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91)화 (91/120)

# 90화

세 사람에게 박히려는 모든 침이 검은 재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거기까지 겨우 삼 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못한 베렐과 엘르시어가 뮌제의 팔을 뒤로 잡아당겼다.

세 사람은 뒤로 넘어갔다.

그 순간 뮌제의 한쪽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세 사람이 전부 사라졌다.

황제는 서서히 미소를 지웠다.

이건 또 뭔가.

그녀의 눈앞에서 죽어야 하는 이들이 사라졌다. 나네트가 본 거라고는 뮌제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붉은 피뿐이었다. 무기질적인 눈동자는 세 사람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고 응시하고 응시하였다. 죽였나. 죽이지 못했나.

금색 눈동자는 세 사람에게 박히지 못한 침 수백 개가 박힌 벽과 바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당신은 항상 남의 손을 빌려 원하는 걸 이루던 사람이니, 이번에야말로 한 번쯤은 직접 움직여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내 손으로 직접 그대를 죽일 생각이었어, 공작.

죽였다면 좋고, 혹시 죽이지 못했다면 후에 죽이면 된다. 아리오에 오기 전에 아티팩트가 되었던 더러운 관이 황제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관을 잃은 황제는 조금 더 그대로 있다가 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에흐베의 기사들은 황제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공격보다는 제지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즉시, 몸을 숨기고 있던 황제의 기사들이 그 검을 쳐내거나 막았다. 황제가 가는 길은 누구도 막지 못한다.

그럼에도 황제는 멈추었다.

그 존귀한 이는 온느발레의 기사를 경계하고 있는 자들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뮌제의 기사들은 죽거나 부상당한 상태다.

“에흐베의 기사인가.”

“…….”

“그리 자신만만하더니 대비가 부족했네, 대공. 가까스로 찾은 그 사람을 다시 잃었으니 이제 어찌할까.”

바닥에 흩뿌려진 수많은 금침과 은침을 구둣발이 지그시 밟았다. 서점 한가운데에 나타난 에흐베 대공을 향해 황제는 부드럽게 조롱했다.

기사들의 보고를 받자마자 온 라파엘은 그 조롱을 들으며 몸을 굽혔다. 그는 뒹굴고 있는 관을 들어 올렸다.

정신이 나간 걸까.

라파엘은 가만히 손안의 아티팩트를 내려다보기만 하였다.

그 모습을 보는 나네트의 눈이 아주 조금 감겼다.

나와 그대.

한 국가의 절대자이면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보내도 응답받지 못하는 모습이 어찌 이리도 닮았는가.

보내는 마음이 같은 종류의 마음은 아닐지언정, 도착지는 같은 사람이었다.

뮌제 로헤올. 친애하는 사촌 언니. 너무도 존경하고 사랑하였던 내 언니…….

황제는 이제는 죽어 버린 뮌제를 떠올리고는 문득 미소했다.

뮌제 로헤올이 아니었더라면 저 남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또 한편으로는 질투하게 될 일이 있었을까.

황제는 고개를 돌렸다. 낡은 나무 문을 직접 열고 싶지 않아서 눈짓하자, 온느발레의 기사 하나가 나무 문을 열었다.

짙게 무감정한 음성이 울린 건 바로 그때였다.

“잠시.”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어느 한쪽의 기사들 전부의 목이 떨어져 내렸다.

에흐베의 기사들이 아니라, 온느발레의 기사들의 목이.

황제의 기사들이.

퍽. 퍽. 무거운 머리들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피가 분수처럼 솟아 서점 사방을 적셨다.

문을 잡고 있던 손이 사라지니 문이 다시 닫혔다. 그러나 그 사이로 황제는 제 정부의 경악한 눈을 분명 보았다. 닫히며 문이 가져온 바깥바람이 훅 불어 왔다.

겨우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자들의 따뜻한 피를 맞은 황제는 피가 식었다.

붉은 게 눈앞을 가렸다. 속눈썹에 맺혔다가 뚝뚝 떨어지는 것들이 온통 붉었다.

에흐베의 기사들은 검을 내린 채로 주군의 곁으로 물러섰다. 그들의 검은 이 밤에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

손을 들어 눈가를 훑은 황제는 대공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이 창백하게 찬란한 빛을 발했다.

에흐베 대공은 관을 든 채로 황제를 보고 있었다.

뮌제 로헤올과 같은 연회색 눈동자는 차분하게 서리 얼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기사 넷의 목숨을 잔혹하게 앗은 자는 그대로 황제를 보다가 문득, 입꼬리를 올려 부드럽게 미소했다.

생애 처음으로 잔혹함을 당한 황제의 눈이 떨렸다.

피범벅으로 서 있는 이에게 에흐베 대공은 말했다.

“오늘 오후 제가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상황을 이리 처참하게 만들었으면서도 정중했다.

까딱하면 돌아 버릴 남자.

황제는 자신이 했던 평가 그대로인 남자를 이 순간 앞에 두고 있었다. 피로 젖은 바닥에 톡, 톡, 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름 끼치는 소리 속.

대공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지금 당신을 죽이지 않는 건 당신이 살아서 고통받기를 원해서입니다.”

황제의 속눈썹 위에서 핏물이 떨어졌다.

“경. 폐하와 백작을 왕궁까지 모셔라.”

“예.”

“그럼, 작고하셔야 할 날에 뵙겠습니다.”

대공의 눈짓을 받은 에흐베의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기사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고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제는 두려움에 굳어 멈춰 있지도, 공포에 질려서 주저앉지도 않았다. 기사가 문을 열자 황제는 제 발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걸 보아하니 저 벌벌 흔들리는 걸음이 황제의 마지막 자존심인 듯했다.

나머지 기사들은 눈치껏 몸을 숨기고 서점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라파엘은 뮌제가 갈아입고 놓아 둔 피 묻은 셔츠와 겉옷을 잠시 보았다.

“…….”

관을 잡고 있는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분노였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다시 눈 떴을 때, 대공은 더 지체하지 않았다.

* * *

“으…….”

옆에서 베렐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지금 세 사람 중 가장 제정신인 엘르시어는 이곳이 얼숍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리 온통 눈으로 덮인 곳은 얼숍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여기는 양 옆길이 앙상한 나무들로 우거진 산길로 보였다.

주저앉아 있던 그는 자신의 앞에서 움직이지 않으려 했던 사람의 팔을 놓았다. 가만히 호흡했다. 하얀 입김이 보였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는 뮌제는 엘르시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피가 흐른 눈을 찡그리고 있는 그녀는 전반적으로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엘르시어의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사람의 표정이다. 잠시 기다리던 그는 누워 있는 이에게 말을 걸었다.

“눈에서 피가 납니다.”

마치 전에 그가 위즈에게 했던 것처럼.

다만, 그럼에도, 이 사람이 뮌제 로헤올인 건 잊지 않아서, 온느발레어로.

그 잔잔한 말을 들은 뮌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움찔했다.

손을 들어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른 그녀는 바닥에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뮌제는 피가 묻은 손으로, 가슴에 박힌 침 하나를 뽑았다. 그걸 보지 못했던 엘르시어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거…….”

“이런…….”

뮌제는 하늘을 배경 삼아 유심히 침을 들여다보다가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용케 들은 베렐이 그녀를 불렀다.

“각하? 괜찮……으신 겁니까?”

“경.”

뮌제는 베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난 엘르시어는 뮌제가 베렐을 살피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그와 뮌제의 기사가 뮌제를 붙잡아 뒤로 당겼고, 뒤로 넘어간 직후 눈앞이 밝아지더니 이곳에 있었다.

설마 저 침에 휘말린 건가. 설마 미니를 삼켰던 것과 같이 사람을 삼키는 능력이 있는 아티팩트였을까.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는 그 위장에 해당하는 공간에서, 그러니까, 아티팩트가 먹은 사람을 보낸 공간에서 사람을 빼낼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엘르시어는 아직 쥐고 있던 손수건 속 반지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한숨을 흘렸다.

반지를 다시 손수건 안에 잘 감싸서 상의 겉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기사의 상태를 살핀 뮌제가 묻는 말이 들렸다. 그는 시선으로 주변을 한 바퀴 훑어 가며 대화를 들었다.

“혹시 경, 소지하고 있는 약 없지?”

“죄송…….”

“아니, 사과할 일이 아니지. 오히려 내가 고마워할 일일세. 이런 몸으로 달려드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뮌제가 부상 입은 기사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베렐의 셔츠를 벗게 한 그녀는 베렐의 검도 빌렸다. 붕대 대용으로 쓸 수 있도록 셔츠를 넉넉히 길게 찢은 뮌제는 엘르시어에게 손짓했다. 엘르시어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몸을 굽혔다.

전 공작과 후작은 기사의 복부를 임시 붕대로 감싸서 묶었다. 지혈을 위해서였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이게 다였다.

뮌제는 직접 손으로 눈을 쓸어 치워 낸 바닥에 베렐의 겉옷을 깔았다. 빨갛게 얼어붙은 손을 움직여 겉옷 위에 베렐을 눕힌 뒤, 그녀는 자기 재킷을 벗었다.

“각하. 아니, 그러지……, 그러지, 마십시오. 춥습니다…….”

베렐은 슬슬 혼몽해져 가는 중에도 그것을 사양했다.

셔츠 바람이 된 전 공작은 피식 웃었다.

“내가 얼어 죽을 것 같으면 돌려받을 테니 염려 말게.”

“감, 사합니다…….”

그녀는 기어이 기사에게 재킷을 덮어 주었다.

이제 그녀가 몹시도 추워 보였기 때문에, 엘르시어는 자신의 겉옷을 벗으려 했다. 뮌제는 그걸 보고 당연히 거절했다.

“됐습니다. 줘도 받지 않을 테니 후작이라도 입고 있어요.”

“…….”

그래서 엘르시어는 벗은 겉옷을 베렐에게 덮어주었다.

그 모습을 흘끗 본 뮌제는 무릎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찬찬히 눈길을 움직였다. 낯선 곳에 왔다면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게 가장 우선되는 일임에도 이제야 주위를 살피는 것이다.

뮌제 로헤올이 세계에서 가장 이름난 특수 수사단을 이끄는 가장 이름난 단장이었음을 생각하면, 이상하기야 했다.

전 공작의 옆에 선 엘르시어는 물었다.

“여기, 어딘지 아십니까?”

“글쎄요.”

뮌제는 난처해하는 얼굴로 대꾸했다.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는 게 아니라, 그저 난처해하는 것에 그치는 기색이었다.

물끄러미 그녀를 보던 엘르시어는 가만히 물었다.

“일전에 공이 말씀하시기를, 아티팩트의 위장에 해당하는 공간이 있다고 몇몇 학자들이 주장한다 하셨습니다. 여기가 그곳일 수도 있겠습니까?”

“어? 아……. 그래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대답에 성의가 없었다. 그녀는 아직 엘르시어를 보지 않았다. 눈 덮인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곳을 바라보다가, 턱을 매만지며 눈을 감았다.

기억을 더듬는지 눈가가 구겨졌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

무언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엘르시어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자 침묵했다. 대신 그는 조용히 뮌제를 눈에 담았다.

황제를 흡족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유지하였다는 갈색 머리카락. 이마. 갈색 눈썹. 내리감은 눈꺼풀. 속눈썹. 코. 뺨. 입술. 턱. 턱과 입가를 만지는 손끝.

황제를 아리오까지 불러들일 정도로 담대하고 강단 있는 사람의 외견을 눈에 담고 담았다.

[폐하. 전 당신과 더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 대화에서는 제삼자에 불과했었는데도 그 순간 황제의 표정이 읽혔었다.

[그런데 당신은 한 번 돌아봐 주기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심지어 알고 있었다면서.]

엘르시어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쓴웃음을 지은 그는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질식할 것 같았다. ‘사람을 잘못 봐서.’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던 구원자. ‘사람을 잘못 봐서.’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뮌제가 말문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