뭐하러 그러겠어.”
“…….”
“파훼는 마법을 퍼부어야 하는 것인데 마법을 실시간으로 어떤 다른 물건이나 사람을 거치게 하기는 까다로워. 그렇게 하려면 그냥 퍼붓는 것보다 더 섬세한 조절이 필요하여 번거롭고, 그 마법을 물건이나 사람이 과연 버틸지도 문제일세. 마법사들이 굳이 그리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하면, 꼭 검이 아티팩트처럼 보여서……. 아티팩트로 파훼한 것처럼, 그리 보여서……. 자신이 마법사인 걸 숨기려고…….”
더듬더듬 말하는 모양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지금 당장 급하게 떠올리는 이유인 듯했다.
이제는 이 상황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하나하나 문장을 포개고 포개어 대화를 여기까지 끌어오는 게 여간 자연스럽지 않다. 뮌제는 살짝 웃었다.
“나 같은 사람이 특이한 경우지. 보통은 자기가 마법사인 걸 숨기려고 안 해.”
그 말에는 엘르시어도 말없이 동의했다. 그 마법사들 때문에 죽도록 고생해 온 특수 수사기관의 장으로서.
“그리고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정말 어지간히 강한 마법사가 아니고서는 굳이 그런 짓을 할 것 같진 않네. 그렇게 하고도 마법을 파훼할 자신이 있지 않고서야.”
“…….”
뮌제 정도로 강한 마법사를 말하는 것이다.
마법사는 선천적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마법사의 능력도 어느 정도는 선천적으로 결정된다.
여태 호문클루스 없이 마법을 쓰느라 그만큼 생명력이 사라져서 건강도 이 모양이지만, 사실 지금이라도 호문클루스를 만든다면 그녀는 생명력에 대한 걱정 없이 금세 그 어떠한 강한 마법이라도 쓸 수 있었다.
괜히 악마가 그녀를 삼키려 했던 게 아니었다.
실로 역겨운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