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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90)화 (90/120)

# 89화

일단의 일을 마친 그녀는 일어서서 앞섶을 아래로 당기며 매무새를 가볍게 다듬었다. 말이 없는 황제에게 뮌제는 차분하게 물었다.

“이 사람을 보고 아리오인들이 신고는 하지 않덥니까.”

“이 내가, 온느발레의 주인이 온느발레인을 심판한다는데 감히 아리오인이 끼어든단 말인가?”

황제는 픽 웃었다.

[……공작이. 말이지.]

[예. 제가.]

[윌리엄 로헤올을 죽인 것처럼.]

[그건 로헤올 내부의 문제입니다.]

오늘 아침 비슷한 논리로 뮌제가 황제에게 선을 그은 바 있었다.

뮌제 로헤올을 가볍게 조롱한 황제는 시선을 돌려 서점 건물 내부를 둘러보았다. 세상에 온느발레의 황제가 이토록 좁고 낡은 곳에 발을 들일 줄은 나네트 스스로도 몰랐다.

나네트는 우아하게 불쾌감을 나타냈다.

“참으로 누애하다. 이런 곳에서 지내다니 놀랍군. 그 로헤올 공작이 말이야.”

“그렇습니까? 전 이것도 과분하다 생각하였는데.”

뮌제는 선뜻 대꾸했다.

그리고 나네트에게서 몇 걸음 물러나 있는 남자에게로 눈을 주었다. 나네트의 어깨 너머로 뮌제와 눈이 마주친 황제의 정부는 온후한 미소를 지었다. 공작을 두려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뮌제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했다.

“백작. 여기까지 함께 오셨나.”

“…….”

백작은 묵묵히 고개를 까닥였다. 이상하게 여기는 척 말을 걸긴 하였으나 이 백작은 황제를 호위하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두 온느발레인의 얽힌 시선을 끊은 건 나네트의 손이었다.

“그만. 백작, 나가 있어.”

백작은 정중하게 대답하였다.

“예.”

“그럼 후작도…….”

“아니, 클리포드 후작은 남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뮌제가 엘르시어에게 손짓했으나 황제가 막았다.

“아. 혹시 온느발레어를 못 알아듣나? 공작, 그대가 후작에게 아리오어로 통역해 주는 게 좋을까.”

덧붙여진 그 말에 비로소 뮌제의 눈에 서늘한 빛이 서렸다. 온느발레어를 할 줄 모르는 귀족은 그 어느 왕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엘르시어는 그 우롱에도 평소처럼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알아듣습니다.”

황제의 정부가 서점에서 나갔다. 나무 문이 완전히 닫혔다.

문 옆의 벽을 비스듬하게 등지고 선 황제는 겨우 두어 걸음 앞에 서 있는 뮌제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짧게 숨을 털어 냈다. 장난도 여기까지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을 가진 이는 입을 열었다.

“자. 공작. 내가 왔네.”

하. 발밑의 베렐이 숨을 헐떡거렸다.

그러나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대가 감히 내게 장난치는 걸 받아 주고 이 내가 친히 왔어. 날 원한 까닭이 있겠지.”

“……있습니다.”

잠시의 침묵 끝에 뮌제가 목소리를 냈다.

엘르시어는 그녀에게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자리에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뮌제의 음성은 차분하고 덤덤했다.

황제는 여유롭게 뮌제를 기다렸다.

거기에 대고 뮌제는 말했다.

“제 용건은 거의 다 끝나 가는군요.”

“……거의 다 끝나 간다?”

“당신은 항상 남의 손을 빌려 원하는 걸 이루던 사람이니, 이번에야말로 한 번쯤은 직접 움직여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제의 표정이 굳었다.

“이런 곳, 당신이 질색하리란 걸 알았습니다. 발 디뎌본 적은 당연히 없을 테며 아마 본 적도 없을 테지. 그래서 더더욱 이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올 때까지.”

“…….”

“당신을 단 한순간도 흡족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머리도 이대로 두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툭 치고 손을 내렸다.

거기까지 말한 뮌제는 옅게 숨을 들이키며 턱을 들었다. 천장을 잠깐 보며 숨을 훅 뱉었다. 지친 숨이었다.

그녀는 다시 황제를 보았다.

“폐하. 전 당신과 더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

“당신이 모를 이유로 내가 절박했던 이곳에서 당신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황제를 도발하면서까지 타국에 불러들인 이유치고는, 너무나도, 정말이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사소했다.

발롬브로사가 이 대화를 들었다면 숨이 넘어갔을 게 분명할 정도로. 사실 엘르시어도 지금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직접 걸음해야 했던 황제는 더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래서 황제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게 다인가.”

“예.”

“날 여기까지 불러 놓고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라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지만, 뮌제는 입을 다물었다.

촛불 그림자가 진 뮌제의 연회색 눈동자를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뮌제는 끝끝내 침묵했다. 황제는 이를 악물었다가 놓았다.

“그래. 그럼 내 차례로군.”

황제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씨근덕거리려던 호흡을 잠잠히 재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눈앞에 뮌제가 있으니 더더욱. 만일 죽도록 어려웠다 하더라도 뮌제 앞이므로 황제는 어떻게든 해냈을 것이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뜬 황제는 천천히 미소했다.

분노라고는 눈 씻고도 보이지 않게.

재차 숨을 털어낸 그녀는 말문을 열었다.

“난 지금까지 살면서 아낀 게 별로 없었어. 그대도 알겠지만.”

사실 온느발레에도 관심이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뮌제도 모를 터다. 말한 적 없으니까.

그러나 그런 일부를 제외하면 황제는 많은 걸 뮌제에게 말했다.

그랬었다.

“내가 그대에게 말한 게 참 많아. 내 시종장보다도 그대를 더 믿었고, 내 시녀장보다도 그대를 더 믿었으니까.”

“…….”

황제는 발롬브로사를 만날 때에는 쓰고 있지 않았으나 지금은 쓰고 있는 백금의 관을 두 손으로 손수 벗었다.

가슴 앞에 관을 든 채로 나네트는 뮌제를 불렀다.

“언니.”

신분 차가 있고 입장 차가 있어서, 사적인 자리에서도 몇 번 불러 보지 않았던 호칭이었다.

그래서 더 아끼고 아꼈던 호칭이다.

이렇게 달고도 이렇게 쓸 수가 있나.

나네트는 뮌제에게 고백했다.

“난 그대가 정말 좋았어.”

“…….”

“내겐 그대밖에 없었어.”

부모에게 제대로 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성장했었다. 뮌제는 나네트의 숨통이었다. 비밀리에 사적으로 만날 때마다 뮌제는 참 다정했었다. 황제가 될 황녀와 공작 후계자의 사이라서, 후에는 황제가 될 황녀와 공작의 사이라서, 더 후에는 황제와 공작의 사이라서, 뮌제는 항시 나네트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지켰다.

그럼에도, 그래도, 사촌 동생이라고 뮌제가 틈을 보인 적이 있었다. 마치 윌리엄에게 하는 것처럼. 딱 한 번. 처음의 딱 한 번.

딱 한 번.

뮌제가 나네트의 머리를 쓰다듬은 횟수였다.

딱 한 번.

나네트가 세상을 기억하기 시작한 이래, 머리가 쓰다듬어진 총 횟수였다.

그 처음에 사로잡혀서 나네트는 여기까지 왔다.

“나도 그대의 동생이야.”

“…….”

“나도 그대의 가족이야.”

“…….”

“그런데 윌리엄에게서 눈을 돌리지를 않더군.”

사랑이 있었고, 증오가 생겼다.

아마도 순서가 그랬다.

이제는 인정하건대, 분명 순서가 그랬다.

나네트는 빙긋이 웃었다.

뮌제가 얼마나 가차 없는 사람인지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뮌제가 왕을 구한 게 꽤 특별한 일임을, 엘르시어 후작에게 곁을 허락했다 하는 게 상당히 특별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나네트가 아는 뮌제는 윌리엄에게 구 할의 마음을 집중하여 퍼붓고, 나머지 일 할을 신기하게도 라파엘 에흐베에게 허락한 사람이었다. 그 밖의 사람에게는 가차 없는 존귀한 이.

사촌 동생인 저를 돌아봐 주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나도 당신의 동생이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

“해줄 수 있었잖아. 가족이 특별한 거라면 나도 당신의 가족이잖아.”

이렇게 말하는데도 뮌제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다.

그래도 나네트는 말했다.

“그런데 가족인 내게는 눈을 주지 못하겠다면서, 에흐베 대공에게는 그리도 살뜰하더군. 에흐베에 가서 휴식할 시간은 있고 날 걱정할 시간은 없던가?”

“…….”

“내가 언니를 얼마나 동경하였는지 알아?”

나네트는 속삭이듯 말했다.

나네트는 뮌제의 언행을 부러 모방해 왔다. 황제의 본성은 실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사방이 다 의미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럼에도 다정한 척 사람들을 대했다. 그게 사람 부리기에 편해서? 아니다. 뮌제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뮌제가 아니었다면 훨씬 거친 방법으로 국정을 이끌었을 것이다.

괜히 왕국들이 황제를 폭군으로 생각하겠는가.

괜히 뮌제를 살해하겠다는 방법을 택했겠는가.

나네트의 성정은 딱 그렇게 메마르고 냉철했다. 그런데도 미소를 짓고 부드럽게 말하는 건, 다, 뮌제를 따라 했기 때문이다. 그저 때때로 미소 짓는 것뿐인 뮌제를 동경하고 동경하여, 이제 나네트는 거의 항상 미소했다. 거의 항상 미소하고 있던 윌리엄 로헤올처럼.

황제로서 내리는 결정의 매서움과 평소 생활 속 미소 사이의 차이는 그래서 나왔다.

나네트는 뛰어난 사람이지만, 처음 겪어 보는 감정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렸다.

결핍되어 있던 가슴에 오로지 뮌제만이 박혔다.

“너무 사랑했어. 언니가 너무 좋았어.”

“…….”

“그런데 당신은 한 번 돌아봐 주기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

“심지어 알고 있었다면서.”

뮌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가 돌아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현이다. 말해도 말해도 뮌제는 태연했다.

나네트는 웃었다.

“아까 대공과 만났어.”

“…….”

“언니, 그대. 날 제이 왕자와 비슷하다고 했다면서.”

뮌제의 무표정은 깨지지 않았다.

심지어 뮌제는 죄책감은 조금도 없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나네트의 말을 대신 이었다.

“예. 당신은 내게 바라는 게 너무 컸고, 나는 그걸 이루어 줄 여력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에게 바라는 게 너무 컸고 그 사람은 그걸 이루어 줄 여력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아까 대공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이었다. 정말, 정말로 알았구나. 알면서도 사랑을 주지 않았구나. 알면서도 돌아보지 않았었구나. 나네트는 힘이 빠진 웃음을 흘렸다.

덜덜 떠는 두 손 사이에서 백금의 관 역시 흔들렸다.

“그래. 그랬었군…‥.”

어딘가가 너무 아파서 미소조차 지어지지 않았다.

나네트는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뮌제는 제게로 내밀어진 백금의 관을 보고 나네트의 얼굴을 보았다. 나네트의 표정은 무너져 있었다.

“이 관, 내가 황위에 오른 뒤에 새로 만든 관이야. 알고 있겠지.”

“예.”

“내가, 그대를, 내가…….”

나네트는 떨리는 입가에 힘을 주었다.

“내가 그대를 좇아 오던 사람으로서 쓴 관이야. 그대에게 버릴 거야. 그리고 돌아가서 새로 만들어야겠어.”

“…….”

“그게 좋겠지?”

뮌제는 조용히 나네트를 응시했다. 그러다 시선을 떨어뜨렸다. 나네트와 그녀의 사이에서 죽어 가고 있는 베렐, 베렐의 피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나네트는 흐리게 미소했다.

“클리포드 후작. 이리 와. 그대가 받아.”

“……아니요, 후작.”

아까처럼 뮌제가 잘라 냈다.

움직이려던 엘르시어는 그대로 멈추었다. 그러나 황제는 재차 엘르시어를 불렀다.

“후작.”

나네트는 베렐을 피해 엘르시어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고, 그 앞을 뮌제가 막아섰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백금의 관에 달린 보석에서 뜬금없이 무슨 침 같은 것들이 수없이 튀어나왔다. 정말 뜬금없이. 정말 맥락도 없이.

아티팩트!

눈이 커진 베렐이 주춤하는 것도 잠시였다. 힘겹게 숨쉬고 있던 그는 부상 당한 몸으로 뮌제에게 달려들었다. 폭발적인 움직임이었다.

베렐이 어찌하고 있는지 보지 못한 뮌제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움직이지 않았다. 버티고 섰다. 그녀의 뒤에는 엘르시어가 있었다. 어떤 침은 분명 뮌제에게 박혔다. 뮌제는 눈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게 사람에게 박힌 마지막 침이었다. 넓게 비산하는 수천 개의 침 중 단 하나도 베렐과 엘르시어에게는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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