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왕의 굳은 결심을 맞이한 엘르시어는 다시 말했다.
“그럼 부단장에게 맡기겠습니다. 오늘은 전하의 곁을 떠나기가 저어됩니다.”
“괜찮네. 그럴 시간 없으니 잠시 다녀와. 어서.”
발롬브로사의 곁에는 근위대도 있고, 비공식적으로는 은늑대관의 기사들도 있다. 첩보 기관이라 하는 은늑대관이지만 무위도 상당했다.
은여우단이 기사단으로 불리고 있다고는 하나 결국에는 무인보다는 문인에 가까운 기사단이었다. 아티팩트를 다루는 게 다른 이들보다 능숙하고 익숙하다고는 하지만, 그들보다 근위대가 무위 높았다. 엘르시어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가 퍽 무위 높다고는 하나 근위대 대장에 비할 수는 없었다.
엘르시어는 왕의 말을 이해하고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오늘 오전부터 발롬브로사의 옆에 머문 이래 제이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없어도 그 사람은 괜찮았을 겁니다.”
“…….”
왕은 제 아들을 보았다.
서점에서 다섯째 왕자의 일이 있었던 밤부터 조용해진 아이였다.
그전에 몇 번이고 신나게 서점을 드나들었으니 그 밤에는 이미 위즈 스미스가 뮌제 로헤올임을 알고 있었을 터다.
뮌제 로헤올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는 제 자식을 가만히 살피다가 대답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
“하지만 한 번 ‘죽었던’ 것도 사실이지. 바로 얼마 전 의식을 잃고 자리보전했던 것도 사실이고.”
“…….”
“그 사람도 결국엔 인간이다. 다칠 수 있고, 죽을 수 있어.”
오늘 뮌제 로헤올은 발롬브로사 대신 상처 입고 피를 흘렸다.
출혈을 막기 위해 지혈했다.
대공을 지키기 위해 감정대로 움직여 죄를 뒤집어썼다.
누군가에게서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받았다.
발롬브로사는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네가 배우지 못한 것과 네가 외면한 것을 가지고 있어 하늘 위의 사람으로 보일 뿐, 그 사람도 너와 같은 인간이다.”
“…….”
“네 기대를 멋대로 그 사람에게 짐처럼 지게 하지 마라. 만일 그 사람이 네게 그만한 기대를 하고 있다면 너는 질식하지 않을 수 있느냐.”
차갑게 말했다.
제이는 침묵했다. 발롬브로사는 아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제이를 주시하였다. 제이가 전처럼 비웃듯 달려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정말 뮌제 로헤올과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었다. 당시 엘르시어의 보고대로라면 위즈 스미스가 제이에게 ‘그거’와 ‘무가치한 쓰레기’라 칭하며 경멸하였다 하니.
발롬브로사는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온느발레는 우리 아리오가 가진 것에 비할 수 없이 풍부한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겠지.”
창백한 얼굴로 허공을 보고 있던 제이가 그를 보았다. 호위를 위해 경계 중인 은늑대관의 관장 테드 서튼 백작도 왕을 일견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온느발레는 제국인 만큼 발롬브로사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만큼 강력하고 위험한 아티팩트를 분명 보유하고 있을 테며, 아리오의 기사들이 황제의 지척까지 침투하지 못한 까닭도 사실 그것과 관련이 있었다.
황제가 지닌 아티팩트가 어떤 종류인지, 그것들이 얼마나 강할지 예상할 수가 없어서.
황제는 그 아티팩트들로 이 세상의 그 어느 군주보다도 엄중한 보호로 무장하고 있을 터.
혹시라도 아리오의 기사가 모습을 감추고 황제의 가까이에 갔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그 기사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을 뿐더러 아리오는 심각하게 곤란해진다.
발롬브로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살면서 오늘만큼 은여우단의 현 상태와 아리오 왕실이 보유한 아티팩트들이 아쉬웠던 적이 없었다.
“그 풍부한 아티팩트로…….”
그때 제이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을 보았다. 제이는 분명한 시선으로 발롬브로사를 마주했다. 그리고 물었다.
“오늘 황제가 뮌제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답을 몰라 묻는 느낌은 아니었다.
발롬브로사는 입꼬리를 올렸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지.”
“…….”
뮌제 로헤올의 위엄은 겪어 본 적 있지만, 정치적 역량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제대로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치밀한지 직접 본 바가 없다.
그러나 얼마나 대담한지는 알겠다. 황제를 아리오까지 불러들일 정도로 대담하다는 건 체감하고 있었다.
자신을 한 번 죽이려 한 황제를 도대체 무엇 하러 초대한 건지, 살아남을 방도는 있는지, 과연 에흐베 대공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정말 알 수 없는 게 많았지만, 황제에게 살인이 특별한 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래서 제이가 오전부터 발롬브로사의 옆을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조심하시길. 황제께서는 전하의 측근을 부추겨 전하를 살해하여 왕을 교체할 수 있습니다.]
마법으로 몸을 숨기고 발롬브로사에게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곧바로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그는 황제를 겪고 나니 모험을 할 수가 없었다.
* * *
뮌제는 일정이 있는 라파엘과 헤어진 뒤 서점으로 돌아왔다.
사실 그녀는 애초에 황제가 아리오에 행차하는 것만을 원했던 게 아니었다.
그래서 뮌제는 옷을 불편해하면서도 갈아입지 않았다. 소매가 잘려서 피에 젖기까지 했음에도.
이 옷이 아리오의 옷이기 때문이다.
아리오의 왕을 ‘사랑’한다 하며 아리오 복식을 입고 있는 뮌제 로헤올이라니. 밉살스럽게 황제의 속을 건드리기에 실로 좋은 조합이었다.
이대로 기다리리라.
함께 잘린 상의 겉옷만 벗어 카운터에 놓은 후 그녀는 그저 앉아 있었다.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뮌제는 그저 앉아 있었다.
그런데 바깥이 어둑해졌을 무렵 라파엘의 기사가 새 옷을 가지고 왔다. 에흐베의 옷이 아니라 아리오의 옷이었다.
“…….”
뮌제는 펼쳐진 옷을 잠시 매만졌다.
아리오의 옷을 보냈다는 건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리라. 알면서도 그저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하였다. 무슨 마법이 담긴 보석이 박힌 타이 핀까지 보내면서도, 일단은 지켜보겠다고.
하기야, 그는 집을 구해 줬는데도 왜 굳이 불편하게 서점에 남아 있는지 물은 적이 없었다.
연회색 보석이 박힌 타이 핀을 만지작거리던 뮌제는 시계를 흘끗 확인했다.
황제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든 이미 끝나고도 남았을 시간. 아무래도 서점에 들르지 않고 공국으로 귀환한 모양이다.
뮌제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자, 서점 구석에서 아티팩트로 몸을 숨기고 있는 에흐베의 기사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최대한 눈의 초점을 흐렸다. 경계해야 하므로 눈감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전 공작은 시중받지 않고도 능숙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상의 셔츠를 갈아입고 타이를 목에 걸고 매듭을 짓던 그녀는 멈칫했다. 그리고 수 초 후 에흐베의 기사들도 멈칫했다. 기사들은 긴장했다.
뮌제는 셔츠와 타이에 타이 핀을 찔러 고정했다.
다음으로 남색의 재킷을 든 직후, 서점의 문이 열렸다.
엘르시어였다.
뮌제는 약간 놀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후작.”
“실례하겠습니다. 공, 황제가 옵니다.”
토해내듯 말한 엘르시어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손수건의 사방 모서리가 꽃잎 열리듯 열리자, 반지 하나가 보였다. 아티팩트다. 그것도 상당히 강한 마법이 담긴.
뮌제는 눈을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엘르시어는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보내시는 겁니다.”
“…….”
뮌제는 다시 반지를 보았다.
머리는 빠르게 상황을 계산해 냈다. 아. 그녀는 진심으로 난처함을 느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뮌제는 일단 들고 있던 것을 입고자 재킷을 어깨 뒤로 둘렀다. 그 소매에 한쪽 팔을 꿰며 말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지금 이게 더 필요한 분은 전하이실 겁니다.”
“한시적으로 맡기시는 겁니다.”
“황제가 여기 오는 중이기 때문에요?”
“…….”
“그래서 더욱 전하께 필요한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뮌제는 반대쪽 소매에 팔을 마저 꿰었다.
그리고는 반지를 올린 그의 손을 손으로 덮었다. 엘르시어가 멈칫하는 사이, 그녀는 그의 손가락을 구부렸다. 반지는 다시 그의 주먹으로 감싸였다.
살짝 눈을 찡그린 엘르시어가 입을 열려 하는데, 뮌제는 고개를 살짝 젓고 소리 죽여 말했다.
“쥐고 있어요.”
그 즈음에는 엘르시어도 기척을 느꼈다.
그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선 뮌제는 서점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보고 순간 눈을 찌푸렸다.
베렐이었다.
“경. 내가 저택에 머물라고 했을…….”
엘르시어를 배려하여 아리오어로 차분하게 하던 말은 그렇게 멈추었다.
이 기사는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가 느낀 마법은 아직 서점에 들어서지 않았다.
뮌제 로헤올은 피투성이의 제 기사를 보며 그대로 서 있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모습으로 들어온 기사는 휘청휘청 두 무릎을 꿇었다. 자의로 부복한 게 아니라 더는 서서 버티지 못한 것이다. 모습을 숨기고 있는 에흐베의 기사들은 그를 부축하지 않았다.
베렐은 헐떡이는 숨으로 온느발레어를 했다.
“각하. 황, 제가 왔습, 니다…….”
“…….”
뮌제는 베렐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턱을 들었다.
베렐에 뒤이어 서점에 발을 들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뮌제는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공작.”
나네트는 미소했다.
아름답게 흰 미소는 몹시도 고상하였으나 금세 사라졌다. 황제는 엘르시어를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클리포드 후작이로군.”
“…….”
“이 시간에 이리 드나들 정도로 사이가 좋은 걸 내 직접 보다니…….”
“이 사람, 제 기사, 왜 이럽니까.”
뮌제가 건조하게 잘랐다. 황제가 엘르시어에게 가진 관심을 끊기 위해서였다.
황제를 여기로 행차시키기 위해 엘르시어를 이용하기도 하였고, 그에 따라 황제가 엘르시어에게 가질 감정이 나쁠 것도, 엘르시어가 위험해진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적어도 제 눈앞에서까지 엘르시어를 위험에 처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황제는 뮌제의 그런 심경을 대략 눈치챘는지 다시금 미소했다. 그러나 황제가 입에 담는 말은 그다지 우아하지 않았다.
“내가, 공작의 기사들이 머무는 저택의 위치는 아는데, 공작이 있는 곳을 몰랐거든. 그래서 들러서 좀 물어보았네.”
몰랐을 리가.
이 서점으로 기사를 보내고 암살자를 보낸 게 당신일 텐데, 몰랐을 리가. 보고받지 않았을 리가.
뮌제는 아까 아리오에 나타났을 때보다도 화려해진 황제의 차림을 보다가, 황제의 발 앞에 등을 보이고 무너져 있는 자신의 기사에게로 눈길을 내렸다. 황제는 순간적으로 눈을 찡그렸다가 폈다.
로헤올의 현 가주는 분명 아니지만 여전히 이 기사의 주군인 뮌제는 다가가 기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죽을 부상인가.”
“아닙니다.”
그 대답을 한 직후 고통에 덜덜 떨던 아래턱이 멈추었다. 기사가 이를 악물고 참은 탓이었다.
“다른 기사들은.”
“만, 많이 다쳤습니다. 숨을, 헉, 거둔 기사도……, 있을 겁니다.”
“그래. 내가 미안하네.”
반지를 회수하지 않았다면 기사들은 바로 무슨 연락이든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뮌제는 주군의 사과를 사양하는 베렐을 부축하여 자리에 아예 주저앉게 하였다. 카운터에 등을 기대게 하니 베렐에게서는 한결 나은 호흡 소리가 났다.